어디로 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과거에 우리가 했던 것, 그리고 과거 우리의 그림자가 마치 저주처럼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닌다. --- p.15
잔솔밭에서 바늘을 찾으려면 우선 잔솔밭을 찾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아주 차분하게 바늘을 찾아야 한다. --- p.65
「우리는 역사가 영원히 주지 않을 것 같던 즐거움을 앞으로 누리게 될 거야, 동무. 우리는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될 테니까 말이야.」 --- p.124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잖아. 이건 절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라고.」 브라울리오가 나서며 말했다. 「살아남은 우리들을 위하여 건배하지.」 내가 제안했다. --- p.127
나는 누뇨아 광장에 차를 세우고 라스 란사스 바까지 걸어갔다. 오래된 노란색 건물은 내가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테라스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우리 시대의 청년들과 달랐다. 히피들은 보이지 않았고 테이블 위에는 사르트르나 프란츠 파농의 책도 없었다. 더구나 음모를 꿈꾸는 분위기도 감돌지 않았다. --- p.157
에스피노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신들의 사형 선고장에 서명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가 요구한 대로 세 명의 카자흐인을 없애면, 그다음은 자기들 차례가 될 것이 분명했다. 일단 은 풀려나겠지만 머지않아 사고로 위장해서 그들 또한 제거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건 역사의 끝을 의미하는 셈이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치열한 삶을 살아온 그들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체념의 신발을 신고 처형대 앞으로 걸어가는 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pp.204-205
「자네는 끝까지 갈 생각인가?」 에스피노사가 물었다. 「역사의 끝까지.」 살라멘디가 대답했다. --- p.216
그런데 나는 그 순간 그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다. 격전을 치르기 직전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오는 차분함, 다시 말해 두려움을 다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평온한 마음을 말이다. 어쩌면 무기를 꽉 쥔 채 죽음을, 그 마지막 기억마저 없애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여태껏 살아온 즐거운 순간들을 떠올리는 게릴라의 침묵과 다를 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