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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7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72쪽 | 214g | 130*195*13mm
ISBN13 9791161571041
ISBN10 116157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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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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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쯤 지나자 묻혀 있던 존재가 완전히 드러났다. 그것은 해골이었다. 왜 이런 게 여기 있지? 어이가 없었다. 이런 물건은 무덤이나 과학 실험실에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다. 내가 아는 한, 해골은 아무렇지도 않게 도시 뒷골목 쓰레기 속에 묻혀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길이는 150센티미터쯤 되었는데 만약 실제 사람의 뼈라면 어린아이나 여자의 유해로 추측되었다. 라이터를 켜서 표면을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퀭한 두 눈 구멍은 밖으로 나올 걸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허공만 쳐다보았다. 이가 정갈하게 배치된 턱은 손가락 하나가 드나들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꼭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한때는 저 둥근 구멍 속에 눈동자가 있어서 하늘을 쳐다보거나 나뭇가지의 존재를 느끼고 바람에 눈을 찡그렸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 p.28

더운 물로 씻어내니 해골은 더욱더 하얗게 빛났다. 해골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나는 혼자만이 온전히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광경 앞에서 다시 한 모금의 연기를 뿜어댔다. 이상한 비유지만 달이 떠난 자리에 해골이 남았다. 마치 임무 교대라도 하듯이 둘은 씩씩하게 자리를 바꾸었다. 떠나는 개체들 가운데 누구도 진심 어린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았다. 교미를 할 때는 제 흥에 겨워 사랑한다고 떠들기도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바보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인간은 그냥 그렇게 만들어진 종이라는 확신이 든다. 되는 대로 그날 기분에 따라 떠들어대는 것이다. 감정에 철학 따위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음은 너무도 명백하다.
--- pp.38~39

나는 돌아섰다. 나의 해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슬프고도 기쁜 사실이었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쁨, 상대는 비록 사람이 아닐지라도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하지만 해골은 말을 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퀭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을 멍하니 응시할 뿐이다. 그의 묵언은 끝없이 나를 시험한다. 해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 방 침대에서. 누구도 이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나는 어떤 밤길을 걸어도 행복하다.
--- p.54

우리 모두가 몸속에 해골 하나씩을 숨기고 있지만 어떤 사건이 제 몸을 두드리기 전에는 이를 느끼지 못한다. 자신 앞에 한껏 꾸미고 앉아 웃고 있는 여인이 실은 퀭한 두 눈을 지닌 해골을 숨기고 있음을 누구도 알지 못한다.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만화에서 숱하게 해골을 접했지만 누구도 해골을 진지하게 들여다본 적은 없다. 주말이면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적당히 익은 햄버거를 씹어대면서 얼마나 많은 소들이 잔인하게 도살되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해골은 해골이다. 해골이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닐 수는 없겠다. 하지만 어떤 해골이든 그것은 단순한 해골이 아니다.
-- p.67

나는 며칠 전 한 여자와 헤어졌다. 어떤 변명의 말도 듣지 못했다. 아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함께 밥을 먹을 여자가 사라졌다. 함께 영화를 보고 정치인들 흉을 보고, 새로 나온 세븐일레븐 신상 도시락과 치즈불닭라면을 맛볼 상대가 사라졌다.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그러니까, 누군가와 헤어져서 슬펐던 게 아니다. 내 말을 들어주고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며 산책할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충분히 슬퍼할 이유가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가끔 그녀의 집 근처에 갔으며 해골을 들여다보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 pp.73~74

골(GOL)!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돌연 하나의 이름이 뇌피에 새겨졌다. 그렇다, 이름을 붙여주자. 골, 나는 해골을 골이라 부르기로 결정했다. 이름을 부여 받자 골은 갑자기 인격을 지닌 존재가 되어 내 앞에 누워 있었다. 나는 골의 갈비뼈를 벤 채 침대에 누웠다. 뒷목에 견고함이 느껴졌다. 베개로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오른손으로 골의 목덜미를 쓰다듬어보았다. 언젠가 그녀의 목덜미를 천천히 쓰다듬던 기억이 났다.
--- pp.85~86

“미미상 말입니다. ‘아름다울 미’와 ‘맛 미’는 알겠는데 상처 상(傷)은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맛과 아름다움과 상처가 어떤 조합을 이룹니까. 맛에도 상처가 있습니까?”
여자가 차분한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왜 그러세요? 제가 혹시 잘못된 질문이라도…….”
내 질문에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지금까지 그걸 물어본 손님은 처음이라서. 혹시 국어 선생님이세요?”
“아뇨. 그냥…… 괜히 물었나요?”
여자는 대답 대신 다시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다음에 들르시면 알려드릴게요…….”
--- p.123

나는 소멸하는 시간이 두려웠다. 소멸하는 공간의 기억이 두려웠다. 문 밖의 시간들은 너무도 빨리 흐른다. 아이들이 후다닥 골목을 뛰어가듯, 멈춰 서 있는 나의 시간을 앞지르기 일쑤였다. 나는 시간이 갖는 이원성이 진절머리 나게 두려웠다. 나를 둘러싼 시간은 언제나 미래로 흘러갔고 나의 시간은 멈추거나 과거와 중첩된 채 좁은 방 안에 갇혀 머물길 바랐다. 나는 뼈대를 내어준 살덩이였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누구나 다 하는 이별 앞에서 너무 자주 맥주를 마셨고 추억 어린 골목을 그리워했으며 제풀에 상처 입은 자신을 보며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다가 잊혀지지 않기 위해, 남겨지지 않기 위해 버둥거렸다.
--- p.156

그녀가 갔다, 라고 적는다. 아니, 한 존재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내 시야 속에서 소멸했을 뿐이다. 이 공간 어딘가에서, 다른 시간 속에서 그녀의 삶은 계속된다. 내 삶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그 자체로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이 내린 유일한 형벌이다. 유일한 보상이다. 충분히 사랑한 사람은 충분히 보상 받는다. 완벽함의 달성이 아니라 완벽함을 향해 가는 과정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나는 손을 내밀고 3층, 제 방 침대에 누운 한 여인에게 입을 맞춘다. 불멸의 입맞춤이 지나간 뒤에 상처는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린다. 그것은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깊은 고독 속으로 침몰한다. 봄이 와도 그 자리엔 어떤 꽃도 피지 않을 것이다
--- pp.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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