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누구냐” 우악스럽게 깍두기 머리를 한 사람이 영광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저, 영광인데요!” “누가 여기 화장실 이용하랬어?” “저, 시합 나가려다 너무 급해서…….” 그들은 사설 경호원들이었다. 다른 경호원이 화장실 안을 들여다보더니 코를 붙잡고 말했다. “아이고, 냄새. 그 자식 정말 여기 화장실 썼나봐.” 벽의 스위치를 누르자 강력한 팬이 돌아가며 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꺼져! 다시는 여기 이용하지 마. 알았어?” “네.” 영광이 비척대며 분장실을 나설 때였다. 문이 열리며 여자들이 들어왔다. 철제 가방을 들었거나 화려한 의상이 걸린 옷걸이를 손에 든 여자들 서너 명 뒤로 달덩이 같은 빛을 뿜으며 미모의 여인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영광은 그녀를 보는 순간 얼어붙었다. “어, 김, 김…….” 그녀는 올림픽 피겨스케이트 챔피언 김윤아였다. 멀리서 한두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코앞에서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머리 뒤에서 후광을 뿜는 눈부신 미모였다. 주먹만 한 얼굴에 백옥 같은 피부, 비율 좋은 늘씬한 몸매와 긴 다리……. 영광은 여신이라도 강림한 것 같아 할 말을 잃었다
감독과 코치는 영광과 영진이를 불렀다. “너희 둘은 남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영광이었다. 영진의 얼굴도 사색이 됐다.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나가서 뛰기 시작하자, 감독은 두 아이 앞에 서서 물었다. “너희들은 왜 싸운 거야? 말해 봐.” “싸우지 않았습니다.” 대가 약한 영진이가 먼저 말했다. “그러면?” “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냐? 내가 다 봤는데, 이 자식이!” 감독의 솥뚜껑 같은 손이 영진이의 볼때기로 벼락처럼 날아갔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영진이는 저만치 나뒹굴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데 코에서는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며칠 지나자 부모들은 코치와 감독을 갈아 치워야 한다는 파와 그러지 말고 따끔하게 경고만 한 뒤 이대로 계속 가야 한다는 파로 확연히 나뉘었다. 학교 정문 앞 커피숍에서 열린 학부모 회의에서는 온갖 의견과 고성이 오고 갔다. 영진이 아버지도 마침내 거기에 나타나 입에 거품을 물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교육이라는 게 뭡니까? 지덕체발전시키는 거 아니겠습니까? 몸을 단련시키는 것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납니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몸을, 감독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정없이 때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폭력을 당연시하는 게 저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맞아 가면서 금메달을 딴들 무슨 의미가 있고, 욕먹어 가면서 시상대에 오르는 게 무슨 영광입니까” (…중략…) “아니 영진 아버님, 왜 그러세요. 여기 영광이 아버지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까? 영광이도 똑같이 맞았다는데요.” 감독과 코치를 옹호하는 철중이 어머니가 말했다. “다른 아이가 맞았건 안 맞았건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진이가 매를 맞게 된 것도 영광이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영광이가 패스를 주지 않는다고 둘이 서로 티격태격하는 바람에 둘 다 패배의 책임을 지고 맞은 거라고 들었습니다.” “아니 누가 그럽니까? 그건 다 헛소문입니다!” 영광이 아버지도 그 말엔 참다못해 일어났다.
영광은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뽑아들었다. 그 책은 젊은이가 꿈을 꾸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책이었다. 한때 아버지가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었을 때 모아 둔 거였다.
“삶의 비전은 인간을 끊임없이 노력하게 한다. 비전이 없는 삶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죽는 날까지 지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면 그 목표가 ‘지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끊임없이 도전할 가치가 있는 목표를 갖는다면 지치지도 않을뿐더러 매일매일 자신의 삶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삶이 된다.(…후략)”
이 구절을 읽은 영광은 문득 생각했다.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결국 스스로 이겨내야만 한다는 것을. 아이스하키는 삶의 목적이고 비전이었다. 지치지 않는, 자신의 꿈이었다. 영광은 터질 것 같은 가슴으로 집 밖으로 나가 밤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으아아아아악!” 국내 최초로 NHL 선수가 되어 한국의 이름을 빛내겠다는 꿈은 여전히 유효했다. 끝까지 추구해야 할 목표였다. 너무나 높고 숭고하여 다른 어떤 일들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태식아!” 패스를 받은 태식이 다시 한 사람 두 사람 사이를 뚫고 패스한 퍽을 어느새 골문 앞으로 다가선 영광이 침착하게 받았다. 그런 훈련을 수만 번 해서인지 마치 몸의 일부인 것처럼 스틱이 움직였다. 순간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함성과 어지러운 조명, 그리고 미끄러운 빙판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무릎의 상처는 욱신거리며 곧 십자 인대가 끊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러나 영광은 오히려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골키퍼와의 일대일 찬스였다. 골키퍼의 가랑이 사이로 커다란 틈이 보였다. 온몸의 힘을 모아 영광은 스틱을 들어 올렸다. 하늘 끝에라도 닿을 듯 치켜세운 스틱을 바람의 속도로 내리치며 퍽을 날렸다. 골문을 향해 빛의 속도로 빨려 들어가는 지름 7.62센티미터에 150그램의 퍽. 그건 미래를 향해 광속으로 날아가는 영광이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