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제 연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 저는 이해를 구한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이해를 구하는 믿음”은 캔터베리의 성 앙셀름(1033-1109)의 모토로 유명합니다. 믿음은 지성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신념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해는 단지 지성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정말 제대로 이해하면 머리가 아니라 몸이 반응한다는 것을 저는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를 하려면 일단 어딘가에는 서 있어야 합니다. 출발점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복음을 받을 때도 진공 상태에서 받은 것이 아니라, 가정, 학교, 직장을 오가던 어느 시점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이 땅 어딘가에서 그 땅의 기운과 가치를 입은 채 기독교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땅에 서서 기독교를 혹은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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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진지한 만큼 우리도 진지해야 하고, 그래서 정말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듣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타당한 것은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렇다고 상대에 흡수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화해할 때도 서로가 완전히 같거나 동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듯, 기독교와 페미니즘도 오히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가 다르다는 데에 동의함으로써(agree to disagree) 창의적인 관계의 가능성을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그러한 창의적 관계의 실마리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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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유교’의 관계라는 표현에서도 느끼겠지만, 우리는 자신이 유교 전통 바깥에 있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즉 ‘우리’라고 하는 영역이 있고, ‘유교’라고 하는 영역이 있어서 마치 내가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교회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 바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잘못하는 그 오염이 자기에게 묻지 않도록 자신과 교회 사이에 선을 그으면서 교회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교회 안에서 자랐다면 그렇게 교회와 자신을 분리해서 볼 수는 없지요. 20세기 중반부터 학자들은 한 개인이 태어나서 자란 구조는 그 개인과 그렇게 분리해서 볼 수 없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는데, 이미 성경에서 예수는 자기 눈의 들보는 남의 눈에 있는 먼지를 보는 데에 상당한 장애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들보는 흔히 편견 혹은 자기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남만 비판하는 위선으로 해석이 되지만, 자신이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이해하도록 형성된 자신의 문화적 구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문화적 구조의 들보는 사실 잘 빠지지 않습니다. 최대한 편견에서 벗어나려고 우리는 노력하지만,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을 이해하도록 양육받으며 형성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화의 과정은 끝이 없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에 대해서 가르쳐 준 교회와 선교사보다 더 오랫동안 우리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이 유교입니다.
--- p.164~165
서구 사람들은 서로 인사할 때 통성명부터 하고 자신의 직업이나 배경을 이야기한다면, 유교 사회에서는 직함이나 배경을 앞세우고 이름을 말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하면 상대를 예우하는 방식이 정해지지 않기에 이 사람과 제대로 관계를 맺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이것을 처음부터 차별이라는 프레임으로 해석하지만, 원래 유교 사회가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과 관습이 서구 사회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구의 시선을 답습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고,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법도 제대로 찾지 못합니다.
--- p.185
지금 한국 교회의 여성들이 친밀성과 성애의 대상으로 상대해야 하는 남성들은 그러한 전통과 역사를 가진 사회에서 아들로 키워진 남성들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한국 여성 자신도 그러한 전통과 역사를 가진 사회에서 딸로 키워졌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될 때에는 이 전통과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한국 복음주의 안에서 페미니즘을 논의하고자 할 때도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페미니즘이 ‘페미나(femina)’, 즉 여자에 대한 것이라면, 우선 한국 여자의 몸을 가지고 한국 여자로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해야 하고, 그 여자는 어떠한 종교 문화적 규범과 관습과 토양에서 여자로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해야 비로소 이 여자들이 지금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직면하는 문제들이 정확히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는지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다룰 수 있습니다.
--- p.243
한국 복음주의 페미니즘의 과제는 두 가지입니다. 기독교의 정통성 안에서 작업하는 것, 그리고 우리 현실의 경험에 맞게 하는 것. 기독교의 정통성 안에서 작업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의 범주와 그 해석의 전통 안에서 한다는 것이고, 우리의 현실의 경험에 맞게 한다는 것은 성차에 종교성을 두고 있는 유교 전통의 영향을 고려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기독교 용어로 ‘새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 새사람의 모델은 예수입니다. 이 예수는 중동의 독신 남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포함해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여성들이 이 종교를 따릅니다. 과연 이 여성들은 이 종교에서 무엇을 기대했고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 p.247
유교 문화에 실제로 살고 있는 우리는 유교의 가족이 얼마나 혈연중심적이고 배타적인지를 잘 압니다. 기독교는 일찍부터 혈연관계 중심이 아닌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 준 종교입니다.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면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섹스에 대한 엄격한 규범이 이러한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데, 로마 시대 때도 그랬지만 기독교가 남녀가 서로 문란하게 어울리는 집단이라는 오명을 쓰는 것은 이들이 기존의 혈연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서 남녀가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독교는 성 문제와 젠더 질서에 대해서 신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할수록 정말 파격적인 실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인 집단인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안에서도 잘난 가족, 못난 가족, 정상 가족, 비정상 가족의 구분이 생기는 것을 막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문제는 그러한 구분들을 믿음의 가족이 얼마나 넘어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 p.289
기독교는 실천의 차원을 영성으로 초월해버리려 하는 경향이 있다면, 페미니즘은 실천의 차원을 우리의 여성됨과 남성됨의 차원, 인간의 가장 친밀한 사랑과 뼈아픈 배신이 시작되는 그 차원으로 끌어내려 모든 것을 해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끈질기게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영성은 초월하려 하지 않으려 하면서 초월성을 믿고, 초월성에 대한 그 믿음 덕분에 다 해체해야 할 정도로 타락한 이 세상 속에서 붕괴되지 않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 p.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