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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4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332쪽 | 540g | 140*225*30mm
ISBN13 9788960901667
ISBN10 896090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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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뿌드드하고 후텁지근한 여름이었다. 그 여름 로젠버그 부부가 전기 사형에 처해졌고, 나는 뉴욕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지냈다.
--- p.9

우리는 유엔의 조용한 강당에 들어가 건강한 러시아 여자 옆에 앉았다. 화장기 없는 여자는 콘스탄틴처럼 동시통역사였다. 거기 앉아 있으려니 아홉 살 때까지 순수하게 행복했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다.
그 후로는 진정으로 행복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날 위해 모은 돈으로 걸스카우트 활동을 하고 피아노 레슨을 받고 수채화를 배우고 무용 강습을 받고 조정 캠프에 갔고, 대학에 진학한 후로는 아침 식사 전에 안개 속에서 배를 타고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불꽃놀이 하듯 떠올렸지만 말이다.
--- p.104

가지 끝마다 매달린 탐스러운 무화과 같은 멋진 미래가 손짓하고 윙크를 보냈다. 어떤 무화과는 남편과 행복한 가정과 아이들이었고, 어떤 것은 유명한 시인이었고, 또 어떤 것은 뛰어난 교수였다. 훌륭한 편집자라는 무화과도 있었고, 유럽과 아프리카와 남미인 무화과도 있었다. 어떤 것은 콘스탄틴, 소크라테스, 아틸라 등 이상한 이름과 엉뚱한 직업을 가진 연인이었다. 올림픽 여자 조정 챔피언인 무화과도 있었고, 이런 것들 위에는 내가 이해 못하는 무화과가 더 많이 있었다.
무화과나무의 갈라진 자리에 앉아, 어느 열매를 딸지 정하지 못해서 배를 곯는 내가 보였다. 열매를 몽땅 따고 싶었다. 하나만 고르는 것은 나머지 모두를 잃는다는 뜻이었다. 결정을 못하고 그렇게 앉아 있는 사이, 무화과는 쪼글쪼글 검게 변하더니 하나씩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 p.107

“내게 어디에 살고 싶은지, 시골인지 도시인지 물었던 거 기억해?”
“너는…….”
“나는 시골과 도시 양쪽 다 살고 싶다고 말했잖아.”
버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갑자기 힘 있게 말했다.
“그러자 너는 웃으면서 내가 진짜 노이로제 환자의 면모를 갖췄다고 말했지. 그 주에 심리학 시간에 본 질문지에 나온 질문이라면서.”
버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
“신경증이라니, 웃기네!”
나는 조롱하듯 웃고 덧붙였다.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싶은 게 신경증이라면 난 끔찍한 신경증에 걸렸어. 난 죽을 때까지 완전히 다른 것들 사이를 날아다닐 거야.”
--- p.127~129

기니 여사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가 유럽행 티켓이나 크루즈 왕복표를 줬다 해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내가 어디 있든?배의 갑판이든 파리나 방콕의 거리 카페든? 나 자신의 시큼한 공기 속에서 속을 태우며 벨 자종 모양의 유리관 밑에 앉아 있을 테니까.
--- p.245~246

단단한 땅을 1.8미터 깊이로 판 구덩이가 있겠지. 그 그림자가 이 그림자와 하나가 될 테고, 우리 고장의 노란 흙이 흰 바탕에 난 상처를 봉합해주겠지. 다시 눈이 내려 조앤의 새 무덤 자리를 지우리라.
나는 깊이 숨을 쉬고 예전 같은 심장박동 소리에 귀 기울였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
--- p.32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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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라스처럼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전설이 된 여성 예술가들이 있다.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읽고, 쓰고, 일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 그녀들은 한때 종 모양의 유리관, 벨 자 밑에 앉아 있었다. 두려움에서 자유를 향해 자신을 쏘아 올리고 싶었기 때문에. 『벨 자』는 실비아 플라스가 유리관 밖으로 걸어 나와 쓴, 매달리고 싶은 생의 기록이다. 마치 ‘해에 대고 간 칼날처럼’ 날카롭고 본질만 남은. 이제 삶보다 더 뜨거운 그녀의 문학과 정면으로 만날 차례다.

조경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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