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 부인은 계단을 마저 내려오면서 낯을 더욱 붉혔다. 프랜시스의 머리에 얹은 걸레, 걷어 올린 소매, 빨갛게 변한 손, 무릎을 디딘 자국이 고스란히 찍혀 있는 하녀용 깔개를 밟고 선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민망해하는 눈치였다. 프랜시스는 그런 표정에 익숙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의 얼굴에서 그 표정을 보았기에 지긋지긋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웃들, 판매원들, 어머니 친구들… 다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을 거쳤으면서도, 본데 있는 집안의 처녀가 청소부 노릇을 하는 광경 앞에서는 왜인지 몸 둘 바를 모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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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가계부를 정리할 때는 세입자들이 순전히 돈벌이 수단으로, 이를테면 돈다발 두 뭉치쯤으로 느껴졌었다. 그런데 지금 뒷걸음으로 움직이며 타일 바닥을 닦아나가다 보니, 세를 준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비로소 실감 났다. 친하지 않은 사람끼리 가깝게 지내는 기묘한 경험. 벌거벗은 바버 부인과 그녀 사이에 몇 평짜리 부엌과 얇은 문 한 장밖에 없는, 서로 간의 겉 포장이 벗겨진 듯한 상태. 불현듯 머릿속에 어떤 상상이 떠올랐다. 열기 속에서 발갛게 달아오른 둥근 젖가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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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테이블 너머의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둘 사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무언가가 살아 움직이고 활력이 도는 듯한…. 프랜시스는 이 느낌을 빗댈 만한 적절한 표현을 요리에서밖에 찾을 수 없었다. 달걀흰자가 뜨거운 물속에서 진줏빛으로 변하는 듯한, 우유 소스가 냄비 안에서 걸쭉해지는 듯한, 미묘하면서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는 어떤 변화. 바버 부인도 그걸 느꼈을까?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의아한 눈빛을 띠면서 미소를 굳히더니, 미간을 찡그렸다가 다시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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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의 모든 것이 어긋나는 것 같았다. 모조리 잘못되어가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 실컷 웃고 떠들던 것도, 유치한 미용실 놀이도, 옷을 몇 벌씩 갈아입던 것도… 다 사라져버렸다. 아니, 사라지기만 한 게 아니라, 프랜시스의 고백 때문에 의심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더럽혀진 것만 같았다. 지금 묵묵히 가위와 빗을 정리하는 릴리안은 흡사 화가 난 듯 보였다. 지금껏 한결같이 상냥하고 스스럼없는 모습만 보여온 그녀인데. 마음이 멀어지려는 걸까? 둘 사이에 있었던 기묘한 사건들을 돌이켜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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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안은 얼굴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더니, 무슨 결심을 한 듯 몸을 돌려 벽난로 위의 굴뚝 쪽을 마주하고 레너드와 프랜시스를 등졌다. 그러나 레너드에게만 정면으로 등을 보이는 각도였고, 프랜시스가 앉은 안락의자는 그보다 비스듬한 각도에 위치했다. 프랜시스는 갑자기 릴리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치마 밑단을 들춰 올리고 치맛자락 안으로 손을 넣어 스타킹 맨 윗부분을 더듬어 찾고 있었다. 스타킹이 그녀의 허벅지 밑으로 끌려 내려가면서 색깔이 점점 불투명해지더니, 무릎과 정강이를 지나, 허공으로 들어 올린 발까지 이르렀다. 마침내 스타킹이 완전히 벗겨지자 레너드가 길거리의 막일꾼처럼 휘파람을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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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와 릴리안은 열린 문간 너머로 시선이 마주치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졌다. 계단에서 서로를 지나칠 때는 몸이 실제보다 두 배는 커진 듯 느껴졌고, 온통 손과 가슴, 엉덩이만 의식되었다. 잠시 멈춰 서서 대화를 나눌라 치면 둘 다 신경과민이라도 걸린 듯 어색해졌다. 그런데 헤어지기가 무섭게 또 만나게 되는 것 같았다. 마치 둘이 실로 연결되어서 서로에게 계속 이끌리는 것만 같았다.
--- p.238
프랜시스는 스웨이드 신발에 피가 묻지 않도록 조심조심 둘러 가서 조리대에 등을 기댔다. 부엌이 엄청나게 혼잡한 아수라장이 된 듯 느껴졌다. 이런 긴박한 소동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작은 방이었다. 프랜시스는 자신이 아직도 모자를 쓰고 있고 손목에 핸드백이 매달려 있다는 걸 깨닫고, 모자와 가방을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해가 안 되네요. 그 사람이 누구죠? 왜 그런 짓을 한 거예요”
콧구멍을 행주로 훔치던 레너드는 넌더리를 내는 눈초리로 자기 손끝을 흘겨보았다. “말했잖아요. 나도 모른다니까요.”
--- p.273
금세 눈이 어둠에 적응되었고, 곁에 있는 릴리안의 형체가 희부옇게 시야에 들어왔다. 프랜시스는 두 손을 내밀어 릴리안의 얼굴을, 입술을 더듬어보았다. 입술이 매끄럽고 서늘하고 촉촉했다. 프랜시스는 그녀의 입술을 만지는 손을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키스했다. 자신의 손가락들을 혀로 타고 넘으며 키스를 하다가, 축축하게 젖은 손을 빼내서 릴리안의 목에서부터 옷깃 바로 위의 보드라운 피부까지 훑어 내렸다.
잠옷에는 조그맣고 딱딱한 진주 단추 세 개가 달려 있었다. 프랜시스는 첫 번째 단추를, 그리고 두 번째 단추를 풀었다.
“풀어도 돼”
릴리안은 주저했지만, 세 번째 단추도 이미 풀려버렸다.
--- p.282
리안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만하라니까, 프랜시스! 나도 너를 너무나 사랑해. 하지만 우린 서로 다르단 말야. 너도 잘 알잖아. 너야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개의치 않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널 사랑하는 것이기도 해. 처음부터 너의 그런 점을 좋아했으니까. 네가 그 빌어먹을 걸레를 머리에 얹고 마루를 닦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쭉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너처럼 그럴 수 없어. 너랑은 입장이 다르다고. 나는 모든 걸 포기해야 할 거야. 너 말고 다른 여자는 사랑할 수도 없을 거야. 하지만 너는… 너는 나한테 싫증이 나겠지. 네타 언니 파티 날 이후 지금까지도, 나는 네가 하루가 다르게 싫증을 낼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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