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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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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0년 11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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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PC(Mac)
파일/용량 EPUB(DRM) | 12.74MB ?
ISBN13 9788954436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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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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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 부인은 계단을 마저 내려오면서 낯을 더욱 붉혔다. 프랜시스의 머리에 얹은 걸레, 걷어 올린 소매, 빨갛게 변한 손, 무릎을 디딘 자국이 고스란히 찍혀 있는 하녀용 깔개를 밟고 선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민망해하는 눈치였다. 프랜시스는 그런 표정에 익숙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의 얼굴에서 그 표정을 보았기에 지긋지긋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웃들, 판매원들, 어머니 친구들… 다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을 거쳤으면서도, 본데 있는 집안의 처녀가 청소부 노릇을 하는 광경 앞에서는 왜인지 몸 둘 바를 모르는 듯했다.
--- p.38

아까 가계부를 정리할 때는 세입자들이 순전히 돈벌이 수단으로, 이를테면 돈다발 두 뭉치쯤으로 느껴졌었다. 그런데 지금 뒷걸음으로 움직이며 타일 바닥을 닦아나가다 보니, 세를 준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비로소 실감 났다. 친하지 않은 사람끼리 가깝게 지내는 기묘한 경험. 벌거벗은 바버 부인과 그녀 사이에 몇 평짜리 부엌과 얇은 문 한 장밖에 없는, 서로 간의 겉 포장이 벗겨진 듯한 상태. 불현듯 머릿속에 어떤 상상이 떠올랐다. 열기 속에서 발갛게 달아오른 둥근 젖가슴이.
--- p.42

그들은 테이블 너머의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둘 사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무언가가 살아 움직이고 활력이 도는 듯한…. 프랜시스는 이 느낌을 빗댈 만한 적절한 표현을 요리에서밖에 찾을 수 없었다. 달걀흰자가 뜨거운 물속에서 진줏빛으로 변하는 듯한, 우유 소스가 냄비 안에서 걸쭉해지는 듯한, 미묘하면서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는 어떤 변화. 바버 부인도 그걸 느꼈을까?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의아한 눈빛을 띠면서 미소를 굳히더니, 미간을 찡그렸다가 다시 폈다.
--- p.118

둘 사이의 모든 것이 어긋나는 것 같았다. 모조리 잘못되어가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 실컷 웃고 떠들던 것도, 유치한 미용실 놀이도, 옷을 몇 벌씩 갈아입던 것도… 다 사라져버렸다. 아니, 사라지기만 한 게 아니라, 프랜시스의 고백 때문에 의심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더럽혀진 것만 같았다. 지금 묵묵히 가위와 빗을 정리하는 릴리안은 흡사 화가 난 듯 보였다. 지금껏 한결같이 상냥하고 스스럼없는 모습만 보여온 그녀인데. 마음이 멀어지려는 걸까? 둘 사이에 있었던 기묘한 사건들을 돌이켜보는 걸까?
--- p.164

릴리안은 얼굴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더니, 무슨 결심을 한 듯 몸을 돌려 벽난로 위의 굴뚝 쪽을 마주하고 레너드와 프랜시스를 등졌다. 그러나 레너드에게만 정면으로 등을 보이는 각도였고, 프랜시스가 앉은 안락의자는 그보다 비스듬한 각도에 위치했다. 프랜시스는 갑자기 릴리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치마 밑단을 들춰 올리고 치맛자락 안으로 손을 넣어 스타킹 맨 윗부분을 더듬어 찾고 있었다. 스타킹이 그녀의 허벅지 밑으로 끌려 내려가면서 색깔이 점점 불투명해지더니, 무릎과 정강이를 지나, 허공으로 들어 올린 발까지 이르렀다. 마침내 스타킹이 완전히 벗겨지자 레너드가 길거리의 막일꾼처럼 휘파람을 불었다.
--- p.202

프랜시스와 릴리안은 열린 문간 너머로 시선이 마주치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졌다. 계단에서 서로를 지나칠 때는 몸이 실제보다 두 배는 커진 듯 느껴졌고, 온통 손과 가슴, 엉덩이만 의식되었다. 잠시 멈춰 서서 대화를 나눌라 치면 둘 다 신경과민이라도 걸린 듯 어색해졌다. 그런데 헤어지기가 무섭게 또 만나게 되는 것 같았다. 마치 둘이 실로 연결되어서 서로에게 계속 이끌리는 것만 같았다.
--- p.238

프랜시스는 스웨이드 신발에 피가 묻지 않도록 조심조심 둘러 가서 조리대에 등을 기댔다. 부엌이 엄청나게 혼잡한 아수라장이 된 듯 느껴졌다. 이런 긴박한 소동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작은 방이었다. 프랜시스는 자신이 아직도 모자를 쓰고 있고 손목에 핸드백이 매달려 있다는 걸 깨닫고, 모자와 가방을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해가 안 되네요. 그 사람이 누구죠? 왜 그런 짓을 한 거예요”
콧구멍을 행주로 훔치던 레너드는 넌더리를 내는 눈초리로 자기 손끝을 흘겨보았다. “말했잖아요. 나도 모른다니까요.”
--- p.273

금세 눈이 어둠에 적응되었고, 곁에 있는 릴리안의 형체가 희부옇게 시야에 들어왔다. 프랜시스는 두 손을 내밀어 릴리안의 얼굴을, 입술을 더듬어보았다. 입술이 매끄럽고 서늘하고 촉촉했다. 프랜시스는 그녀의 입술을 만지는 손을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키스했다. 자신의 손가락들을 혀로 타고 넘으며 키스를 하다가, 축축하게 젖은 손을 빼내서 릴리안의 목에서부터 옷깃 바로 위의 보드라운 피부까지 훑어 내렸다.
잠옷에는 조그맣고 딱딱한 진주 단추 세 개가 달려 있었다. 프랜시스는 첫 번째 단추를, 그리고 두 번째 단추를 풀었다.
“풀어도 돼”
릴리안은 주저했지만, 세 번째 단추도 이미 풀려버렸다.
--- p.282

리안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만하라니까, 프랜시스! 나도 너를 너무나 사랑해. 하지만 우린 서로 다르단 말야. 너도 잘 알잖아. 너야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개의치 않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널 사랑하는 것이기도 해. 처음부터 너의 그런 점을 좋아했으니까. 네가 그 빌어먹을 걸레를 머리에 얹고 마루를 닦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쭉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너처럼 그럴 수 없어. 너랑은 입장이 다르다고. 나는 모든 걸 포기해야 할 거야. 너 말고 다른 여자는 사랑할 수도 없을 거야. 하지만 너는… 너는 나한테 싫증이 나겠지. 네타 언니 파티 날 이후 지금까지도, 나는 네가 하루가 다르게 싫증을 낼 줄 알았어.”
--- p.356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1922년, 런던은 긴장으로 팽팽하다. 퇴역 군인들은 환멸에 젖었고, 실직자들은 변화를 요구한다. 런던 남부에 있는 어느 고풍스러운 저택에 사는 한 모녀는 전쟁의 치명적인 상실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 어느 날 급변한다.
남편을 여읜 레이 부인과, 흥미로운 과거를 지녔지만 이제는 노처녀가 되어가는 딸 프랜시스는, 부득이하게 저택 안의 방들을 세 놓게 된다.
‘사무직 계급’의 젊은 부부인 릴리안과 레너드가 세 들어오면서 집 안에는 불안한 것들이 깃든다. 축음기 음악, 현란한 색채, 웃음. 프랜시스는 열린 방문 너머로 세입자들의 생활을 조금씩 보게 되고, 계단과 복도에서는 걸핏하면 서로가 마주치기 일쑤다.

프랜시스와 릴리안이 예기치 못한 우정에 빠져들면서, 그들 모두의 관계는 변해간다. 프랜시스는 릴리안에게 커밍아웃을 해버리고, 둘은 파티에 다녀온 날 밤에 서로의 맘을 확인한다. 가장 평범했던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열정으로 가득한 한 편의 드라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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