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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락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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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1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486쪽 | 632g | 148*210*30mm
ISBN13 9791197227509
ISBN10 1197227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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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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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란일이 새겨진 달걀을 낳는 닭이 출현했다. 사람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중략) 모니터 화면에 구골(Googol; 10100)개의 점을 무작위로 찍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화면이 꽉 채워지면 결과물을 종이에 출력한다. 그리고 다시 빈 화면에 새로운 세션을 시작한다. 이 프로그램을 구골의 속도로 구골 번 반복 실행한다. 쏟아져 나온 출력물의 대부분은 의미 없는 그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중 몇 개는 반 고흐의 해바라기나 베토벤의 악보가 될 수도 있으며, 셰익스피어나 성경의 한 구절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생물의 유전자 지도나 난해한 수학 방정식의 해가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자신과 똑같이 무작위로 점을 찍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니라 존재 가능한 확률의 이야기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어떤 한 점으로부터 진화해온 바로 우리, 지금의 인류다.
--- p.5

무정란은 정자와 수정하지 않은 난자가 배출된 것으로, 인간 여성으로 따지면 ‘매달’ 하는 생리에 해당한다. 즉 암탉은 배란과 생리를 ‘매일’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생리로 배출된 난자가 아이가 될 수 없듯이, 무정란은 병아리로 부화할 수 없다. 지금 지구상에 살아 있는 닭의 수는 약 200억 마리로 추정된다. 시시각각 살아 움직이는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일 부화하는 병아리와 매일 죽어 나가는 닭이 수십억 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움직임이 없는 죽은 숫자로 살아 있는 닭의 수를 가늠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죽은 숫자 중 하나는 ‘500억’으로 전 세계에서 1년 동안 도축되는 닭의 수이고, 다른 하나는 ‘1조 2,000억’으로 한 해에 인류가 먹어 치우는 달걀의 수다.
--- p.14

나는 2살 때 난황낭 종양이라는 희귀 난소암 진단하에 양측 난소를 모두 적출하는 수술을 받았다.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대학병원 의사는 평생 매일 오후 5시에 복용해야 할 여성 호르몬 알약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약 덕분에 나는 이차 성징을 겪는 또래의 친구들처럼 가슴도 커졌고, 생리도 시작했다. 어머니가 챙겨 주신 파우치 안에는 호르몬 약과 생리대가 늘 함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출혈과 지혈을 동시에 지니고 다녔다.
--- p.25

앤과 처음 만난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중략) 만난 지 10초 만에 이 여자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앤의 얼굴은 통통한 볼살 덕분에 작고 사랑스러운 하트 모양이었다. 단 한 번도 속상해본 적이 없었을 거 같은 하얀 피부와 옅은 홍조를 띠는 앞볼 때문에 꼭 귀여운 토끼 인형 같았다. 내 소개를 하려는 참에 그녀는 불쑥 한 손을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7층 사시죠? 며칠 전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번 뵀어요. 전 2층에 산답니다. 초면에 실례지만 생리대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갑자기 터져서요. 2장이면 더 좋아요.” 이 흰 토끼의 붉은 곤란함에 나까지 볼이 빨개졌다.
--- p.58~59

피가 데워지는 느낌이 들면서 배꼽 아래가 살짝 아팠지만, 통증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간지러움이었다. 이 간지럼은 공명에 흔들리는 북 가죽처럼 내 몸 전체를 연주했고 먼지 낀 내 자궁을 스위트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설명 못 할 감정의 근원지는 내가 2살 때 작별한 난소였다. 처음 느껴본 이 어색한 달콤함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치마를 살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얼룩은 끈적끈적했지만 거의 티 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얼룩을 훔치고,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입술로 빨았다.
--- p.132

“다리가 새로 생긴 것 같아.” 첫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뒤뚱거렸지만, 그 흔들림에는 점점 고조되는 밝은 율동이 있었다. “잘됐네. 그 새로운 다리로 내일 당장 피터를 만나러 가.” A4 용지를 가방에 챙기며 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앤은 오늘 지시한 모든 것을 차질 없이 수행한 후 즉각 보고하라고 명했다. 마지막으로 전원주택으로 리허설 갈 때 제발 철 지난 옷 좀 입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아까 읽던 책의 결말은 뭐야?” 앤이 흰색 레이스 팬티 이야기를 꺼내려고 할 때 내가 말을 끊었다. 지금 끊지 않으면 잔소리가 끝없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뻔하지. 둘은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p.168

로댕. 지옥의 문. 거대한 예술 작품의 고귀한 중력(重力)이 전시실 공간을 순식간에 뒤틀어 버렸다. 뇌세포들은 일체의 장력(張力)을 상실한 채 작품 쪽으로 쏠렸다. 과하게 쏠려버린 뇌세포들은 두개골 안쪽에 둔중한 압력(壓力)을 가했다. 청동의 육중한 질량이 하찮은 것들에게 행사하는 강력한 인력(引力) 때문에 관람객 모두 지옥의 문 앞으로 좀비처럼 끌려왔고 이내 청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 p.253

자로 잰 듯한 간격을 두고 당당히 도열해 있는 옥수수들은 대나무처럼 꼿꼿했고, 놀라울 정도로 키가 똑같았다. 어찌나 단단하게 고정이 되어 있는지,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미동조차 없었다. 밭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옥수수의 고요함은 클락헨의 침묵과 닮아 있었다. 이 3m짜리 식물은 클락헨 사체가 묻힌 땅에 단단히 빨대를 꽂은 후, 그 즙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올려서 성장하는 듯했다. 탐욕스러운 GMO 옥수수는 침묵을 거름 삼아 더 큰 침묵을 맺어냈다. 이 식물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옥수수의 조상 테오신테(teosinte)는 알갱이가 10개 정도밖에 열리지 않는 강아지풀이었다. 500개의 알갱이가 열리는 지금의 옥수수가 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낯섦과 낯익음이 엉겼다. 머릿속에서 테오신테와 GMO 옥수수 그리고 닭과 클락헨이 2×2로 교차했다. 바로 그때 리처드 소장과 마주쳤다.
--- p.309

클락헨의 전파 속도는 순식간이었다. 이제 전 세계에 클락헨이 없는 곳은 없었다. 유목민은 양과 함께 클락헨-셈을 몰고 다녔고, 에스키모는 이글루 안에서 클락헨을 키웠다. 전 세계의 양계 업계가 클락헨만을 키웠다. 인류는 클락헨을 좋아했고, 클락헨이 주는 모든 혜택을 독점했다. 풀과 나무는 물론 종이와 쓰레기도 먹어 치우는 클락헨 보급으로 인류는 어디에서도 손쉽게 단백질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지구상에서 기아문제는 사라졌다. 세계 영양 부족 인구 8억이라는 숫자는 단숨에 0이 되었다. 유니세프 등의 TV 후원 모금 광고에 더는 영아의 앙상한 갈비뼈가 나오지 않았다. 식량 기부 단체들은 빈민촌과 난민촌의 클락헨 축사 건립에 모든 후원금을 썼다. 인류는 이 닭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391

외부와 차단된 채, 그는 새로운 극비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리처드의 큰 그림에는 모서리가 없었다. 클락헨은 런칭 1년 만에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클락헨이 있었다. 클락헨은 전 세계에서 기아를 몰아냈고, 인류에게 더할 나위 없는 번영을 안겨주었다.
--- p.407

4색의 담채화 같던 연구소는 이제 먹지가 되었다. 나만의 4성 푸가도 검은 침묵으로 덮였다. 연구소 전체를 감싸던 프란츠 피터 슈베르트의 테너 파트는 추방되었다. 소프라노와 베이스를 맡았던 살처분장의 해머 소리와 닭의 비명은 재앙의 날 멈췄다. 클락헨이 벙어리가 된 후부터 알토 파트를 맡았던 코끼리 가족의 울음은 죽어버렸다. 지금은 검은 침묵뿐이다.
--- p.429

‘음악은 검어진 세상으로부터 가쁘게 도망쳤다. 내 글은 사라지는 선율을 추격했다. 마침내 소리의 등에 펜을 꽂았고 잡아챈 음악을 행간에 심었다.’ 이 파일은 먼 훗날 새롭게 데뷔하는 풋풋한 신(神)의 묵시록과 창세기가 될 것이다.
--- p.450

믿어줄 뇌가 없는데 신은 존재하는가? 리처드의 2×2표도 마지막 칸을 채울 수 없는 영원한 미완성이었다. 읽어줄 뇌가 없는데 언어가 존재하는가? 언어는 체계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상을 구현한다. 신이 만든 세계 역시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해 존재했었다. 이 책을 완성된 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게 참이라고 한들 누가 읽을 것인가? 읽어줄 주체가 없는 책은 완성될 수 없다.
--- p.452

진화란 유전자 위로 쏟아졌던 시간들의 4성 푸가였다.
--- p.473

수학. 가장 신에 가까운 체계였다. 진화와 확률 그리고 무한을 상상하게 해주었다. 신(神)은 지금도 팽창하고 있는 무한의 구(救)다. 그 거대한 구의 곡률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한 적이 있다. ?(중략) 질식의 끝자락에서 의식이 혼미해질 때, 공간이 왜곡되면서 신의 곡률을 느꼈다. 부피는 순식간에 뭉그러지더니 한 점으로 수렴됐다. 괴사 직전에 허혈이 풀리면서, 점은 단번에 팽창해서 원래의 부피가 되었다. 신의 곡률이 다시 무한대가 되면서 세상이 현현(顯現)했다. 숨 가쁜 팽창 때문에 공간이 전율했는데, 그 떨림이 바로 음악이었다. 4가 모이자, 14가 노래했고, 42가 날아올랐다.
--- p.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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