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상대방에게 장애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적절한 반응은 무엇일까?
1. “미안하지만 난 못 하겠다.”
2.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사랑에 장애가 어디 있니?”
둘 다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이 멍해졌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p.15, 「그는 소개팅에 40분이나 늦었다」 중에서
그도 비슷한 시기에 제주도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순간 지나가는 생각은 하나! ‘그와 같이 비행기를 타면 장애인 동반 할인! 항공료가 반값!’ 순수한 마음으로 항승에게 제안했다.
“우리 제주도 같이 갈래?”
--- p.24, 「여행은 핑계였고 사실 너를 더 알고 싶었어」 중에서
“난 너를 좀 더 알고 싶어. 너와 많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 너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어.”
그는 내게 고백했다. 예상을 하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망설임 없는 고백에 그저 당황했다. 누군가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는 것에,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에,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 p.38, 「너의 고백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중에서
그와 사귀게 된다면 우린 보통 커플처럼 거리 데이트를 할 수 있을까? 부모님께 과연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까? 근데 아무리 정리해 봐도 이건 논리적인 문제가 아닌 듯했다. 논리로 살아가던 나에게 감정으로 선택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그때의 당황스러움이란.
--- p.42, 「너의 고백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중에서
‘의족을 꼈지만, 오래 걷는 데이트를 해도 괜찮네’, ‘팔이 하나 없어도 운전을 잘하니까 문제없네’, ‘장애가 있어도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른 게 없네’, ‘장애인 박항승과 연애를 하고 있지만 이 남자는 의족을 사용해서 잘 걸을 수 있으니, 그의 장애는 우리의 사랑에 문제가 되지 않아’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나에게 세뇌시키고 있었다.
장애가 있지만 장애인스럽지 않은 항승을 계속해서 바라고 있었다.
--- p.60-61, 「제 남자친구는 장애인입니다」 중에서
‘너는 장애가 있어서 아마 못 할 거야.’
학창 시절, 사람들은 입 밖으로 이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태도와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아무도 그에게 ‘무언가를 잘해 내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가만히 존재했다. 가만히 존재하는 삶은 퍽 편했지만 동시에 꽤 불쾌했다.
--- p.73,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오늘」 중에서
그렇게 보통의 데이트를 마치고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뛰어와 급하게 말했다.
“저기요. 다리 좀 가리고 다녀요.”
50대 후반은 족히 넘었을 경비원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본인이 있던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둘은 그 한마디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다니면서 이런 무례한 이야기를 면전에서 직접 들은 건 처음이었다.
순간 숨이 턱 막혔고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입술이 옴짝달싹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 p.81-82, 「남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아」 중에서
편견 어린 시선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의 사랑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이 아니라 그냥 항승과 주리의 사랑이라고.
--- p.87, 「남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아」 중에서
‘그래,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던 결혼식이야!’
슬로프에는 이미 많은 하객분들이 모여 우리의 행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대한 따뜻한 옷과 신발로 참석해 달라는 청첩장의 문구에 맞게, 대부분 운동화와 부츠를 신고 눈 위에 서 계셨다. 하객분들의 환호를 받으며 리프트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동안 항승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항승아, 우리가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
“주리야, 그래서 나는 우리가 너무 좋아.”
--- p.109-110, 「스노보드 타고 결혼 행진」 중에서
그가 나에게 해주는 말과 행동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아~괜찮아. 열심히 준비해서 한 거니까.” (위로)
“아~그랬구나. 오늘 많이 힘들었겠네.” (공감)
“아~정말? 대단하다. 역시 잘할 줄 알았어.” (칭찬)
우스갯소리로 너는 “아~”라는 한 글자만 잘 사용하면 나와의 대화에서 언제나 옳다고 항승에게 말한 적이 있다.
--- p.117, 「행복은 주말 저녁의 치킨 한 마리와 맥주 두 캔」 중에서
그리고 당당하게 ‘2017 세계 장애인 스노보드 월드컵’에서 4위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HANG SEUNG PARK]
1호선 신길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열심히 지하 통로를 걷고 있던 중 그의 경기 결과가 올라온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가. 결과가 좋으니 그에게 가지고 있었던 작은 미움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는 슬로프 위에서, 나는 아스팔트 길 위에서 기쁨을 만끽했다.
경기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항승의 엉덩이를 톡톡 두들겨 주었다.
“내 사랑, 잘했다, 잘했다, 잘했어!”
--- p.131-132, 「널 위한 120만 원」 중에서
그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면 좋을까,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내 사랑 항승의 인생 최고 도전인데 평범하게 응원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심 끝에 “팔 하나, 다리 하나, 메달 하나”를 중심 문구로 여러 버전의 현수막을 만들었다. 그를 향한 나의 지지와 응원은 언제나 이렇게 조금은 B급 감성이었다.
--- p.139, 「이미 나는 너의 금메달」 중에서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 어제는 멜로, 오늘은 코미디, 내일은? 당장 다음 순간도 예상할 수 없는 게 인생이라 더 즐거울까 아니면 더 불안할까. 그렇지만 앞으로는 내 옆에 항상 그가 있을 거니, 우리의 인생이 스릴러로 변해도 괜찮을 것 같다. 연쇄살인범도 팔 하나 없는 항승이 안타까워 풀어 주지 않을까? 우스갯소리 같지만 진심이다.
--- p.146, 「이미 나는 너의 금메달」 중에서
임신 기간 동안 고민을 꽤나 많이 했었다. 생략된 주어는 모두 “아빠 항승”이다.
‘아이를 한 손으로 돌볼 수 있을까?’, ‘신생아를 안고 분유를 먹일 수 있을까?’, ‘기저귀를 갈 수 있을까? 목욕은?’,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을 같이 해줄 수 있을까?’.
내 남편이 장애인인 것과 내 아이의 아빠가 장애인인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 남편은 선택할 수 있지만 아빠는 선택할 수 없다.
--- p.160, 「보통의 부모처럼」 중에서
이런 날들이 반복되자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절절하게 끓던 사랑은 어디 가고 서로를 내외하는 사랑만 남았을까. 이런 사랑도 사랑인가, 한숨 섞인 아쉬움이 피어올랐다. 그런 나에게 항승이 말했다.
“요즘 우리 사랑이 좀 뜨뜻미지근하긴 했지. 근데 이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닐까?”
--- p.171, 「육아 앞에선 찐 사랑도 뜨뜻미지근」 중에서
종일 아이와 이야기하다 보면 엄마가 아닌 인간 권주리로 대화하는 방법을 까먹는 것 같았다. 아이를 매개로 한 만남도 만들어 봤지만 칭얼대는 아이를 품에 안고서 엄마가 아닌 인간으로서 대화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손으로는 다 식은 커피를 겨우 들이켜며,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가 흘린 음식물을 닦았다.
--- p.177, 「가끔 내가 희미해질 때」 중에서
우울함의 시작은 언제였을까. 열 살 무렵의 여름, 개학식 전날. 그날 방 안에서 혼자 일기장을 꼭 잡은 채로 숨을 삼키며 울었다. 장애가 있는 동생이 고추장 묻은 손으로 책상 위에 있던 내 일기장을 만져 버린 뒤였다. 표지부터 속지까지 온통 빨간 손자국으로 가득했고 시큼한 냄새까지 났다.
--- p.191-192, 「유쾌한 우울」 중에서
시가 식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강하게 치고 있던 울타리가 하나씩 무너졌다. 시부모님과도 마찬가지였다. 완벽한 며느리가 되겠다는 생각은 원래도 없었지만 그래도 세상이 요구하는 며느리 역할에서 너무 벗어나지는 말자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재단해 왔는데, 요즘은 더 이상 그럴 필요조차 없다. 며느리 취급을 당하지 않겠다며 예민하게 날이 서 있던 내 모습이 조금씩 뭉그러졌다. ‘시가’라서 다르게 보이던 그들이 그저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보였다.
--- p.205, 「그렇게 가족이 되어 간다」 중에서
매체 속 장애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장애를 노력과 의지로 극복하며 멋진 삶을 살아 낸다. 하지만 이런 장애 극복 스토리에 의해 현실 속의 진짜 장애인들이 더 큰 편견에 휩싸인다.
“TV에 나온 그 사람 봐, 장애가 있는데도 얼마나 열심히 사니. 너도 그럴 수 있어.”
--- p.209-210, 「장애를 극복하며 살 수 있을까」 중에서
아이를 재운 뒤 둘이 같이 거실로 나오면 주방 옆에 있는 세탁기 안에는 세탁되어 축축한 빨래가 남아 있다. 빨래를 꺼내 베란다에 있는 건조기에 넣으려면 집을 가로질러 꽤 많은 걸음을 옮겨야 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매일 저녁마다 고민했다.
‘항승에게 해달라고 할까, 그냥 내가 할까.’
내가 하면 항승은 다시 다리를 낄 필요가 없으니 편하다. 하지만 매일 내가 하면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이 상황이 억울해질 것이고, 결국 항승의 장애를 탓하게 될 것이다.
--- p.214-215, 「장애를 극복하며 살 수 있을까」 중에서
담벼락에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핀 봄날이었다. 항승과 손을 잡고 길을 걷다가 그가 문득 말했다.
“주리야, 나 인간극장에 출연하고 싶어. 해줘!”
‘내가 방송국 피디도 아니고 인간극장 제작진도 아닌데 얘는 왜 나한테 출연을 시켜 달라고 하지?’라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자 말을 덧붙였다.
“글을 쓰자. 블로그든 어디든 우리에 관한 글을 써보는 거야.”
--- p.217, 「여전히 블로그를 쓰는 이유」 중에서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 질문에 끊임없이 답을 해야만 하는 것임을 몰랐다. 때로는 행동으로, 때로는 눈빛으로 최선의 답을 하려 애썼다. 모든 답의 끝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나는 항승을 사랑해.”
--- p.229, 「우리는 왜 사랑을 찾아 헤매는 걸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