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탐미주의 작가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고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히라오카 기미다케平岡公威이다. 1944년 가쿠슈인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엘리트 관료 집안에 맞는 진로를 선택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도쿄대학 법학부에 입학한다. 1941년 「꽃이 한창인 숲」을 문예지에 발표하면서 ‘미시마 유키오’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1944년 가쿠슈인 고등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1947년 대학 졸업 후 대장성의 관료가 되었지만 이듬해 전업 작가가 되기 위해 퇴직했다. 열세 살 때부터 필명을 만들어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던 미시마가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한 것은 1946년에 쓴 단편 「담배」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인간』지에 실리면서부터이다.
1949년 대학을 졸업한 미시마는 대장성 금융국에서 근무하지만 공무원 사회의 관료주의를 이기지 못한 채 일 년 만에 사표를 내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무렵에 쓴 장편 『가면의 고백』을 통해 일본 주요 작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그는 화려한 문장과 미의식을 바탕으로 『사랑의 갈증』, 『푸른 시절』, 『금색』 등의 수작을 잇달아 발표했으며, 1957년 『금각사』가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학의 절정기를 맞이한다. 『금각사』의 성공 이후 미시마 유키오는 수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며 국제적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1961년에는 2·26 쿠데타 사건을 소설화한 단편 「우국」을 발표했는데, 이는 자신의 종말을 예언한 작품이기도 하다.
1970년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4부작 장편소설 『풍요의 바다』 마지막 편을 출판사에 넘긴 미시마는 자신의 추종자를 데리고 1970년 11월 25일 일본 자위대 주둔지에 난입하여 자위대의 궐기를 촉구하는 연설을 한 후 대중 앞에서 할복하여 일본 국내는 물론 세계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지면서 45세의 생을 마감했다.
“다니자키의 『문장독본』을 중학생 시절 구석구석까지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 당시의 잘못된 작문 교육이 (지금도 그럴지 모르지만) 무엇이든 꾸밈없고 뜻이 잘 전달되는 리얼리즘 문장만을 글로 인정하는 경향에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이 책을 읽고 눈이 뜨이게 되었으며, 다니자키가 자신의 취향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종류의 문체가 지닌 각각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태도에 용기를 얻었다.”
도쿄에서 나고 자라서 오사카라는 도시를 몰랐던 에쓰코는 일류 상인, 노숙자, 공장주, 주식 중개인, 거리의 창녀, 아편 밀수업자, 노동자, 몰락한 가문의 자제, 은행가, 공무원, 시의원, 무성 인형극의 변사, 첩, 인색한 여자, 그리고 신문기자, 기생, 구두닦이들로 가득한 이 도시에 이유 없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에쓰코가 무서워한 것은 도시가 아니라 삶 그 자체였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