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초롬은 ‘생고기’, 아니 그보다 훨씬 생것인 무언가를 계속해서 끄집어낼 줄 안다. 그리고 그것을 따가운 “불판 위에 척,”(「엄마 딸이 죽었습니다」) 하고 구울 줄 안다. 애증으로 덕지덕지한 가족에 대해, ‘나’에 대해, ‘나’와 ‘나’의 주변을 휘감는 병에 대해, “칼끝을 물고 있”(「홍옥」)는 것만 같은 생활에 대해 전력으로 고백할 줄 안다. 고백은 대체로 담담하나, 가끔은 기도로 울음으로 비어지기도 한다. “으으으, 아으으”(「우리 돌기」) 포효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피’의 끈질김 앞에 속절없이 앓아본 사람의 소리임에 분명한 것.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잠해본 사람에게서 길어진 것. 스스로를 감추고 짐짓 세련된 태도로 적정 간격을 유지하는 것을 어떤 본령으로 여기는 때, 그 흐름을 가뿐히 거스를 줄 안다. 윤초롬의 그런 점이 나는 좋다.
그의 시에는 분전하는 생활의 어쩔 수 없는 증표라 이를 만한 ‘때’가 잔뜩 묻어 있고, ‘균열’ 또한 무수하다. 그 사이로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리는 풍경. 윤초롬은 그것을 집요하게 본다. 집요하게 되새긴다. 도무지 사그라지지 않는 고통의 정체를 추적하듯이. 거기에는 절망도 있고 원망도 있고 분노도 있다. 죄책감도, 책임감도 있다. 이를 다른 말로 “사랑의 열병”(「눈사람」)이라 해도 좋을까? 따갑게, 혹은 뜨겁게 세계를 견디는 힘이라고? “거절합니다”, 아마도 윤초롬은 그렇게 답하겠지.
“아름다움 거절합니다/ 낭만적 거짓 거절합니다”(「타이레놀」). 그렇다. 솔직이라거나 진실이라거나 하는 것들의 표양은 대체로 아름답지 않은 법이니. 너절하고 참혹한 법이니. 하지만 아름답지 않아서 아름다운 것, 아름답지 않으려는 데서 오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허세와 기교와 낭만을 버리려는 데서 오는 굳센 아름다움.
“슬픔의 단단한 이빨”(「문제아」) 같은 윤초롬의 시를 읽는 동안 나는 자연히 나의 고통, 나의 슬픔, 나의 상처를 여기에 덧대어본다. 그러면서 그가 최선으로 읊조리는 빛을 한뜻으로 열망한다. “좋아지고 있어/ 걱정하지 마”(「바깥 산책」)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윤초롬은 다름 아닌 ‘너’를 위해, ‘우리’를 위해 자꾸만 무엇이든 쥐고 또 쥐고, 꽉 움켜쥔다. 그러다 문득 “밥 좀 잘 챙겨 먹어/ 뼈마디가 다 드러난 너의 가는 팔목을”(「뼈」) 끌어다 잡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