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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목소리가 책 밖으로 나오면] 근대 여성 작가 김명순의 에세이집. 박소란 시인이 근대 한글로 쓰인 글들을 옮기고 정리했다. 여성 작가 최초로 창작집을 발간했던 김명순의 작품들은 묻히기엔 너무나 세련됐다. 사랑을 외치지만, 굳건한 내면도 묻어있어 외려 서럽다. - 에세이 PD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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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왜 살아가려느냐
초몽(初夢) 봄 네거리에 서서 사랑[愛]? 네 자신의 위에 동인기(同人記) 2부 힘 있는 대로 싸워왔노라 부친보다 모친을 존숭(尊崇)하고 여자에게 정치 사회 문제를 맡기겠다 이상적 연애 염문(艶文)을 탐독하는 신여성의 위기 여인 단발에 대하여 대중없는 이야기 3부 언니여 슬프지 않습니까 겨울날의 잡감 ×× 언니에게 계통 없는 소식의 일절 거울 앞 독백[鏡面獨語] 잘 가거라 4부 이 정경을 오래오래 잃지 않으리라 향수 시필(試筆) 귀향 생활의 기억 발문 사랑하는 호을로 ─ 박소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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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적멸하고 인류는 사멸합니다. 그러나 이 멸망해가는 우주와 인류 간에도 영구불멸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신념이요 지성(至誠)이요 진리요 사랑이외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멸망해서 자취를 찾을 수 없으나 그대로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주 건설의 전초가 사랑이요 지지가 사랑이요 인생의 토대가 사랑이외다.
--- pp.23~24 사람 사람마다 잠시 사랑이라는 것을 맛보고는 그것이 전체의 사랑인 줄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혹은 실패니 실연이니 합니다. 참으로 우스운 것입니다. 사랑은 무한대이외다. 사랑은 무한대이외다. 아름다운 K양이여, 아무쪼록 이 혼돈한 사회에서 아름다운 구원의 여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남녀의 갈피는 있으나 이 긴 편지를 사랑으로 받으세요. --- p.27 ‘단발’은 여자에 있어서도 남자에 있는 것과 같이 서슴지 않고 실행하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또 단발을 한다고 여자의 미를 손실하는 것도 모름지기 없을 터인즉 사람의 형체에 따라서는 한 개인을 미화하는 화장(化粧)도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단발을 하였다고 그 경우와 필요를 사회에서 특별히 논의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겠습니다. --- p.53 당신들은 나를 비웃기 전에 내 운명을 비웃어야 옳을 것이다. 나는 이 지경에 겨우 이르렀어도 힘 있는 대로 싸워왔노라. 아아 벗들이여, 더러운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그 동안에도 합해질 여러 냇길과 강과 바다와 가늘게 굵게, 짧게 길게, 머물렀다 급했다, 천천했다, 모든 일이 당연한 듯이 서로서로 합해도 지고 갈리워도 졌으리라. 그동안에는 너희들 중 한 여인의 말과 같이 깨끗하던 것이 더러워지고 더럽던 것이 깨끗해도 져서 내[川]가 되고 바다가 되고 또 짜지기도 했을 것이다. --- p.65 하나 언니여 슬프지 않습니까. 사랑은 지극히 드물게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 완성과 같이 드물게 있습니다. 아득거리고 변하고 속이는 것이 사랑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참사랑을 얻으면 노래하지요. 그때까지 밀어입니다. --- p.88 역시 나는 내 이상을 실현하자고 끊임없이 붓을 잡을 것이다. 아아 참 인생의 아득함이야 악마로다” 하며 그는 창백한 손가락으로 물끄러미 유리창에 쓰기를 “너희들 아무리 곤란하더라도 희망하여라! 보앙카레” 하고 굵고 튼튼히 하였다. 겨울날 맑은 빛이 빛나듯이 그의 눈에는 청신(淸新)한 빛이 빛났다. --- p.120 이제 막 우리의 숙제는 시작되었고 앞으로 긴 시간 계속될 것입니다. --- p.172 반복해 읽을수록 깊이를 더해가는 단어와 문장. 그것을 되뇌며 보낸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었습니다. 이 낯선 단어가 품은 뜻은 무엇일까, 이 문장 속에 깃든 것은 어떤 마음일까. 김명순, 그를 헤아리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다 좋았습니다. “차디찬 겨울의 따뜻한 꿈이로구나”(「시필」) 합니다. --- p.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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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을 뛰어넘어 여전히 살아 읽히는 김명순의 진면목
『사랑은 무한대이외다』는 김명순이 등단한 이듬해인 1918년에 쓴 「초몽」을 시작으로 1936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생활의 기억」까지 총 19편의 에세이가 4부로 나뉘어 수록되었다. 산문의 형태로 쓰였지만 깊은 사유가 응축되어 시에 가깝게 읽히기도 한다.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이 짙게 배어든 글들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고, 세련되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플롯은 백 년 전의 한 지성과 마주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표제의 대목이 실린 작품 「사랑?」은 ‘사랑’이라는 막강한 힘을 지닌 채 자신만의 세계를 지탱해내는 한 사람의 숭고한 내면을 발견하게 하는 수작이다. 2부 ‘힘 있는 대로 싸워왔노라’에 실린 「이상적 연애」「여인 단발에 대하여」는 현대에도 여전히 경각심을 높여야 하는 외모 평가, 데이트 폭력 등의 사회 문제를 곱씹게 한다. 놀랍게도 「염문을 탐독하는 신여성의 위기」는 책을 엮는 과정에서 박소란 시인이 새롭게 발굴한 글로, 이 책의 사료적 의의를 더해준다. 그만큼 김명순에 대한 자료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로 흩어져 있다는 방증이기도 할 테지만, 우리가 그의 작품을 새롭게 알아가는 기쁨의 여지가 많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에세이집의 후반부에서는 김명순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엿볼 수 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일본 유학을 두 번이나 다녀온 김명순은 외국의 문학작품과 음악, 문화 전반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지만 오랜 타지 생활로 향수를 앓고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지적인 면모와 삶에 대한 통찰, 번역가로서의 재능이 글 안에 고스란히 드러나 그의 매력을 더한다. 우리 곤란하더라도 희망하기로 해요 나만은 기필코 나의 편이 되어주기로 합시다 “지금 다시 김명순의 글을 읽는다는 건 행복한, 그러나 분명 무거운 일”이다.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여러 단어들, 얽히고설킨 문장들 앞에서 자주 머뭇거리게” 될 테고, “갖가지 이유로 자주 웃고, 자주 탄식하게 될 것”(박소란 발문)이다. 김명순이 신문과 잡지의 지면에 이러한 글을 발표했을 1920~30년대의 시대상이나 ‘나의 편’이 없다는 막막함으로 어두운 도시의 거리에 외롭게 서 있었을 한 작가의 쓸쓸한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리고 인생의 아득함을 떠올리다가도 종내 “아무리 곤란하더라도 희망하여라!”(120면) 하고 말하는 김명순의 문장을 읽으며 다짐한다. “김명순, 그가 그러했듯이” “사는 일도, 쓰는 일도, 또 그 어떤 일도 내 편이 아닐 때 나만은 기필코 나의 편이 되어주기로 합시다.”(박소란 발문) 엮은이의 말 김명순,이라는 이름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더 한참 전의 일입니다. 여러 해 전 우연한 계기로 근대 여성 시인들의 대표작들을 한데 모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많은 시편들 가운데 유독 그의 시를 반복해서 읽게 되었어요. 너무 깊었다고 할까, 짙었다고 할까. “나는 세상에 다신 안 오리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작별합시다”(「유언」) 같은 선득한 목소리 앞에서는 누구라도 일렁이는 마음을 누를 도리가 없는 것이겠지요. 언젠가 제대로 읽어야지, 공부해봐야지, 막연한 결심을 구실로 가까스로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납니다. (…) 그러면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습니다. 함께도 읽고, 혼자서도 읽는 동안 제 뇌리는 온통 김명순이었어요. 그즈음 문학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저는 습관처럼 김명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를 아느냐고. 읽어본 적이 있느냐고.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김명순? 그게 누구지?” 하는 것이지요. 그 난감한 표정을 대하자면 괜히 서운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알긴 알지. 근데 지금 와서 웬 김명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 이 또한 서운해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좋은 글은 언제 어디서나 읽혀야 마땅한 것일 텐데요. 그렇지만 에세이를 정리하기로 하면서 저 또한 속으로 되풀이해 물었던 게 사실입니다. 왜 김명순인가? 그러나 이는 ‘지금 왜 김명순인가?’ 하는 질문보다 ‘나는 왜 김명순인가?’ 하는 질문에 가까운 것이었어요. 전자는 그의 작품을 얼마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누구라도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의문이라 확신했으니까요. ‘지금 왜’는 곧 ‘지금도 반드시’로 바뀔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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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지극히 적다. 근대 지식인들 중 눈에 띄는 여성 문인이라는 것, 여성 작가 최초로 창작집을 발간했고 여성해방을 부르짖었다는 것, 미완의 소설을 남기고 기록되지 않은 어느 날 영원히 눈을 감았다는 것 등등 그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나 역시 그랬다. 전업으로 소설을 쓰면서도 나는 김명순을 몰랐다. 그를 알게 된 건 여성 소설가로서의 나를 자각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의 목소리는 백 년이라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종이를 뚫고 나와 나의 심장을 깊숙이 찌르는 창이 되었다.
“네 길을 간다 할지라도 갈수록 남의 길일 것이며 남아 보이는 것이 학대일 뿐이니 (…) 네 몸 위에 값없이 던져지던 남의 생활의식 남의 감정을 전부 뽑아내어 던져라!” 서슬 퍼런 그의 목소리에 나는 어른의 길이라 퉁치고 살았던 날들이 부끄러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김명순은 말한다. “사랑이 끊긴다 하면 곧 죽음이요 멸망”이며, “사랑은 무한대”라고. 그를 다시 우리 눈앞으로 데려오는 것만큼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한 명의 작가를 되살리는 일은 그가 품은 무한대의 사랑을 되살리는 일이기에. - 이서수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