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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창작 노트 1∼99 에필로그 |
崔眞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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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척 맑았다. 먼바다의 물결이 보였다. 소설을 고치려다가 지겨워져서 새로운 에피소드를 썼다. 내가 하려는 모든 일에 “말도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도 그 일을 같이 해내는 엄마의 에피소드.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하면서 말이 되게 하는 엄마의 이야기.
--- p.20 사랑하는 사람이 외로워하면 미안하다고 말하자. 미안해. 내가 너와 다른 사람이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너와 내가 다르기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어. 사랑이 자취를 감추면 기다리자. 사랑도 지겨워져 바깥으로 나가고 싶을 때가 있겠지. 고치는 대신 새로운 에피소드를 쓰고 싶을 때가. --- p.23 스물다섯 살의 나는 알았을까? 왜 글을 쓰고 있는지? 그때의 나에게 물어보고 싶다. 너는 어떻게 소설을 쓰니. 무엇이 너를 쓰게 하니. 미래의 나도 지금의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겠지. 살아 있다면. 원하는 게 있다면. 답을 구하고 싶다면. 그러니까 지금을 살자. 의미를 찾지 말고 일단 살아야 한다. --- p.75 여름 바다에는 결국 가지 못했다. 바다를 만져보지 못했다. 하루만 시간을 내어 가까운 바다에 가면 되는데 기어코. 단 하루에 인색했다. 왜 그랬을까. 매일매일 써야 할 글이나 읽어야 할 책이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기분이다. 여름을 도둑맞은 기분이다. 되찾고 싶진 않다. --- p.80 이제 소설을 쓸 것이다. 날씨는 모든 것에 영향을 준다. 오늘의 날씨가 소설에 영향을 줘서 태풍처럼 휘몰아치듯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 p.85 사랑은 분노다. 사랑은 공포이며 두려움이고 아무리 잃어도 계속 잃을 수밖에 없는 끝없는 상실이다. 영원히 슬픈 자가 있다. 영원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슬픔을 껴안은 거대한 사랑을 조롱하고 파괴하는 사람들. 잡아먹힐 것이다. --- p.105 광활하고 차갑고 고요한 세계를,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행성과 위성을, 불타오르는 항성을, 우주를 상상하면 나는 점점 가벼워진다. 주머니에 가득 모아둔 고민과 걱정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지금을 잘 살자는 생각이 든다. 현실적인 걱정들이 나를 포위하여 점점 압박한다고 느낄 때는 나부터 나에게서 물러날 필요가 있다. --- p.115 무언가를 집요하게 강박적으로 좋아하던 나는 흐르고 흘러 머나먼 바다로 가버렸다. 이제 나는 좋아하는 마음을 들킬까 두려워하는 사람. 당신은 모르겠지만 좋아하고 있어요. 잔잔하고 고요하게 홀로 좋아합니다. 이 마음에는 아쉬움이 없고, 이 마음은 시간과 함께 사라질 테니.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p.167 쓰고 싶다. 쓰고 있다. 완성했다. 세 문장으로 삶을 차곡차곡 채우고 싶다. --- p.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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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넘어질 나를 위한 99번의 충실한 기록
“연패에도 끝은 있다. 그 사실이 매번 새삼스럽고 놀랍다.” 장편소설 『단 한 사람』을 쓰는 과정이 집중적으로 담긴 이 창작 노트에는 최진영이 소설을 구상하는 동안 보아온 서울과 제주의 풍경, 소설의 첫 장면을 만나는 경이로운 순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면서 스스로를 달래고 나아가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담겼다. 특히나 이 창작 노트에는 주요한 작품을 다섯 권이나 펴내고 굵직한 상을 받기도 한 제주에서의 삼 년이라는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작가로서의 궤적에서 중요한 공간과 장면이 기록으로 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은 더없이 소중해진다. 창작 노트라 이름하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최진영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과 눈부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 한 권의 장편소설을 완성하는 과정을 따라 읽다보면 어느새 ‘최진영이라는 소설’을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 안에 흐르는 소설가의 시간 역시 또 한 편의 소설같이 꽉 찬 서사로 읽히는 까닭이다. 『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이 99개의 창작 노트로 구성되어 있다. 장편소설의 집필을 앞두고 시작된 노트에는 글을 쓰거나 쓰지 못하는 하루하루가 때로는 덤덤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담겨 있다. 프로야구단 한화이글스의 열렬한 팬으로서 연패를 이어가는 야구팀을 응원하면서도 작가는 ‘야구하기’와 ‘글쓰기’를 나란히 놓고 ‘연패를 끊자’ ‘반드시 새 소설을 시작하자’ 자주 다짐한다. 그리고 야구팀이 지고 있더라고 절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은 소설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잘 쓸 수 있”(17면)기를 바라는 작가로서의 간절함이기도 하다. “연패에도 끝은 있”(207면)듯 진전이 없던 소설은 어느덧 흐름을 타고, ‘창작 노트 1’이 시작하기 전 ‘0’으로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장편소설은 ‘창작 노트 99’를 쓰고 난 뒤 100으로 채워진다. 창작이란 어쩌면 이러한 0부터 100까지의 시간을 무한히 반복하는 과정인지 모른다. 그 무한 안에서 최진영은 글을 쓴다. 글을 쓰다가 가끔 넘어지는 순간도 있겠지만 거뜬히 일어서 다시 쓸 것이다. 주머니 속에 이토록 푸르른 창작 노트가 있기에. 여기 노트와 펜이 있다. 오늘을 쓸 수 있다. 하루를 살 수 있다. 언젠가 내가 쓴 글이 나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겠지만, 이제 다시 걸어보자고 말을 걸진 않겠지만, 늘 거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일어나도록 만들 것이다. 거듭 넘어질 나를 위해 매일 글을 쓴다.(프롤로그, 8∼9면) 에필로그 중에서 이 노트에 담긴 문장은 나의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종이에 쏟아놓은, 당시에는 특별했으나 지나고 보니 지극히 평범한 불안과 외로움과 사랑의 기록. 그런 날들을 통과하여 결국 오늘에 닿았다는 결말. 그러니 다시금 휘청이더라도 마침내 괜찮아질 거라는 예언. (…) 그 마음과 순간을 이 노트에 담아둔다. 언젠가 또다시 거듭 넘어져 절망과 불행에 의지하려고 할 나를 위해. 2025년 봄과 여름 사이 최진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