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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 재배의 경제 / 작가 노트
최진영 ― 듣고 있어 / 작가 노트 정한아 ― 여자들의 산 / 작가 노트 정보라 ― 부서지는 여자 / 작가 노트 예소연 ― 목숨과 숨통 / 작가 노트 |
Hye-Young P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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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교훈을 얻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시간만 투자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도 배웠다. 팔과 다리 같은 신체 일부를 대가로 내놓아야 했다.
---「편혜영, 재배의 경제」중에서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누나는 오히려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듯 나를 훑어봤다. 스스로의 진실에 속은 나머지 정말로 내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고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편혜영, 재배의 경제」중에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죄인을 자처했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너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최진영, 듣고 있어」중에서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니. 뒤늦은 대답을 중얼거린다. 그 질문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야. ---「최진영, 듣고 있어」중에서 여자는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매 순간 그 믿음이 자신을 떠나지 않게 단속하고 있었다. 믿음을 잃는 순간 모든 게 끝장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한아, 여자들의 산」중에서 그녀는 덜컥 겁에 질렸다.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들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정보라, 부서지는 여자」중에서 같이 살아놓고도 나는 이제 걔가 어떤 앤지 전혀 모르겠다는 거. 그게 나를 미치게 했다. 그래서 알아내고 싶었다. ---「예소연, 목숨과 숨통」중에서 거대 토끼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들의 풍요로운 웃음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서로에게 사과했지만 그 사과가 정확하게 무엇을 향한 건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냥 했다. 응당 가족이라면 미안해하고 괜찮아해야 했으니까. ---「예소연, 목숨과 숨통」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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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불안과 분노,
그리고 펄펄 살아 숨 쉬는 욕망을 읽는다 인간의 내밀한 마음과 일상의 폭력을 강렬한 이미지로 구현해온 편혜영이 「재배의 경제」로 소설집의 문을 연다. 옹벽에서 굴러떨어져 크게 다친 ‘나’에게 누나 ‘석미’는 움직이지 않는 노동을 제안한다. 하반신 마비를 가장해 장애 판정을 받고 보험금을 타내려면 휠체어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도, 느끼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만큼 “비경제적인 건 없다”고 주장하는 석미는 보험 조사관의 눈을 속이기 위해 그녀만의 돌봄 노동을 수행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괴해지는 남매의 노동이 신체마저 재화가 되어버린 자본주의 시장에서 장애와 빈곤, 젠더와 돌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섬세한 감수성과 치열한 세계관으로 인물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하는 최진영은 「듣고 있어」에서 살아남는 일 자체가 고통이 되어버린 ‘금옥’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과연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금옥은 본부장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하며 엄마 ‘애정’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딸의 연락을 받은 애정은 ‘화목한 가정’이라는 환상을 좇아온 지난 세월을 돌이켜본다. 남편과 가족과 사회에 끝없이 배신당하고도 다시 속아 넘어가는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면서도 하루만 참으라는 말로 딸을 애써 달래려 하지만, 금옥은 그 말에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정한아의 「여자들의 산」은 오래된 낡은 기도원을 배경으로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의 뒤틀린 믿음을 조명한다. ‘나’는 예상치 못한 사고로 운영하던 학원을 폐업하고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지내던 금식기도원을 찾는다. 기도원과 학원이라는 전혀 다른 두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어쩐지 닮아 보이는 건 왜일까? 기적 같은 치유, 희생을 전제한 돌봄을 갈구하며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문득 자신을 둘러싼 상황의 기이함을 깨닫는다. 매력적인 서사로 상실이 지나간 자리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정한아 특유의 서술이 ‘어머니의 마음’을 가장해온 ‘나’의 부조리를 소름 끼치도록 선명히 보여준다. 삶의 모순을 장르적 상상력으로 묘파하며 전세계 독자를 사로잡은 정보라는 「부서지는 여자」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조각조각 깨지는 장면 묘사와 인물의 인식으로 구현한다. 장례식장 접객실 도우미와 청소 업체 일을 하며 하루하루 먹고사는 ‘나’에게 단골손님이 생긴다. 월세, 공과금, 휴대폰 요금과 전남편이 데려간 아이 양육비까지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라 매주 1회 꼬박꼬박 청소를 요청하는 ‘사모님’을 만나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어느 날 그 집 바닥에 떨어진 정체불명의 하얗고 둥근 것을 발견하고, 그 이후로 모든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마지막으로 예소연의 「목숨과 숨통」은 소년원에 들어간 아들 ‘윤범’의 행적을 이해해보기 위해 애쓰는 엄마의 분투를 그린다. ‘나’는 제 뱃속에서 나온 반듯한 아이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고, 고민 끝에 아들의 휴대폰을 켠다. 아들의 메신저를 통해 알게 된 ‘한나’를 만나면 이 상황을 더욱 자세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한나와 함께하는 하룻밤 동안 불길한 일이 연이어 벌어진다. 가족이라는 불완전한 결속이 헐거워지는 순간 긴장을 자극하는 묘한 상상력이 성큼 자라나며 일상의 감각을 뒤흔든다. 시대의 감수성을 증언하며 감정의 민낯을 유려하게 그려내는 예소연의 문장이 빛을 발한다. ‘모두 다 미쳤고 아무도 미치지 않았다’ 관념을 뒤엎는 쾌감으로 찬란히 빛나는 이야기 20세기 영국문학의 지표를 뒤흔든 작가이자 신경질환으로 평생을 고통받은 버지니아 울프는 “그 시절, 위대한 재능을 타고난 여자라면 누구라도 틀림없이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100여년 전의 선언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여성의 언어, 역사, 정치, 문학이 여전히 사회적 억압에 분투하며 답을 찾아나가는 중이기 때문이리라. 우리 시대 여성들은 어쩌면 끊임없는 차별과 배제와 혐오 속에서 분노와 광기를 에너지 삼아 생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미치지 않았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선언을 이어받아 문학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미래를 그려보는 책이다. 오늘날 여성이 느끼는 정동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동시에 성별 위에 덧씌워진 프레임을 걷어차는 다섯편의 이야기가 낡은 관념을 화끈하게 전복한다. 섬뜩할 만큼 아름다운 광기를 지닌 소설 속 인물들이 마침내 가장 생생하고 찬란히 살아 있는 여성들을 증언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