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이자 번역가. 파리 8대학에서 연극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옮긴 책으로 티아구 호드리게스의 《소프루》, 에르베 기베르의 《연민의 기록》, 베티 본의 《프루스트의 마들렌》, 아니 에르노의 《빈 옷장》 《남자의 자리》 《세월》 《사진의 용도》 《진정한 장소》 등이, 엮고 옮긴 책으로 《생텍쥐페리의 문장들》 등이 있다. 희곡집 《누아》,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 카페》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을 지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죽음은 소멸이 아닌 존재 방식의 변화일 뿐이다. 저자의 눈이 되어 주었던 안내견, 강산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 이제 그의 언어가 된 듯하다. 책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방어하지 않고, 경계 짓지 않는 햇빛 같은’ 언어. 이 책은 강산이를 꼭 닮은 말로 지은 사랑의 세계다. 김성은의 안내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결코 볼 수 없었을 너무도 환한 세계.”
「방생」, 「나의 우울은 어디에서 왔을까」(응모우수상)
독창적인 방식으로 현실과 허구,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의 내면을 예리하게 탐구하는 작품들이었다.
「실명」(응모우수상)
실명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을 다룬다. 7월 20일부터 7월 26일까지 예고된 불행을 마주하는 인간의 감정을 그려내며 언어의 층위를 다양하게 쌓아 올린 점이 주목할 만하다.
나는 신문을 사면서 브뤼노의 죽음을 알게 됐다. 그가 아팠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노부인들의 살해범 티에리 폴랑과 같은 날에 사망했는데, 그 살해범은 스무 살에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늙은 여자들을 가능한 한 많이 죽이고, 강간하고, 고문하겠다고 선언했었다. 그의 연쇄 살인은 죽음과 겨루는 그만의 레이스였다.
내 혓바닥 위, 손가락 아래, 엉덩이 속, 입속에 채우고 싶지 않은 공허가 있다, 나는 기꺼이 식인종이 될 것이다. 공사장에서 헐벗고 일하는 노동자의 살이 오른 아름다운 육체를 보면, 핥고 싶을 뿐만 아니라 깨물고, 허겁지겁 먹고, 아작아작, 지근지근 씹고, 삼키고 싶다. 나는 그 노동자 중 한 명을 냉동실에 욱여넣기 위해 정교한 칼질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떨리는, 뜨거운, 부드러운 그리고 악취가 나는 생살을 먹고 싶다.
지겨운 아이들
못하겠다. 내가 상상한 그 현실인 그 장면을 떠올리지 못하겠다. 밤이 되자 배고픔에 지친 아이가 어머니에게 말한다. “엄마, 나 배고파.” 어머니는 다정하게 대답한다. “자렴.” 아이가 말한다. “그렇지만 배가 고프다고.” 어머니는 고집한다. “자라고.” 아이는 말한다. “잘 수 없어. 배가 고파.” 어머니는 짜증 내며 다시 말한다. “자.” 아이는 말을 듣지 않는다. 어머니는 고통스럽게 소리친다. “자란 말이야, 이 못된 녀석아!”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다. 움직이지도 않는다. 아이는 잠들었을까? 깨어 있는 어머니는 생각한다. 아이는 너무 무서워서 불평하지 못한다. 어두운 밤, 두 사람 모두 눈을 감지 못한다. 결국 그 둘은 괴로움과 피로함 끝에 체념의 둥지 안에서 잠을 설친다. 나는 체념을 견딜 수 없다. 아, 나는 또 얼마나 게걸스럽게 분노를 삼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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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차야[Chaya]라는 이름으로(히브리아어로 ‘생명’이라는 뜻이다. 내전 중에 성폭력의 피해를 입은 리스펙토르의 어머니는 병을 앓았고, 그 당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새 생명을 낳아야 한다는 미신을 믿고 아이를 출산했다. 다시 말해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태어난 아이가 리스펙토르였던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숙명을 안고 태어난 아이는 어머니의 이른 죽음에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태어난 리스펙토르는 러시아 내전을 피해 태어난 지 2개월 만에 브라질로 이민을 떠난다ㄱㄱ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어떤 작가들은 글을 쓰기 전에 이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명확히 안다고 하던데, 나는 아니다. 첫 문장, 두 번째 문장을 쓰고 지우고, 몇 페이지를 쓴 후에도 모조리 지우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그렇게 더듬더듬 나아가야 겨우 무른 벽 하나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