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에는 물음이 하나 있다. “어디까지 갈 건디?”(「동진강 달빛」) 물음은, 숨 막히게 아름다웠던 첫사랑의 기억으로부터 이 시집의 페이지들을 차례차례 넘기며 섬세한 언어로 빚은 사람과 풍경 들을 거쳐 내게로 온다. 몸도 마음도 “유배지” 같고 그저 “허수아비”처럼만 살고 있다고 느껴질 때, “살아갈수록 가슴에/이별이 더 많이 적히”(「내 시간을 외등처럼 켜 놓고」)고 “칼 한 자루 못 얻고”(「밤길」) 온통 덜컹거리기만 했던 “소금기 밴 어저께들”(「탈옥수」)에 회한의 한숨만 보내고 있을 때, 그래서 이제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 이제 그만 무너지고 싶을 때, 물음은 “구슬구슬 맑아지는 글씨”(「글씨」)로 가슴께를 가만히 두드린다. “어디까지 갈 건디?” 한데, 이 느닷없는 물음에 답을 찾으려 어지러운 가슴속 서랍들을 여기저기 뒤지다 보면 어느새 알게 된다. 내게도 “죄다 들켜 버리고 싶”(「동진강 달빛」)은 시절이 있었음을, “심장이 찔리고 싶은 별”(「내 시간을 외등처럼 켜 놓고」) 하나 아직 반짝거리고 있음을. 그리고 깨닫게 된다. 가슴에 “목판화” 같은 시간 하나 지워지지 않은 채 여태도 살고 있다는 걸. 그 마음이면 됐다 싶다. 아랫목 하나 못 찾았어도 “성냥불 켜 주”(「가만히」)는 마음이면, “긴 겨울잠을 털어 버린 듯/는실날실 봄바람 타는 버들가지들”(「버들가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이란 글씨를 입고” “종이배처럼 반짝반짝 접히”(「적벽강 가는 길」)는 파도 소리 한번 더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시냇물벼루에 여치 소리”(「글씨」)를 갈아 써 내려간 듯한 이병초의 시를 읽은 밤 이리 “속도 없이” 한껏 “야들야들”해진 마음이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