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부 어제를 앓는 꽃송이
글씨 한 송이 봄날·2 풀벌레 소리 탈옥수 은수저 별 내 시간을 외등처럼 켜 놓고 망명객들 옥이 코스모스 밤길 산제 목판화 2부 어둠살 펴 주듯 눈이 내린다 동트는 기억 속을 가만히 꽃잎 허수아비 늑실거리며 길갓집 안티푸라민 몸 갚음 하듯 불 훔쳐보기 눈 내리는 밤에 하관 후 버들가지 동진강 달빛 3부 농성일기 농성일기 덜 쓴 축문 모닝커피·1 빗방울 소리에 노을이 질 때 소리 물살 모닝커피·2 글씨는 죄가 없다 내 그림자 비의 기억 석양 종소리 나비야 나비 버스 또옥똑 귀가 트이는 그림자극 4부 물떼새 소리 들리던 날 입술 뒤터진 기억들이 외발자전거 숨소리 막회 가을나기 붓질이 덜 마른 나이테 옥이·2 소풍 생은 누구 것인지 홍어 적벽강 가는 길 돌붕어 해설 사지에서 온 편지 - 정재훈(문학평론가) |
이병초의 다른 상품
|
풀잎에 간조롱히 맺힌 이슬이 네 글씨 같다
오디별이 뜬 시냇물벼루에 여치 소리나 갈다가 가끔 눈썹에 이는 바람결 시린 바람결 간추려 풀잎의 눈을 틔웠으리 사는 게 뭔지 밤 깊도록 구슬구슬 맑아지는 글씨들 --- 「글씨」 전문 시냇물 속에 누가 별빛 한 점 내걸었다 바람이 닦아 놨을 잔물결 소리 만지작거리며 별은 반짝반짝 빛난다 시냇물은 오래된 기억일수록 더 맑게 닦아 놓는다 지푸라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또옥똑 떨어지는 짚시랑물을 손바닥에 받아내던 가시내 눈알 속에도 저렇게 별이 반짝였다 --- 「별」 중에서 나 죽으면 ‘祝 사망’이라고 봉투 써 오겠다던 친구 녀석이 비운 작업실에서 불을 끈 일밖에 없는데 소주 적셔진 식빵엔 약간의 소금기가 묻어 있다 살아갈수록 가슴에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는 뜻으로 읽히므로, 내 시간을 외등처럼 켜 놓고 벽에 손톱금 내고 있을 가시내의 밤도 더는 서럽지 않다 내 죽음을 물음 뜨러 갔는지 친구는 영 소식이 없고 --- 「내 시간을 외등처럼 켜 놓고」 중에서 어스름 깔리는 시냇가에 앉아 내 귓속 파먹는 새소리에 성냥불 켜 주며 잠시 환해졌다가 캄캄해지는 순간을 즐겼다 물병아리 두엇이 시냇물 속에 고개 처박을 때마다 눈 뜨는 잔물결들을 밤의 여객선이 찍어내는 판화라고 믿었던 날은 얼마나 멀리 가 버렸나 생각하며 성냥개비를 또옥똑 분지르곤 했다 (중략) 물결이 반짝일수록 더 맑아지는 새소리 머릿속을 일직선으로 빠져나가는 새소리에 성냥불 켜 주며 몸을 가만히 기댔다 --- 「가만히」 중에서 오늘 밤에도 눈이 내린다 잠들지 말자고 잠들면 죽는다고 꽁꽁 언 손발 맞비비며 열아홉 숨결이 빨아들이던 그 불씨에 목숨 기댔던 밤처럼 송이송이 어둠살 펴 주듯 눈이 내린다 소주가 차갑게 빛난다 무덤 속 같은 헛간을 빠져나와 어금니 거덜나도록 떠돌았어도 여태 아랫목을 못 찾았다 그만 자자고 불을 끈다 보고 싶은 얼굴이 소복소복 쌓인다 --- 「눈 내리는 밤에」 중에서 학교 가려고 전봇대 뒤에서 버스 기다리는데 그는 보도블록에 맨몸을 깔았다 내가 담배를 빼무니 저도 담배를 빼문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니 저도 땀을 닦는다 바닥이 지글거려도 물 한 모금 달라는 소리가 없다 녹다 만 쓸개간장을 더 납작하게 지지는가 보다 --- 「내 그림자」 전문 고구마 캐낸 밭에 시금치 씨를 삐고 갈퀴로 긁어 놓으니 마음이 한갓지다 벌건 대낮인데도 떡갈잎 뒤를 자꾸 들이받는 굴뚝새 소리 가위로 오려내 창에 걸어 두면 방이 환해지리라 --- 「가을나기」 중에서 옥이는 대문을 나섰을까 이마빡 쓸어 올리며 무릎을 폈다 접었다 하며 교련복 윗주머니에 성냥알들 쏠리는 소리가 지푸라기에 긁히고 눈발 사이로 팥죽 냄새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옥이 모르게 죽음이 다녀가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귀를 바깥에 뽑아 놓고 짚벼눌 속에 새는 빛에 눌려 숨이 막혔다 --- 「옥이·2」 중에서 밥은 잘 먹냐는 말에 녀석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가리키며 수돗물 냄새가 나서 보리차도 못 넘긴다고 했다 녀석은 입을 조금 벌린 채 잠들어 있다 소주로 간암을 캐내고 싶었던 시간조차 동이 났는지 얼굴이 검다 프레스에 뭉툭 잘려 손가락이 세 개만 붙은 오른손이 눈에 아프다 누가 다녀간 흔적이 없는 병실 생(生)은 누구 것이냐고 링거액이 저 혼자 또옥똑 새고 있다 --- 「생(生)은 누구 것인지」 중에서 |
|
오늘이 와 준 게 고맙다. 삶의 평수가 갈수록 줄어들어도 그 덕에 산천을 떠돌며 별별 새소리에 몸을 맡길 수 있어서 좋았다. 학교가 그리운지 이따금 볼에 와닿는 바람은 살가웠다. 습자지에 나침반 달린 손목시계를 그려서 내 심장에 꽂아 주었던 옥이가 펑펑 다가올 것 같아서 행복했다.
언제든 모두 꼭 만나자. 첫사랑 꽃자리를 간직하듯 학교 본관동 앞에 농성 천막을 치고 펑펑펑 함박눈을 기다렸던 날들까지. 2024년 3월 이병초 |
|
이 시집에는 물음이 하나 있다. “어디까지 갈 건디?”(「동진강 달빛」) 물음은, 숨 막히게 아름다웠던 첫사랑의 기억으로부터 이 시집의 페이지들을 차례차례 넘기며 섬세한 언어로 빚은 사람과 풍경 들을 거쳐 내게로 온다. 몸도 마음도 “유배지” 같고 그저 “허수아비”처럼만 살고 있다고 느껴질 때, “살아갈수록 가슴에/이별이 더 많이 적히”(「내 시간을 외등처럼 켜 놓고」)고 “칼 한 자루 못 얻고”(「밤길」) 온통 덜컹거리기만 했던 “소금기 밴 어저께들”(「탈옥수」)에 회한의 한숨만 보내고 있을 때, 그래서 이제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 이제 그만 무너지고 싶을 때, 물음은 “구슬구슬 맑아지는 글씨”(「글씨」)로 가슴께를 가만히 두드린다. “어디까지 갈 건디?” 한데, 이 느닷없는 물음에 답을 찾으려 어지러운 가슴속 서랍들을 여기저기 뒤지다 보면 어느새 알게 된다. 내게도 “죄다 들켜 버리고 싶”(「동진강 달빛」)은 시절이 있었음을, “심장이 찔리고 싶은 별”(「내 시간을 외등처럼 켜 놓고」) 하나 아직 반짝거리고 있음을. 그리고 깨닫게 된다. 가슴에 “목판화” 같은 시간 하나 지워지지 않은 채 여태도 살고 있다는 걸. 그 마음이면 됐다 싶다. 아랫목 하나 못 찾았어도 “성냥불 켜 주”(「가만히」)는 마음이면, “긴 겨울잠을 털어 버린 듯/는실날실 봄바람 타는 버들가지들”(「버들가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이란 글씨를 입고” “종이배처럼 반짝반짝 접히”(「적벽강 가는 길」)는 파도 소리 한번 더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시냇물벼루에 여치 소리”(「글씨」)를 갈아 써 내려간 듯한 이병초의 시를 읽은 밤 이리 “속도 없이” 한껏 “야들야들”해진 마음이면 더더욱. - 김근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