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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9
서문 13 1 사회적 유럽의 쇠퇴와 민주주의의 파편화 19 “두 개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민주주의의 파편화 29 - 사회민주주의의 문제 39 2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적 수용에 대한 투쟁 49 “더 많은 시장을 원한다면, 더 많은 사회정책을 가져야 한다.” 3 사회적 유럽의 확대와 표준의 역할 67 “최종 제품의 품질이 아닌 공정 그 자체에 대한 표준이 필요하다.” - 환경 훼손과 기후 변화에 대한 투쟁 71 - 세계화의 개혁 77 - 금융화된 자본주의 규제 85 - 물질적 불평등 감소 89 - 노동자의 안전과 노동의 미래 조화 96 - 사회투자복지국가의 강화 107 4 결론: 유럽사회연합을 향하여 119 옮긴이의 말: 혐오와 폭력이 아닌 희망의 세상을 위하여 127 |
Colin Cro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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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외국인 혐오 민족주의다. 이 둘은 코로나바이러스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유럽을 배회하고 있었으며, 유럽의 사회와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끼쳤다.
---본문 중에서 우리는 세계화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야 한다. 그리고 경제적 권력 economic power이 더 광범위한 인간의 행복 human good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규제와 공공정책을 통해 세계화를 인간의 통제 아래 두기를 요구해야 한다. ---「한국어판 서문」중에서 이것들은 코로나바이러스가 공격하기 전에 이미 견고하게 확립된 익숙한 대립들이다. 전자의 시나리오에는 배후에 사회민주주의자들, 그 외 평등주의자들과 집단적 노력 collective endeavours의 신봉자들, 환경주의자들이 있다. 후자의 배후에는 외국인을 혐오하는 민족주의자들과 규제 없는 시장 및 사회정책 최소주의의 신봉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 팬데믹은 어떤 새로운 것을 제시하기보다는 이러한 대립들이 제시한 선택들을 더욱 심화시키고 뚜렷하게 만들었다. ---「서문」중에서 이 두 가지 해로운 방식을 모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을까? 이 방식들에 이의를 제기할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이기심과 혐오는 인간 행동의 매우 강력한 동기이며 이 두 동기에 노골적으로 호소하는 방법은 다수의 사람을 흔드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사심 없이 행동하고, 타인을 혐오하기보다는 생산적인 평화 속에서 함께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 과제는 이들 다수를 위한 건설적인 정치적 표현 articulation을 찾아 주는 것이다. ---「사회적 유럽의 쇠퇴와 민주주의의 파편화」중에서 여러 해 동안 중도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법치와 헌법적 올바름 constitutional rectitude의 주요 수호자라 자처해왔다. 그러나 여러 국가 - 헝가리, 폴란드, 영국, 최근까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그리고 유럽 외부에서는 미국 - 에서 이들과 극우파의 행동이 별다르지 않다는 게 밝혀지면서 수호자라는 명성도 무색해졌다. 이 모든 국가들 그리고 다른 몇몇 국가들에서 준법적인 정부의 주요 수호자 역할은 때로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중도보수주의자가 아닌 자유주의 좌파의 몫으로 떠넘겨졌다. ---「사회적 유럽의 쇠퇴와 민주주의의 파편화」중에서 실제로 내가 그 원인을 신자유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으로 설명하는 이기심과 혐오에는 강력한 도덕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재분배적 과세와 공공 서비스 제공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은 가난이 대개 무기력과 게으름에 기인하며, 자칭 ‘노력해서’ 성공한 부자들과 중산층들의 재산은 보호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 심지어 혐오조차도 종종 도덕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위대한 종교의 역사는 신성한 가치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극도의 폭력 행위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진정한 동기(만약 우리가 이것이 무엇인지 결정할수 있다면)가 무엇이든, 사람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제시할 필요성을 느낀다. ---「사회적 유럽의 쇠퇴와 민주주의의 파편화」중에서 국내 정치에서도 흔히 그렇듯이, 우파든 좌파든 유럽 정책 결정자들은 시장과 공공정책 조치를 제로섬 게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즉, 더 많은 시장을 원한다면, 더 적은 사회정책을 가져야 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의 역사는 우리에게 그 반대가 진실이며 둘 다 함께 진행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적 수용에 대한 투쟁」중에서 심지어 가장 열성적인 친유럽연합 정치인들조차도 유럽연합의 정책 중 자국에 긍정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온갖 공을 독차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부정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유럽연합을 비난한다. 이는 매우 근시안적인 행동이며 동시에 거의 모든 유럽 국가의 외국인 혐오 정당들이 유럽연합을 관료적인 규칙을 강요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단정하게 만드는 행위였다.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적 수용에 대한 투쟁」중에서 현재 유럽연합 표준들은 생산 공정에서 최종 제품 품질에 관한 것이 주류다. 유럽연합 표준들은 공정들 processes 그 자체의 품질에 대해서는 거의 중시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1980년대에 노동 환경의 품질을 표준에 포함시키려는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의해 단일 유럽 시장에 대한 초기 토론에서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는 주로 낮은 가격에 대한 일반 소비자들의 이익보다 제한된 수의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구실로 기업 로비와 보수주의 정당 및 자유주의 정당에 의해 무산되었다. 근시안적이었던 이런 결정은 되돌릴 필요가 있다. ---「사회적 유럽의 확대와 표준의 역할」중에서 세계화는, 만약 규제만 이루어진다면, 전 세계 번영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개발도상국들은 선진국에 더 많은 상품을 판매하는 데 성공함에 따라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결과적으로는 다시 우리로부터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한다. 우리의 성장은 시장 범위의 확대에 달려 있지, 우리가 우리의 작은 공간에서 계속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도록 세계 다른 국가들과의 무역을 제한하는 보호주의적인 조치에 달려 있지 않다. (...)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우리가 경험한 사실상 탈규제적 세계화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에서 사회를 손상시켰다. (...) 선진국에서 세계화는 일자리 상실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었다. 이는 주로 자동화와 로봇화의 결과였으며, 산업 활동의 노동 생산성이 서비스 활동의 노동 생산성보다 더 빠르게 진보함에 따라 산업 활동에서 서비스 활동으로 고용이 전환된 결과였다. (...)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에게 부여한 가장 불친절한 감소 중 하나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필요성에 의해 가장 위협받는 것이 바로 그러한 개인적인 연결 활동이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유럽의 확대와 표준의 역할」중에서 거의 모든 유럽과 기타 선진 사회들은 이러한 현상에서 비롯된 심각한 분노 표출과 우발적인 폭력 행위를 경험하고 있다. 추악한 제로섬 갈등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여성들과 다양한 소수집단들에 관한 관심이 감소하거나 심지어 반전시키는 정책 반발 policy backlash을 볼 수 있으며, 이는 그들 지위의 새로운 악화를 초래할 것이다. 외국인 혐오적이고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정부들이 이러한 반발을 주도할 경우, 이들은 실제로 남성 이전 산업노동자 계급 male ex-industrial working class의 경제적 쇠퇴를 반전시키는 데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 정부는 보통 불평등을 줄이는 데 관심이 없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의제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들이 ‘뒤처진’ 사람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은 배제 문제가 최근에 공인된 집단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표출하기 위한 면허뿐이다. 그러한 면허를 부여하는 것에는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과세는 필요하지 않다. ---「사회적 유럽의 확대와 표준의 역할」중에서 노동시장이 어려운 시기에 시민들의 존엄성을 위한 최종 지원은 법정 최저임금이다. 엄격하게 시행된다면, 이것은 임금을 낮추기 위해 이민자를 활용하는 것 - 이는 이민자들에게 적대감을 유발하려는 단체들의 빈번한 주장이다 - 을 방지하는 이차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다. 유럽연합의 가난한 국가들로부터의 불공정한 경쟁 및 가난한 국가들 내에서의 노동자들의 착취를 막기 위해 유럽 전역의 (물론 지역 생활비에 맞게 조정된) 최저임금 전략이 필요하다. 잘 조직된 제도들을 가진 국가들의 경험은 그것들이 실업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에 대한 반대는 국가가 최저임금을 정하고 시행하면 자신들의 역할이 약화될 것이라고 느끼는 강력한 노동조합들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노동조합들이 약화될 때까지는 영국과 독일의 경우가 그러했지만, 그 이후 그들은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사회적 유럽의 확대와 표준의 역할」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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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라는 이름으로 이기심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증오를 부추기는 혐오주의 “두 개의 유령이 우리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의 뒤에 우리 사회를 떠도는 두 개의 유령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150년 전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소개한 유령이 당시부터 지금까지 사회와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듯, 신자유주의와 혐오라는 이름의 이 두 유령은 대중들에게 이론과 감정의 근거를 함께 제공하며 사회 구성원 전체를 ‘정의’와 ‘합리’라는 이름하에 미쳐 돌아가게 만든다. 유령 중 하나인 신자유주의는 “노력해서 얻은 개인의 재산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 아래, 복지와 환경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를 무력화시켰다. 동시에 유령 중 다른 하나인 혐오주의는 민족주의와 애국심이라는 이름 아래 시민의 증오를 집중시킬 대상을 발굴해냈다. 브렉시트의 결정 뒤에는 “우리의 일자리와 이익을 빼앗아간 무슬림들에게 앞으로 투표권은 물론 나라 전체를 넘길지도 모른다”는 위기마케팅이 가해졌었다. 신자유주의는 2008년 경제위기의 원인이었지만, 이제는 그 안에 신자유주의자들을 용인했다는 이유로 진보 정당들이 더 거센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 이후, 우리 민족, 우리 국가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벽을 걸어 잠그는 일이 당연시되었다. 그리고 팬데믹의 시대를 맞아, 경제 분야가 주류이던 이런 발상은 ‘위험한 외국인’을 자국에 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발전되었다. 어느덧 우리는 이 두 유령이 일으킨 부정적 분위기를 일상적 여론과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이들이 일으킨 빙의의 결과, 대한민국이든 유럽과 미국이든 혐오 발언과 혐오 범죄가 일상화되었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것이 정치인들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어버렸다. ‘합리적 의심’과 ‘정의’라는 이름하에 조롱과 선동을 조장하는 저들에 맞서, 과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남았을까? 혐오가 아니라 희망Hope not hate의 세상을 위하여 만국의 시민이여 연대하라! 이 책은 두 개의 유령 아래 점점 비이성적이 되어가는 사회, 전 지구가 국가라는 벽에 갇혀 극도의 이기심을 추구하는 현실에 맞서는 하나의 시도다. 불평등과 환경, 팬데믹의 경우까지 현대 사회는 하나의 국가로는 맞설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한지 오래다. 그 위기를 넘기 위한 국가 간의 협력 혹은 연대는 발전 도상의 단계에서 이기심과 혐오를 통한 봉쇄에 자리를 내주기 일보직전이다. 코로나19라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파괴시켰고, 또 거꾸로 되돌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팬데믹이 파괴한 분야가 너무 광범위하기에, 발전해나갈 여지를 많이 만들었다는 발상도 가능하다. 개개인의 역량에 맡긴 채 국가의 개입 없이 코로나19에 맞서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기업도 마찬가지다. 같은 식으로, 전 세계에 걸친 위험 앞에 문을 닫아건 하나의 국가가 대항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 과학자들은 이런 현실 속에서도 국경과 무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고, 협력도 지속하고 있다. 혐오라는 말과 무관하게, 타인과의 교류를 발전의 계기로 삼는 사람도 여전히 적지 않다. 책은 개인, 집단, 국가를 넘어선 전 세계에 걸친 연대를 제안한다. 그리고 그 연대의 성공을 위해 국가, 집단, 개인이 추구해야 할 목적을 선언처럼 제시한다. 우리가 직면한 위협과 두 개의 유령은 이미 국경과 무관하게 세계를 횡행하고 있다. 중도와 진보 진영은 제3의 길이라는 해묵은 이론 뒤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었고, 결코 친하지 않던 신자유주의와 혐오주의가 파편화된 진영을 포섭하기 위해 손을 잡아버렸다. 그리고 이 둘이 보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유령처럼 배회하며 우리 사회를 증오와 선동의 사회로 바꾸어가고 있다. 책이 제시하는 분석은 다양하지만, 결론은 단 하나다. 혐오와 증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힘을 합치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 위기에는 국경을 넘어 맞서야”하며, 우리는 “혐오를 넘은 희망Hope not hate”의 세상을 이루어내야 한다. 만약 실패로 돌아간다면, 중도우파에서 좌파에 걸쳐 파편화된 다수에게, 극우파 중에서 나온 완고한 소수가 승리하는 심각한 결말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재분배적 과세와 공공 서비스 제공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은 가난이 대개 무기력과 게으름에 기인하며, 자칭 ‘노력해서’ 성공한 부자들과 중산층들의 재산은 보호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 심지어 혐오조차도 종종 도덕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든, 사람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제시할 필요성을 느낀다. (...) 이기심과 배제의 호소들은 단순하고 쉽지만 어둡고 사나운 목적지로만 이어질 뿐이다. 협력과 포용에 대한 요구들은 더 부담되지만, 그것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궁극적인 보상을 가져다준다.” - 책 속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