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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프롤로그
012 계절경계선 015 계절의 발견 023 봄, 새 학기 031 명동 토다코사 038 여름날 호프 043 향수의 도시에서 겪은 쇼킹 남프랑스 049 천재 조향사와 기레기 사이 056 나이스하지 않은 냄새의 추억 061 부산행 무궁화호 068 짐 가방에 실은 너의 땀 냄새 071 그 연예인의 냄새 079 비 오는 날의 수채화 085 냄새로 가늠하는 됨됨이 090 클럽 2차의 악취 100 에르메스 105 “향수 뭐 쓰세요?” 112 시소 116 여행이 그리울 때면 122 데오드란트 129 핸드크림이 그냥 핸드크림이 아니라고 137 가끔은 향기가 과한 사람 142 홍어와 홍콩 영화 146 쥐포 152 봉천역 대천서점 159 포근하지만 슬픈 165 친정집 비누 169 주말 늦잠 172 머리 냄새 178 하루의 냄새 188 에필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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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경계선에 다다를 때마다 느껴지는 기억의 냄새, 남편의 목덜미에서 퍼져 나오는 피곤의 냄새, 여행지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빗방울 냄새, 햇살 냄새, 비 오는 날 1교시 냄새, 강아지의 귀여운 꼬순내와 구수한 커피 향까지, 냄새에 관한 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잠시 멈춰 서 코끝을 간지럽히는 냄새를 맡고, 무언가를 떠올리고, 아파하고, 행복해하고, 얼마간 외로워한다.
--- p.5 계절은 냄새와 함께 다가온다. 계절의 냄새에는 어김없이 기억의 흔적이 묻어 있다. 지난해 이맘때 날 할퀴었던 말, 보듬었던 손, 웃고 떠들며 보았던 영화, 거닐던 거리의 소음 등. 종종 후각은 시각이나 청각보다 후순위가 되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 후각은 과거를 가장 생생히 떠올리게 하는 감각이다. 과거를 맡게 하는 감각. --- p.13 어린 시절 엄마는 가난한 사람에게 겨울은 힘든 계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그래도 난 겨울이 좋았다. 엄마가 목 끝까지 덮어 준 솜이불에서 나던 장롱 냄새, 귀에 걸어 준 분홍색 면 마스크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던 엄마의 크림 냄새가 따뜻했다. 묵직한 이불을 덮을 때, 보드라운 마스크를 쓸 때면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그럴 때마다 히죽 웃으며 엄마를 힐끗 바라보았다. 또 뭐가 그렇게도 신났어 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는 엄마의 거친 손에서도 어렴풋이 겨울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빨랫비누 냄새, 연탄집게의 매캐한 냄새 같은 것들이. --- p.17 생각해 보면 여름이라는 계절이 곧 흑역사의 시즌인 것도 같다. 땅 위에 조금은 붕 뜬 채로 지내는 여름엔 이성의 끈을 놓기가 쉽다. 그리고 여기엔 여름의 냄새가 한몫한다. 흙냄새를 머금은 장맛비, 우산 속 어깨를 맞부딪힌 두 사람의 땀 내음, 뜨겁게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냄새, 부채질해 주는 손에서 느껴지는 향수 냄새…. 여름 내내 이 냄새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제정신 차리고 살기가 더 힘들다. --- p.41 남이 하는 일은 다 쉬워 보인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대체 돈 받고 뭘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해 보면 안다. 남이 하는 일 중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그 일이 쉬워 보이는 건, 그 사람이 죽을 동 살 동 노력한 끝에 힘든 내색 없이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p.55 냄새로 그 사람이 어떻게 일상을 꾸려 나가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옷은 얼마나 자주 빠는지, 샤워는 얼마나 꼼꼼히 하는지, 식후 양치는 꼬박꼬박 하는지, 신발을 종종 볕에 말리곤 하는지, 퇴근 후 얼마나 살뜰히 자신 을 살피는지. 이 모든 것이 스치는 냄새 하나에서 느껴진다. 야근으로 어쩌다 하루 이틀 정신없이 보낸 사람과 정돈 없이 사는 게 일상인 사람의 냄새는 그 농도부터 다르다. --- p.85-86 일본에서는 물 냄새가 난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맡게 되는 냄새. 지하철에서도, 거리에서도 맡을 수 있는 눅눅한 물 냄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일본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그곳 학생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일본 친구가 보내온 편지에서 습기를 머금고 축축해진 종이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왠지 모르게 외롭고 쓸쓸했다. 일본의 집 냄새일까 궁금했다. --- p.119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며 향기에 신중하려 한다. 향이 짙은 보디로션을 바른 날엔 향수를 뿌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향이 짙은 핸드크림을 들고 나가는 날에는 묵직한 퍼퓸보다 가벼운 코오롱이나 오드투알레트를 뿌린다. 과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짙은 향기보다 은은한 내음으로 기억되고 싶다. 내가 머물렀던 자리에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가 남아 있는 건 좀 싫다. --- p.141-142 책장을 넘길 때 코끝에 닿는 파삭파삭한 책 냄새도 좋았다. 책의 종류에 따라 냄새가 달랐다. 양장본은 냄새도, 촉감도 매끈했다. 재생지로 만든 책에서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고, 올컬러 책에서는 사인펜 냄새가 느껴졌다. 책마다 냄새가 다르다는 건, 책을 대하는 나의 마음도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 p.153 철봉 놀이를 한 날엔 손에서 동전 냄새가 났고,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친 오후에는 텁텁한 냄새가 잠들기 전까지 코끝을 맴돌았다. 유치원에서 달걀국을 먹은 날엔 밥상 냄새가 머리카락에 묻어났다. 내 냄새를 맡는 만큼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 p.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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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머물며 기억을 완성하는
냄새들이 있다 어떤 냄새는 그저 무언가의 냄새로 머물지 않고, 순식간에 우리를 어느 장소와 시절로 데려간다. 나에게는 그런 냄새가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오이 냄새다. 오이 냄새를 맡으면, 한낮에도 형광등을 켜야 했던 광진구의 작은 방과 그곳에서 무수한 이야기를 쏟아 놓던 한 친구가 생각난다. 상에 오이 반찬이 올라오는 것도, 오이를 먹은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도 힘들어했던 친구. 오이를 내세운 장난스런 협박에 몸서리를 치던 친구. 이런 이야기라면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냄새로 시작하거나 끝낼 수 있는 기억이 나에게는 많다. 후각이 발달하기도 했고, 맡은 냄새가 저장되는 공간이 남들보다 조금 더 큰 덕분이다. 이게 뭐라고 싶으면서도 이 분야에서는 자부심마저 있다. 그런데, 이번에 고수를 만났다. 나는 그녀를 ‘냄새 맡기계의 국가대표’라고 칭하고 싶다. 바로 김수정 작가다. 그녀는 사물, 장소, 사람은 물론이고 햇살과 빗방울, 공기의 내음을 맡는다. 시공간이 만들어 낸 분위기를 냄새로 경험한다. ‘비 오는 날 1교시’의 냄새 같은. 스치듯 지나치는 사람의 취향과 곁에 있는 사람의 변화도 냄새로 알아챈다. 그러니 냄새에 관해 할 수 있는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이 책은 그 많은 말들의 일부만을 담은 것이다. 아예 대놓고 냄새를 뿜어 대는 향수나 화장품, 목욕용품 등에 관해서는 겨우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 느낌이다. 진지하게 〈냄새들2〉를 기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저자에게 냄새란 어떤 의미일까? 그녀는 냄새를 통해 지난날을 추억하게 된다고 말한다. 종종 후각은 시각이나 청각보다 후순위가 되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 후각은 과거를 가장 생생히 떠올리게 하는 감각이다. 과거를 맡게 하는 감각. (p.13)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냄새와 짝지어진 기억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엄마가 끓여 주시던 김치찌개, 독립을 시작한 작은 방에서의 여름, 할머니 집에서 처음으로 맡아 본 아카시아꽃 향기, 짝사랑하던 이의 스킨 향, 키우던 강아지, 학교 앞 떡볶이 집…. 희한하게도 그런 기억들은 다른 기억들보다 훨씬 깊고 선명하게 남아 어느 순간에 훅하고 우리의 오늘 속으로 들어온다. 내게는 이 책이 그런 순간이 되어 주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어느 시절의 풍경과 사람들이 떠올라 오래전에 즐겨 듣던 노래를 찾아 듣고, 예전에 쓴 글을 찾아 읽었다. 해가 바뀌기 전에 꼭 만나야 할 사람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기도 하고, 소원해진 이와의 즐거웠던 한때를 생각하며 그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다. 분명 냄새 이야기인데 더듬어 찾게 되는 건 나의 지난날이었다. 이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저자 못지않은 예민함으로 냄새를 잘 감지하고 또 저장하는 사람이라면, 읽는 내내 무척 즐거울 것이다. 그럼 냄새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은 어떨까? 냄새 맡기계 국가대표가 작정하고 써 내려간 냄새 이야기라고 해서 ‘코센서 자부심’이 있는 이들에게만 재미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해다.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냄새와 짝지어진 ‘기억’에 관한 글이기 때문이다. 어떤 냄새들은 코가 아닌 가슴으로 경험되기도 하니. 따뜻함과 스산함, 보드라움과 까칠함의 냄새가 공존하는 계절이다. 당신을 둘러싼 냄새들이 당신의 오늘을 쓸쓸하게 하기보다 어루만져 주면 좋겠다. 그리고 어느 때엔가 이날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게 되기를, 그 기억 속에 〈냄새들〉이 함께하기를 바라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