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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프롤로그
012 글이란 걸 씁니다 020 몹시 궁금한 것 024 책의 주변을 배회하면서 032 어느 날엔가는 소설 037 고전의 역할 043 여행 대신 책 047 서재가 있는 호수 058 개가 되고 싶은 고양이 063 집사를 사랑한 집사 071 월요일 아침 078 나의 부엌 081 조금 시들해진 취미들 087 정원을 탐하다 096 걷는 사람 100 책과 찻잔 104 차의 시간에 머무르다 111 필통이 하는 말 116 혼자 가는 곳 120 다시, 수영 127 빵 133 ‘반지하’라는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 140 청소라는 시시한 행위 145 버리는 기쁨 150 어서 와, 건조기는 처음이지? 154 멋진 중년이 되는 일 160 자신에게 몰두하는 삶 167 우정이라는 사랑 173 내 안에 사는 두 사람 182 나는 네 편, 너는 내 편 187 염려하는 건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198 에필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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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대신 책을 품게 되니 삶에 막연함이 찾아올 때면 더듬거리며 책 속에서 길을 찾는 방법 외엔 모르는 사람이 됐다. 주방은 서재가 되고 식탁은 책상이 되었다. 식구들이 밥을 먹으려고 식탁으로 몰려들 때는 재빨리 책을 구석진 곳에 밀어 놓아야 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책을 끌어당겼다. 어느 순간 박완서의 산문집을 읽으며 꽈리고추의 꼭지를 따는 기술이 생겼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을 이해하며 음식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날의 저녁 메뉴는 배달 피자나 치킨이다.
--- p.45 요즘 나는 고양이와 개를 생각하며 자주 운다. 사랑하기 때문에 울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사랑할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눈물까지 포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p.62 매일 비슷한 시간에 식구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삶, 한 달에 한 번은 빠짐없이 남편의 월급이 통장에 꽂히고 그 돈으로 작게나마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는 삶, 감당할 수 없이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그 짐을 나눠 줄 사람이 옆에 있을 거라는 믿음과 부부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떨어진 아이의 성적을 걱정할 때 그럴 수도 있는 거라며 허허 웃어 주는 사람이 있는 삶, 공과금을 자동이체하는 통장에 항상 비슷한 잔액이 남아 있는 삶.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평범한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 p.92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둘릴 때나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 글 쓰는 일에 확신이 없을 때,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 때문에 서러울 때,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때, 실타래처럼 꼬인 일을 풀기 직전에 나는 다시 찻물을 끓인다. 마실 차를 선택하고 좋아하는 찻잔을 꺼내고 가만히 멈추어 차를 우리고 차향을 맡고 천천히 차를 마시는 일에 집중하면, 나를 둘러싼 안개가 걷히면서 흐릿했던 내 존재가 분명해진다. 나를 절망에 빠뜨렸던 사람을 슬그머니 용서하게 되고 초라하게 늙어 가고 있는 나를 사랑하게 된다. --- p.109 여전히 시간이 나면 문구점을 서성인다. 뒤따라온 남편이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한다. “또 사? 집에 많잖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이 “또 사?”, 두 번째로 싫어하는 말이 “집에 많잖아”다. 역시 문구점에는 혼자 가야 한다. --- p.119 가만 보니 부러움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뒤집을 가능성이 있을 때 가질 수 있는 감정이었다. 언감생심, 이건 도저히 게임이 안 되는 상황이니까 ‘너는 네 인생, 나는 내 인생을 사는 거지’ 하는 마음이었다. --- p.138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그만큼 자유를 잃는다는 것임을 몰랐다. 어느 날 내가 머물던 자리를 떠났을 때 먼지 쌓인 잡동사니가 남아 있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참 싫다. --- p.149 고난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나 이겨 낼 수 없는 고난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고난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인간은 원래 자신이 겪지 않은 불행과 고통은 영원히 모른다. --- p.1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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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평범한 일상,
그 안에 숨겨진 작은 즐거움들 어디에 말할 만큼의 좋은 일이나 나쁜 일 없이 하루하루가 비슷한 모습으로 흘러가는 게 누군가에겐 권태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이 아무 일 없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깊은 안도감이 된다. 긴 아픔과 눈물의 시간을 지나온 사람은 ‘평온하면서도 조금은 지루한 날들’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오늘, 오늘과 비슷할 내일을 선물로 여기며 누릴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김설 작가가 그렇다. 대수롭지 않게 흘러가는 시간이 선물임을 알게 한 건 지나온 세월과 경험이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부모 역할의 부재와 가난, 결혼생활의 어려움, 암 투병 등 고군분투한 세월이 길었다. 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게 싫어 강한 척, 괜찮은 척하다 보니 외로움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인생의 고통이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걸 나이 오십이 되어 느꼈다. 그 세월 덕분에 아침마다 고요히 차를 우리고, 정해진 날 수영을 하고, 식물을 돌보고, 고양이의 발톱을 깎고, 동네 천변을 걷는, 그렇고 그런 하루하루가 눈물겹도록 행복해졌으니 말이다. ‘사생활’이라고 하면 대개 뭔가 비밀스러운 것을 상상하기 마련이나,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그녀의 사생활은 지극히 평범하고 좋아하는 것들은 매우 소박해서, 어느 이야기 앞에선 ‘그게 그렇게나 좋다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래서 더욱 그녀가 느끼는 ‘오늘의 행복’이 나의 행복과 가깝게 느껴졌다. 나에게도 남들은 결코 다 이해할 수 없는 행복감의 근원이 있고, 진심을 담아 아주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 참 별것 아닌 주제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가 글을 열며 건넨 고백은 내 고백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나를 지탱해 주는 건 큰 기쁨이 아닌 아주 작은 기쁨들인지도 모른다고요. (프롤로그에서)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아프고 민망한 지난날과 평온한 오늘이 한데 섞여 결국 기쁨과 소망을 이야기한다. 이 책이, 고난의 길 위에 있는 이들에겐 그 길 끝의 평온을 기대하게 만들고, 사는 게 지루한 이들에겐 내 삶을 지탱하고 있는 작은 즐거움들을 발견해 삶의 재미를 되찾도록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