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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01 남자들은 자꾸 나를 후려치려 든다 이제야 그 시절을 떠올리며 방과 후 페미 활동 그해 여름은 뜨거웠네 최애와 함께 타오르다 더 이상의 남자들 49등 처음의 날들 다음의 날들 독서실 히어로는 누구인가 당신의 질문 왜 여자는 자책하는가 마르지 않을 자유 진리의 삶 떠난 뒤에도 〈세바시〉 강연록: 우리가 여성 연예인을 더 쉽게 미워하는 이유 02 어른 여자들에게 그것은 정당한 고민입니다 다음으로 가기 위한 질문 며느리라는 신분 레이디 버드, 레이디 버드! 보이는 일, 보이지 않는 일 피해자다움이라는 말 북토크의 손님 페미니즘의 속도 맞는 안경을 쓴 기분 악플에 대처하는 자세 엄마에게 화내지 않고 카카오톡을 가르친다는 것 슬럼프에서 기어나오기 우리는 연대하기 위해 우엉의 친구들 그래서 우리는 거리로 예거마이스터가 필요한 날 RBG를 좋아하세요? 분노의 게이지가 차오를 때 마음의 온도 에필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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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S의 숙소 앞에도 함께 갔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는데, 한낮의 주택가 골목에 수십 명의 여자아이들이 줄을 지어 앉아있었다. 언제 오빠가 숙소에서 나올지 모르니 마치 서부영화 속 일촉즉발의 순간처럼 묘한 긴장감이 감돌던 공기만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얼마 전에는 혹시 내 망상은 아닐까 싶어(차라리 망상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와 함께 J부인을 자처했던 현지에게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인지 물어봤다. 현지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꿈이었겠냐?”
--- p.40 내가 사랑했던 그들도 결국 인간이 됐다. 무대 위, 화면 속에서 그토록 빛나던 그들이 어떤 의미로든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과 계속 마주하고, 내 사랑의 이유 대부분이 그에게서 온 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것임을 확인할수록 최애는 그냥 인간이 되었다. 최애거나 최애였던 ‘오빠’들의 음주운전, 성매수, 성폭력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내가 쏟았던 열정은 환멸로 돌아왔다. 너무 많은 엔딩이 사회면이었다. --- p.52 우리는 여성을 덜 미워해야 하고, 여성에게 더 관대해져야 한다. 여성을 쉽게 비난하도록 만드는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여성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산업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여성혐오를 조장하는 언론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더는 어떤 여성도 함부로 끌어내려져선 안 된다. --- p.102 옴부즈맨 프로그램 녹화를 마치고 돌아와 화장을 지우는데, 아이 메이크업 리무버를 듬뿍 묻힌 화장솜에서 까만 섬유 뭉치가 툭 떨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붙어있던 속눈썹이었다. 뻑뻑한 눈을 씻어내면서, 일단 아주 간단한 원칙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바로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무엇보다 굳이 예뻐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 p.155 내가 성폭력 피해자가 된 다음 깨달은 사실은, 당사자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있으며, 다른 피해자와 내가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거나 같은 방식으로 대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폭력 피해자의 내면은 너무나 복잡한 싸움터여서, 가끔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고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사건 이후 적잖은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상당히 괜찮다. 하지만 전부 괜찮지는 않다. 내 삶은 분명 그 3초의 순간 이전과 달라졌다. 나는 더 강해졌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약해지곤 한다. 알지 않았으면 좋았을 감정들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 p.163 그 역시 여성주의를 만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무엇이 부당했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눈앞이 뿌옇게 보였는데, 이제야 맞는 안경을 쓴 기분이에요.” 이름도 알지 못한 채 헤어진 그의 말을 종종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안경에 비친 세상이 너무 끔찍해 도망치고 싶은 날에는 나직하지만 단호하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앞으로는 뭘 하든 예전과는 달라질 거예요." --- p.177~178 대충 살면서도 배운 것이 있다면 세상에는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몇 가지 있다는 사실이다. 요즘 내가 계속 생각하는 것은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는 문제다. 다른 사람, 더 훌륭하고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나. 잘못된 선택과 멍청한 일들로 인생을 낭비했던 나. 세상 잘난 척은 혼자 다 하지만 나만은 모른 척할 수 없는 입만 산 나. 그런데도 계속 내가 데리고 살아가야 할 나. 그런 얘기를 쓰고 싶었다. --- p.234~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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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은 없지만 재미는 있습니다”
몰래 떠들고 싶은 비밀, 하지만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 정확히 언제부터 덕질을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푹 빠져 이성을 잃는 감각을 사랑했고 사소한 일에 함께 흥분하거나 열광하는 친구가 있다는 게 너무 즐거”웠을 뿐이다.(본문 42쪽에서) 덕질 말고는 제대로 해본 게 없었던 작가는 대중문화 기자가 되었고, 신입 시절 처음 썼던 기사는 H.O.T.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 기사였다. ‘오빠’였던 사람들을 인터뷰이로 만나며 새로운 대상을 기꺼이 사랑했다. “좋은 기자가 되고 싶었”고 그런 기자일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자로 일한 지 10년째 되던 해, 한 팟캐스트의 여성혐오 논란을 마주하며 대중문화에 관한 즐거운 이야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다 보니 글 쓰는 일을 하게 된 것은 그 설렘을 잊지 못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들을 웃기고 싶었고 시선을 끌고 클릭을 부르고 싶었다. 내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독자들이 함께 열광하고 폭소하는 순간의 짜릿함은 중독적이었다. _233쪽에서 이제 그는 대중문화와 관련해 여성혐오와 불평등, 성 역할 편견을 짚어내며, 유독 여성 연예인들을 쉽게 비난하는 사회 분위기를 지적한다. 떠난 뒤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두 명의 이십 대 여성, 구하라와 설리를 떠올리며 “더는 어떤 여성도 함부로 끌어내려져선 안 된다”라고 말한다. 더불어 젊은 시절 작가에게 “새로운 곳에 데려가고 좋은 것을 보여주”었던 어른 여자들과 여자아이에게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엄마라는 존재에 관해 이야기한다. 결혼을 하면 피해 갈 수 없는 며느리라는 신분과 엄마가 되는 문제,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꾸밈노동 그리고 성폭력을 비롯해, 여성이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들에 관해 자신의 경험담과 함께 풀어나간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이야기는 여성들이 마음 편히 함께 웃고 울 수 있기를, 서로 연결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써내려간 것이라 말한다. 내가 싸우고 있지 않은 순간에도 누군가 싸울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그 문제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만들어준다. 그것은 ‘남을 돕는다’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있다’는 감각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이 아닐까 싶어지는 날, 나는 ‘우엉의 친구들’을 생각한다. 더 많은 여성, 여성주의자 들이 그렇게 연결되기를 바라면서. _204쪽에서 “페미니즘의 속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 기존에 각종 매체에 써왔던 칼럼을 다듬고 새로운 글을 더해 완성한 이 책은 “어떤 여자아이가 작은 방에서 나와 이리저리 헤매며 길을 찾고 간신히 작은 방을 가진 어른이 되기까지의 시간에 관한 조각들이다.”(「프로롤그」에서) 동시에 나이 들어가는 여성으로서, 뒤에 올 여성들을 위해 오래오래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다짐을 담은 책이기도 하다. 이 사회에는 여전히 여성 관련 범죄가 끊이지 않고 페미니즘에 관한 수많은 논의가 오간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새로울 것 없는 페미니즘 관련 이슈가 지방 소도시의 누군가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언제고 또 거리로 나가 여성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 날이, 고통당하는 여성을 지켜보며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이 지옥처럼 느껴질 때 사람들은 떠올릴 것이다, 페미니즘의 속도는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다정함이 세계를 구원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 자신을, 어떤 날엔 서로를 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하루를 또 살아낼 것이다. 부채감이 아닌 연대감을 느끼며 함께 걷는 우리를 보고 싶다. 그 길에 이 책이 작은 힘 하나 더할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