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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가 시작될 즈음
그날 오후 무서운 자장가 장 씨가 보지 못한 것은 노인은 처음부터 노인이었다 산호는 벼랑에 선다 미소는 느낄 수 없다 산호는 질문한다 죽은 자들은 이야기한다 쌍둥이 묘 백현우는 뭔가 알고 있다 미소는 묘지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왕형호는 대답을 피한다 동이는 떠나지 못한다 김 과장은 왜 산으로 갔을까 노랑머리는 미소를 마지막으로 본다 노인은 오랫동안 외로웠다 백현우는 퍼즐을 맞춘다 미소가 찾는 이야기는 산호는 체념했지만 벼랑은 기억한다 두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노 이사는 재수가 없었다 수수께끼 진실은 말이 없다 누군가는 가고 누군가는 온다 노 이사는 달린다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가 된다 산호는 다시 벼랑에 선다 얼굴 없는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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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동기가 뭐예요?”
“…….” “선배님도 모르시나요?” 산호가 덧붙인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백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신문 기사를 읊듯 말했다. “이미소. 여자. 만 16세. 한 살 때 S보육원에 보내졌다. 두 번 입양 갔고, 두 번 파양 당했다. 그중 한 번은 도벽이 원인이었다. 6학년 때 생활지도원을 폭행한 뒤 J복지재단으로 옮겼다. 중학생 때 폭력 및 절도 혐의로 잡힌 뒤 훈방된 적이 있다. 수차례 정학을 당했다. 올해 보름고등학교에 입학해 4월까지 학교에 다녔다. 사건 당일 들고 있던 가방에서 소주병과 담배 그리고 소량의 메스암페타민이 발견되었다.” “…….” “불우한 환경, 비뚤어진 성격, 도벽, 폭력 성향, 잘못 사귄 친구들, 마약 중독, 희망 없는 미래, 우울증. 뭐, 이쯤 하면 동기는 충분하지 않아?” 충분했다. 산호는 하마터면 나라도 그랬을 거라고 말할 뻔했다. --- p.40 엄마, 병원, 택시, 오백 원…… 그리고 아이는 어떻게 되더라. 발목이 약하고 종아리가 휘어져 달릴 때마다 자주 넘어지던 그 아이는, 결국 돌아오지 못한다. 김 과장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칠삭둥이 말더듬이 천사 똥고집은 사라진다. 그 이후 아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이가 갖고 있던 빳빳한 오백 원짜리들은 세상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지만 아이는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아이는 산길에 신발 한 짝만을 남겨두고 감쪽같이 사라진다. (나머지 한 짝은 낭떠러지 아래 어딘가에 있지만 끝내 발견되지 못한다.) --- p.99 감정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이다, 라고 미소는 결론 내렸다. 고통이 없고, 슬픔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외로움이 없다는 말이니까. 미소의 얼굴이 무표정인 건 이러한 감정들이 사라져서였다. 살아 있을 때에도 이 얼굴이었다면 문제를 덜 일으켰을 텐데. 냉소적인 얼굴, 불만 가득한 얼굴, 방어적인 얼굴, 도움을 줘도 고마워하지 않는 듯한 얼굴이 항상 문제가 되었으니까. 어른들이 고아에게 기대하는 표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상관없다. 죽었으니,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백년나무를 떠날 수 없는 이유가 뭘까?’ 미소는 스스로 묻고 답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 p.128 “전에 내가 이미소에겐 자살 동기가 충분하다고 했을 때 방 수습이 한 말 기억나?” 산호는 혼자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자살할 만하다, 라고 말하는 건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라고 했어.” 맞다. 그랬지. “일 년 전 여자친구한테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후 처음 들은 충격적인 말이었어. 신선했어. 우리는 성공한 사람의 죽음에는 그 이유를 찾으려고 달려들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죽음은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 누구의 삶은 살 가치가 있고, 누구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기준을 우리 스스로 세웠다는 증거지. 세상에 납득되는 죽음, 당연한 죽음 같은 게 어디 있겠어. 어, 나 중요한 전화 온다.” 백현우는 전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 “하지만 나부터도 매일 뉴스를 보며 습관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거든. 그래서 채용하는 거야. 방 수습처럼 어리석을 만큼 순진한 사람의 시각이 필요해서.” --- p.208 한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미지의 것을 가져온다. 한때 산호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래서 오랫동안 기억해온 책 구절이 지금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 아이가 죽을 때마다 미지의 것들이 사라진다. 형이 죽었을 땐 어떤 것이 함께 사라졌을까.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었던 이미소. 그 아이가 죽었을 땐 어떤 미지의 것이 사라졌을까. 미지의 내일이 사라졌겠지. 미완의 꿈이 사라졌겠지. 산호는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이 아찔하게 다가왔다. 미소와 함께 사라진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 아이가 아직 시작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그리고 형이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들은……. --- p.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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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대상 수상 작가*
*2021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살만 루슈디의 소설 《한밤의 아이들》에서 주인공인 살림 시나이는 ‘나는 누구-무엇인가?’란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나보다 앞서 일어났던 모든 일, 내가 겪고 보고 행한 모든 일, 그리고 내가 당한 모든 일의 총합이다.’ 그렇다면 이런 대답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내가 들은 모든 이야기와 내가 만든 모든 이야기의 총합이다. 이 책은 나의 네 번째 책이며, 삽화가 들어 있지 않은 첫 책이다. 나는 내 소설 속 인물들의 눈코입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실컷 이야기를 나누고서 사라진 손님의 얼굴처럼 책 속의 주인공들도 정확한 형체가 없다. 아니, 읽을 때마다 조금씩 모습이 변한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변하지 않는 건 이야기이다. 그들이 들은 모든 이야기와 그들이 만든 모든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_작가의 말 나뭇잎 하나하나가 다르듯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여기 한 소녀가 있다. 이름은 이미소. 나이는 열여섯. 보육원에서 자랐고, 두 번 입양 갔다가 두 번 파양 당했다. 학교는 여러 번 정학을 당한 끝에 자퇴했고, 술 담배를 했고,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노는 애. 아니면 문제아. 아니면 양아치. 조금 점잖은 표현을 쓴다면 비행청소년. 아니면 ‘저런 애랑 어울리지 마’에서의 저런 애. “설탕에 개미가 꼬이듯, 가로등에 나방이 꼬이듯, 미소에게는 문제가 꼬였다.” 한 사람의 삶을 한 토막으로 잘라버리는 건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어서, 이 소녀가 벼랑 아래에서 발견됐을 때 모두가 의심 한 점 없이 이렇게 생각한다. 자살이라고. 그렇지만 미소에게는 한 문장으로 축약되지 않는, 축약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사람들에게는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다. 손금처럼, 주름처럼, 눈동자처럼, 언뜻 보기에는 비슷하거나 거의 똑같은 것 같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랄 만큼 다른 이야기가. 말하자면 모든 묘에는 (잡초가 무성하든 아니면 깔끔한 비석이 세워져 있든) 한 사람의 평생에 달하는 기나긴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이다. 미소에게는 잡초 무성한 묘마저도 없었지만. 아니, 어쩌면 그런 묘마저 없었기 때문에, 살아서도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죽어서도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미소는 백년나무 아래에서 깨어난다. 죽음이 억울하다거나 슬프다는 말이 아닌, 바로 자기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소는 다른 묘에 잠들어 있던 이야기들을 듣는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이야기들, 백년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그러니까 《사라지기 전에 단 하나의 이야기를》이라는 제목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셈이다. 하나는 미소가 사라지기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 다른 하나는 미소가 듣는 이야기, 즉 다른 영혼들이 사라지기 전에 묘에 묻어둔 이야기. 여기에 한 가지 이야기가 더 붙는다. 산호, 지역신문사 수습기자이자, 형을 잃은 동생이자, 미소가 자살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의 유일한 사람의 이야기다. 결국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들의 이야기를 안다는 뜻이다― 소설 속에서 미소의 이야기와 산호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교차하고 때로 포개지기도 하지만 둘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미소는 죽었으니 산호를 알지 못하고, 산호가 미소를 알게 되는 건 바로 그 미소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 죽음은 선배 기자인 백현우가 보기에 의문을 가질 여지없이 너무나도 분명한 자살이었고, 거의 아무도 애도하지 않은 죽음이었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죽음이었다. 미소에게는 너무 많은 딱지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고아, 반항아, 가출 청소년, 절도범, 폭력범처럼 이름 앞에 붙일 수식어가 많은 아이는 동정받을 수 없다.” 산호도 처음부터 미소의 죽음에 의문을 가진 건 아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이미소는 보호 구역 밖의 아이였고, 어울리지 말아야 할 아이였다. 산호는 솔직히 자신이 그런 어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미소를 봤다면 비호감이라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여동생이 있었다면 저런 애를 조심하라고 충고했겠지.” 하지만 미소가 어떻게 살았는지, 또 어떤 사람들에게 어떻게 시달렸는지를 알게 된 후 산호는 미소의 죽음을 뒤쫓는다. 미소에게 달라붙은 딱지들이 가리고 있던 이야기, 미소 자신만이 알고 있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알게 됐으니까. “결국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들의 이야기를 안다는 뜻”(《귀신 사는 집으로 이사 왔어요》 작가의 말)이니까. 그러니까, 《사라지기 전에 단 하나의 이야기를》은 이야기를 통해 전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반만 맞는 말이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이야기만이 갖는 재미를 알고 있다. 노인이 미소에게 들려주는 기구한 운명의 이야기들을 시작으로 미소의 이야기에서 산호의 이야기로, 산호의 이야기에서 노인의 이야기로, 노인의 이야기에서 동이의 이야기로, 동이의 이야기에서 노 이사의 이야기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마치 셰에라자드 앞에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수많은 여성의 목을 벴으면서도 셰에라자드의 목만은 베지 못했던 샤리아 왕(《천일야화》)이 그러했듯이, 이야기에 매료된 채,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이들이 슬퍼하면 함께 눈물을 흘리고 그들이 기뻐하면 함께 웃음을 짓고 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