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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블랑쇼 선집』을 간행하며 · 4
1. 예술의 탄생 · 13 2. 박물관과 예술과 시간 · 34 3. 박물관의 고통 · 80 4. 백과사전의 시대 · 95 5. 번역하다 · 105 6. 위대한 축소주의자들 · 113 7. 영점(零點)에 선 인간 · 131 8. 느린 장례 · 148 9. 공산주의에 대한 접근(필요와 가치) · 165 10. 마르크스의 세 가지 말 · 173 11. 기대를 저버린 종말론 · 178 12. 전쟁과 문학 · 191 13. 거부 · 193 14. 파괴하다 · 196 15. 헛된 말 · 203 16. 천사와의 싸움 · 225 17. 몽상하다, 쓰다 · 243 18. 수월한 죽음 · 257 19. 신들의 웃음 · 290 20. 위반에 관한 짧은 메모 · 314 21. 단순함을 향한 우회 · 324 22. 전락과 탈주 · 347 23. 동일화의 공포 · 358 24. 흔적들 · 375 25. 곡과 마곡 · 395 26. 카프카와 브로트 · 415 27. 마지막 말 · 435 28. 최후의 마지막 말 · 456 29. 우정 · 497 옮긴이의 말 · 505 |
Maurice Blanc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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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그렇다면 빨리 결론을 내 보자. 인간은 사라지거나 아니면 스스로 변화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제도와 사회 질서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변화를 통해 요구되는 것에서도 온다. 실존의 총체 그 자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전향을 통해 오로지 철학만이-교리를 가지고 하는 종교는 안 된다. 이미 계획과 범주의 틀을 가진 교회나 국가는 할 수 없다-이 변화를 조명하고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개인적인 전향. 전복과 동요를 통해서만 도달되는 실존, 그것만이 나의 실존이다. 나는 내 삶을 바꾸어야 한다. 이 변화 없이는 내가 지닌 근본적인 가능성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망설임 없이 소통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인간들과 연결되어 사는 것처럼, 어떤 유보 조항 없는 온전한 성실성으로 미래에 연결되어야 스스로 긍지를 느끼는 그런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p.179 셰스토프식 남자를 신념에 이르게 한 부조리가 시지프를 기쁨에 이르게 한 것이다. 적어도 이런 해석이라면, 다시 말해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은밀히 드러나게 해 둔 카뮈의 제안을 간파하고 이를 약술화해서 말하는 거라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행복은 일종의 도덕적 추론에 의해 나온 부조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결하고 존엄한 행복은 희망이 없다는 진리를 충실히 수용할 때 오기 때문이다. 되돌아가는 자에게-되돌아갈 수 없는 자인데-가장 어려운 비밀이 나타난다. 행복한 부조리는 이런 두 움직임의 신비한 상관성에 있다.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통일성을 갖는다. 이것이 단순함의 수수께끼다. 부조리가 앞에 있을 때 행복을 주고, 행복을 움켜쥘 때 부조리를 주는 이런 단순함. 또한 우리로 하여금 부조리에서 행복을 끌어내고, 행복에서 부조리를 끌어내게 하는 단순함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끝없이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 p.331 여기서 쟁점이 무엇인지 예감할 것이다. 이른바 (문학이 요구하는) 글쓰기는 어떻게 행해야 할까. 앞서 말하는 이 말하기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전혀 다르게, 차갑게, 내밀함이나 행복감 없이. 아무것도 말하는 게 없으면서 저 안에 있는 깊은 것이 말하는 듯이 말하기. 항상 단 한 사람을 위해, 즉 비인칭적인, 비개인적인 단 한 사람을 위해 말하기. 저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말하면서 그것 자체로 바깥을 말하기. 진실이나 진리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 정반합 같은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와는 전혀 다른 다량의 흐름으로, 플럭스(flux)로 말하기. --- p.373 “네가 날 이해한다고 넌 말해선 안 돼.” 그는 브로트에게 이런 말을 반복한다. 친구들은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인성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가 절망하지 않아야 할 모든 이유를 그에게 언제든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은 그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완벽한 불행으로만 그가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를 가장 잘 아는 친구들의 너무나 호의적인 해석들 때문에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고유한 고통(불행과 괴로움)에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 p.438 쓰다와 살다. 어떻게 하면 정확히 대결 구도로 놓기 힘든 두 용어를 대결 구도로 볼 수 있을까? 쓰기는 삶을 파괴하고, 삶을 보존하며 삶을 요구하고, 삶을 무시한다. 이건 상호적이다. 삶이 글로부터 삶을 얻는데, 만일 글이 삶으로부터 얻는 것이 필연적인 불안밖에 없다면, 글쓰기는 궁극적으로는 삶과 어떤 상관성도 없다. 부재하는 관계성. 다시 말해, 글은 자체적으로 모이고 흩어질 뿐 결코 그 어떤 것과 관계성을 맺는 게 아니다. 그러나 글쓰기와 전혀 다른 것이 글쓰기를 망쳐 놓거나 교란시킨다. 그건 “전혀 다른 어떤 것”일 수 있다-중립성을 띤 어떤 것. 그것은 글에 소속되어 있는데, 단, 글은 어떤 데 소속될 줄도 모르고 소속지를 지명할 줄도 몰라야 한다. 카프카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절대 끊어지지 않고 지속성을 잃지도 않으며 펠리체와 하나가 되기 위한, 그래서 하나로 결합하는(분리를 결합하는) 과정을 수련한 것이다. --- p.4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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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거리가 오히려 우리를 가깝게 한다는 아이러니,
동일성에서 벗어난 글쓰기가 가져다주는 문학적 우정에 대하여 문학과 철학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어 사르트르만큼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모리스 블랑쇼. 예술, 정치, 문학, 철학에 관한 그의 29개의 비평적 에세이와 평론을 모은 『우정』(1971)이 그린비 블랑쇼 선집 6권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문학의 공간』(1955), 『도래할 책』(1959) 등 그간 블랑쇼가 해온 문학 비평의 연장선으로서, 라스코 동굴 벽화의 수수께끼에서부터 원자 폭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사를 폭넓게 기록하고 있다. 블랑쇼는 문학과 예술, 정치와 혁명 등에 대해 바타유, 말로, 레비스트로스, 뒤라스, 카뮈 등 그가 우정과 존경을 바치는 작가들을 들어 써 내려간다. 글로써 그가 이들과 나누는 무한한 대화는 때로는 파괴하며 융합하고, 분산하며 수렴하는 무신론적 깨달음의 세계를 공유한다. 독자들은 블랑쇼의 비평의 눈을 거쳐 20세기 프랑스 현대문학사의 맥락을 한눈에 꿰어 볼 수 있다. 관계 맺지 않으며 관계하는 자유로운 우정의 가능성 블랑쇼는 조르주 바타유의 ‘공모적 우정’이라는 말을 언급하며 『우정』을 시작한다. 이때 공모적 우정이란 ‘어떤 종속성도, 어떤 일화성도 없는 우정’을 가리킨다. 이것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와 같지 않은 자, 절대적 타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을 나와 동일시하는 오류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실망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정은 ‘절대적 가까움’을 뜻하지 않는다. 블랑쇼는 ‘어떤 절대적 거리’를 가지는 우정을 통해 기존의 통념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가 공모적 우정을 느끼는 동시대 작가들을 소환하여, 비평으로서 그들과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표제작인 「우정」에서 블랑쇼는 바타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라는 이별이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살핀다. 죽음은 ‘추억’하고 대화를 이어 가기를 강요한다. 즉 죽음이 분리를 지워 버림으로써 둘 사이의 공허를 사라지게 하는데, 블랑쇼는 이를 경계한다. ‘분리’는 언제나 존재했던 것으로, 블랑쇼는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관계’, ‘말 없는 신중함’을 추구한다. 이는 소통을 관두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말의 침묵 속에서 서로가 연결되는’ 우정의 방법이다. 즉, 서로에게 현존이 되어 주는 것이다. 너 자신이 되지 말라, 인간이란 ‘끊임없이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기에 ‘현존’은 블랑쇼의 화두로서, 실존은 언어와 에고가 있어야만 가능한 반면 현존에는 ‘무언어’와 ‘무아’(無我)가 필요하다. 그는 ‘에고’라는 허상에 현혹되지 말고 끝없이 분열하고 해체될 것을 말하고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에 동화되면 안심을 느낄 순 있으나 자기 한계에 매몰되고 만다. 블랑쇼에게 문학은 곧 ‘에고’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인간은 이러한 퇴행성을 극복하기 위해 문학을 읽는다. 익숙한 것이 부재한 중성적 텍스트들을 통해 에고의 올가미를 벗어야 한다. 루이르네 데 포레, 미셸 레리스, 장 폴랑 등은 문학에서 이 궁극의 무, 무심함에 도달하기 위해 수행한 작가들이다. 앙드레 고르츠는 현대문학의 소임은 강력한 소속으로부터 탈출하는 일이라며 개성성, 자기 중심주의, 소속주의, 애국주의, 한마디로 일체의 동일화를 공포로 여겼다. 블랑쇼는 문학이 하는 놀라운 일이 있다면 바로 이런 무심함에 대해 열정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데 필수적인 언어를 우리는 결코 버릴 수 없겠으나, 20세기 현대 유럽의 작가들은 언어를 버리기 위해 오히려 언어를 껴안는 역설적 문학 행위를 수행했다. 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 현대문학이 자기 파괴적 면모를 보인 연유도 이것이다. 해방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계를 넘는 위반의 힘으로 훨씬 많은 것이 고발된다. 왜냐하면 무한 자체가 무한에게는 한계가 되기 때문이다. 무한은 중립적 표명을 통해 한계를 알림받게 된다. 여기서 중립적 표명이란 한계 내에서 말하면서도 한계 너머를 말하는 식으로 표명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중요한 문학은 우리에게 마지막 새벽처럼 나타난다. 재앙과도 같은 지난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면서도 항상 어떤 가변성은 띤다. 혹독한 무아(無我), 무장한 저 인내심 깊은 상상을 통해 이 도저한 거부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르네 샤르). _본문 중에서 무심함에 대한 열정, 작가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하여 블랑쇼는 작가 카뮈가 이르려 했던 ‘무심함’, ‘무관심’이 ‘부조리’라는 무거운 이름으로 알려진 데에 대해 해명하려 한다. 사람들은 카뮈를 그가 주장하는 극단적인 생각에 가둬 두려 했으나 카뮈는 이것을 거부했으며 ‘부조리’라는 고정된 용어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블랑쇼는 카뮈가 ‘자기 생각을 직접 말하기보다 늘 우회를 통해 말한다. 그러다 보니 거부하고, 피하고, 바꾸기를 줄곧 하면서 우회를 통해서만 새로운 진실이 표명되도록 한다’고 밝혔다. 카뮈는 전복이라는 자유로운 흐름에 있으면서도 결코 그 무엇에도 장악되지 않았다. 블랑쇼는 카뮈의 이러한 ‘이상한 무관심’에 주목한다. 그는 또한 책의 후반부 상당 부분을 할애해, 카프카 문학의 순수성을 진단한다.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지 않고 전부 파괴하고자 함으로써 익명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사후에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 의해 그의 글들이 출판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명성을 얻었다. 블랑쇼는 이러한 남용을 절제된 언어로 비판한다. 카프카와 그의 편지, 문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 등에 대한 논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카프카에서 카프카로』에서 드러났던, 카프카를 통한 블랑쇼의 ‘문학’을 다시 한 번 엿본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작가라 칭하는 이 시대에, 독자는 블랑쇼의 사유를 통해 작가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숙고해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