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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글쓰기의 어려움 · 13 기후 위기, 화석 자본주의, 그리고 문학 · 16 미래의 불안, 그리고 유토피아의 언어 · 26 이제,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 · 39 시의 난해성 혹은 소통의 문제 · 52 욕망의 사회학을 향하여 · 64 포이에시스로서의 문학 · 72 비평, 관계 혹은 타자성의 수사학 · 77 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 · 84 제2부 거대 서사의 뒤안길 ―기후 위기 시대에 읽는 박경리의 시 · 89 장르 너머의 장르 ―밥 딜런 · 101 몸의 언어, 상처의 언어 ―이재무論 · 120 파열의 언어 ―포루그 파로흐자드 · 132 상징계에서 살아남는 법 ―권혁웅論 · 137 복수적 주체의 서정시 ―루이즈 글릭 · 144 타자 지향의 윤리학 ―전인論 · 158 자연, 일상, 그리고 그 너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 166 부유하는 주체들을 궁구하기 ―정병근論 · 178 허공을 치는 바람의 은유 ―신용목論 · 188 기린처럼 멀리 ―정한용論 · 197 제3부 본다는 것의 의미 ―권덕하 시집, 『맑은 밤』 · 211 저 살아있는 감각의 축제 ―김옥종 시집, 『잡채』 · 223 길 위의 시간, 시간 위의 길 ―오세영 시집, 『황금 모피를 찾아서?실크로드 시편』 · 235 직관의 황홀한 힘 ―문효치 시집, 『어이할까』 · 246 자본을 건너는 사랑의 헤테로피아 ―홍대욱 시집, 『세상에 없는 노래를 위한 가사집』 · 255 서정시와 서사시의 문법 ―최동호 시집, 『황금 가랑잎』과 공광규 서사시집, 『동해』 · 267 저 아픈 순례자의 길 ―김윤환 시집,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 277 먼 데서 오는, 고통이라는 이름의 열차 ―김정수 시집, 『홀연, 선잠』 · 288 대립각을 해체하는 행간의 시학 ―안차애 시집, 『초록을 엄마라고 부를 때』 · 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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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홀한 순간의 네 가지 메모
모리스 블랑쇼M. Blanchot의 말대로라면 글쓰기란 언어를 ‘매혹’ 아래 두는 것이다. 언어가 매혹의 주술을 잃을 때 권태가 몰려온다. 껍데기들의 연속체, 반복, 낭비된 시간, 거짓말, 가식의 웃음 혹은 눈물. 글쓰기는 이런 것들로부터 계속 도망치는 것이다. 좋은 글은 함부로 소진되지 않는다. 그것은 퍼내도 자꾸 고이는 샘물처럼, 읽을 때마다 새로운 길을 드러낸다. 휴지처럼 버려질 운명, 모래 무덤의 문턱에 글자들이 다가갈 때, 글쓰기는 중단된다. 글쓰기는 정신의 소비이다. 계속 글을 써도 영혼의 잔고가 많이 남아 있으려면, 쓰는 만큼 혹은 그 이상 영혼의 금고에 많은 것을 쌓아놓아야 한다. 그래서 비단 글을 쓸 때만이 아니라, 글, 즉 매혹의 글을 읽을 때 그는 이미 매혹의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글쓰기의 소비를 잘 계측해야 한다. 영혼의 이자가 채 붙기도 전에 ( 글쓰기의) 소비를 할 때, 정신은 위기를 겪는다. 그때, 남아 있는 영혼의 잔고는 그것이 채 없어지기도 전에 매혹의 색채를 잃는다. 글쓰기의 매혹은 두 가지 방향으로 온다. 하나는 글쓰기가 진실을 건드릴 때이다. 개 같은 고통을 감수하며 글이 배리背理의 세계를 건드릴 때, 글은 만 가지 뿌리줄기(리좀)를 가지며 그것을 읽는 정신의 세계로 스며들어 간다. 글은 이렇게 혼란의 이름으로 영혼을 깨운다. 왜냐하면 세계는 그 자체 배리이며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날을 가진 글은 먼 구석기의 그림에 불과하다. 글은 만 개의 날을 가지고 만 개의 세계를 쑤신다. 글이 세계를 찌를 때, 세계는 만화경처럼 색깔을 바꾸며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은 혼란이며 화려한 폭발이고, 대답 없는 진실이며, 대답을 기대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 두 세계의 만남이다. 보라, 단순성의 세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말대로 “모든 견고한 것들은 공중에 산산이 녹아내린다.” 견고한 것들, 단순한 것들, 뻔한 것들, 권태로운 것들은 모두 거짓이다. 글쓰기는 단순성이 만들어내는 거짓과 권태와 싸운다. 매혹의 글쓰기는 두 번째 길을 가지고 있다. 글쓰기는 모든 사물에 오래도록 붙여진 이름들을 조롱한다. 세계는 낡아빠진, 녹이 슨, 먼지가 가득한, 혹은 빤질빤질한 관습으로 가득 차 있다. 글쓰기는 썩은 간판들, 지겹도록 봐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이름들을 지우고, 바꾸고, 갈아치운다. 견딜 수 없는 권태란 없다. 모든 권태는 파괴되기 위해 존재하며, 글쓰기는 먼 아담의 시대에 신이 하사한 주권으로 권태의 집을 때려 부순다. 매혹의 글은 이 파괴의 먼지와 소음과 혼란과 번개의 빛으로 소란하다. 모든 이름은 그 자체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자는, 오직 낡은 집의 완고한 소유자들뿐이다. 글쓰기의 외로운 전사들은 수많은 이름들의 창고 안에서 파괴를 꿈꾼다. “모든 견고한 것들”은 낡은 이름의 소유자들이며, 그것들은 오로지 혐오와 파괴에 의해서만 “공중에 산산이 녹아내린다”. 보라, 우리는 이름을 바꿔친 빛나는 텍스트들의 집을 본다. 그것의 광채는 매혹 그 자체이며, 세계의 재구성이다. 그러므로 배리의 심장을 건드리지 않을 때, 그리고 낡은 이름들을 파괴하지 않을 때, 글쓰기는 중단된다. 매혹을 잃은 게임은 무료함의 공수표空手票들이다. 그것들은 아무리 쌓여봐야 영혼의 금고를 풍요롭게 만들지 못한다. 개나 소나, 아무나 가져다 써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종잇조각들을 우리는 책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좀먹은 영혼이며, 읽는 이들을 좀먹게 하는 정신이다. 글쓰기는 책방에 넘치도록 쌓여 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정신들을 혐오한다. 누가 글을 쓰는가. 매혹의 개 같은 고통을 견디는 자들이 글을 쓴다. 블랑쇼의 책 제목대로 글쓰기는 오로지 “도래할 책”을 쓴다. 저기 책이 오고 있다. 옛것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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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어깨에 비듬이 쌓이듯 궁핍한 정신에도 글이 계속 쌓인다. 블랑쇼M. Blanchot는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문학은) “사라짐이라는 본질”로 향한다고 답하였다. 어쩌면 사라짐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 때문에 계속 글을 써대는 것일 수도 있다. 먼저 쓴 글들은 어느 정신의 해변에서 연기처럼 지워졌는가. 글은 소멸을 향해 있고, 문학은 소멸하면서 진화한다. 말하자면, 문학은 ‘사라짐이라는 본질’들의 무덤 위에서 다시 태어난다. 사라지는 것들은 다시 나타나는 것들의 원인이 된다. 소멸이 없으면 탄생도 없으므로, 소멸은 그 자체 탄생의 유의어이다.
배가 고파 사과를 따려고 하면 가지가 자꾸 위로 올라가고, 물을 마시기 위해 몸을 굽히면 수면이 자꾸 낮아지는 탄탈로스의 지옥처럼, 문학이 늘 허기와 갈증의 원인인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문학이라는 사과와 물속으로 이미 들어가 버렸다. 나는 이미 사과이고, 물이다. 나는 사과 안에서 배고프고, 물속에서 목마르다. 괜찮다. 앞에 나온 평론집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여전히 주체란 모름지기 몸-주체라고 믿는다. 몸은 아주 작은 통증만으로도 정신의 전면적인 활동을 마비시킬 수 있다. 숭고한 영혼도 몸-그릇에 담겨 있다. 그리고 문학은 상처를 자처하는 ‘타자 지향의 윤리학’이다. 문학의 리비도는 늘 자기를 떠나 타자에게로 이동 중이다. 19세기의 리얼리즘과 20세기의 모더니즘을 거치면서 문학은 사회·역사와 맞짱 떴고 욕망의 심연을 궁구했다. 최근의 팬데믹 사태는 이제 모든 골방의 작가들을 광장으로 부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안전한 밀실은 없으므로, 이제 더 이상 분리된 공간은 없으므로, 인류는 다시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사유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집단성이 광기와 폭력이 되지 않으려면, 그리고 밀실이 무책임한 도피가 되지 않으려면, ‘유쾌한 상대성’이 보장되는 새로운 공통체commonwealth를 건설해야 한다. 안토니오 네그리A. Negri는 이것을 “자본과 국가 너머의 세상”이라고 부른다. 문학은 그 먼 옛날부터 이런 세상을 꿈꾸었다. 또 한 권의 책을 무슨 노아의 방주처럼 끌고 세상으로 나간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황홀하다. 글들이여, 거기 지옥에서 오래오래 소멸하라. 나는 이미 다른 글을 쓰고 있다. 2022년 11월 먹실골 우거에서 오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