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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자의 시간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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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소설을 쓸 때면 바람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풍선을 먼저 떠올린다. 쪼그라든 풍선은 매력적이지 않으므로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풍선이 놓인 고도의 대기압을 이기고 풍선의 탄력을 능가할 내압이 발생할 만큼 많은 기체를 불어넣어야 한다. 그런데 소설이라는 이름의 풍선은 어느 정도 부풀다가 현실의 그것과 다르게 움직인다. 현실에서 일정량 이상의 기체가 들어간 풍선은 알아서 내압을 분배한다. 반면에 소설의 내압은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가지 않는다. 온갖 구성 요소를 주도면밀하게 구석구석 밀어 넣어야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만들어진다.SF와 판타지의 경우 풍선을 만드는 자와 대기압의 싸움이 더 치열하다. 작품 속 세계 전부, 또는 상당 부분을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 속 세계란 결국 작품에 전반적으로 내포된 존재와 움직임의 규칙 모음이다. 이 규칙을 편의상 작품의 ‘내규’라고 하자. 작품 속 세계, 그러니까 작품의 내규는 물리나 기술이나 생태계일 수도 있고, 제도나 이념이나 권력의 먹이사슬이나 상황이나 거대한 편견 덩어리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특이점에 도달한 인공지능이 존재하는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는 서로 다른 내규를 갖는다. 작가는 독자가 현실에서 겪어봤거나 겪고 있는 세상의 내규를 거의 그대로 소설에 도입할 수도 있고, 이질적이거나 새로운 내규를 제시할 수도 있다. SF와 판타지는 후자에 무게를 더 싣는 장르이다. 현실이라는 든든한 조력자와 일부러 거리를 두고 새로 만들어가는 내규는 이가 빠진 톱니바퀴들을 이어서 만든 기계와 같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의심과 회의의 대기압 때문에 쪼그라들지 않도록, 작가는 불필요한 부분을 가리고 필요한 부분에 정성을 들여 풍선이 고루 부풀도록 안간힘을 써야 한다.그리고 인물과 사건은 세계와 분리될 수 없다. 다른 세계 사람은 달리 생각하고 다른 일을 벌일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와 공통점을 가질 수도 있다. 독자가 낯설다고 밀어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품어 호응할 만큼 다르면서 또 같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작가가 SF와 판타지를 쓰고 있을 것이다. 다른 작가들의 속내를 짐작하는 게 오만한 일이라면, 적어도 이 책에 담긴 글들은 그런 생각으로 노력한 한 작가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2023년 1월, 김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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