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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예들
심아진
20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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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D-12

증명할 수 없는 세계
로마의 자비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꿈과 신화

D-11

영웅과 후예들
신뢰로 보답하는
무가치한 사냥
떠나야 할 때

D-10

채찍의 행보
분홍빛 인생
만만찮은 대결

D-9

홀로 누워 자는 사람들
엄마라는 사람
폐허의 잔상
머르기트 섬의 산책

D-8

달의 친구, 별의 연인
너는 너다
나만 생각할 거야, 나만
용감하고 뻔뻔한 선택

D-7

구야쉬 수프
눈썹뼈를 지켜내는 시간
라이크스 미술관에서

D-6

편두
감춰진 시간
두통
삶에 대한 예의

D-5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
무당의 집
뒤늦게 알게 되는
생존의 방식

D-4

들끓는 자들
메꾸지 못할 구멍
진짜 여행자처럼
아름답고 푸른 두나강

D-3

단조로운 노래, 단순한 춤
끊어버리지 않고는 풀 수 없는
쉽지 않은 만남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D-2

귀한 부패
혼란
단순하지 않은 가출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시간

D-1

지우개 가루 눈물
이게 아닌데
나는 나다

D-0

두 세상의 힘겨루기
‘혼자’를 추슬러

해설 고종석
투란의 추억, 또는 움직이는 영혼을 위한 송가

작가의 말
내 마음에 드는 ‘나’

저자 소개 1

1999년 중편소설 「차 마시는 시간을 위하여」(『21세기문학』)로 등단. 소설집으로 『숨을 쉬다』 『그만, 뛰어내리다』 『여우』 『무관심 연습』, 장편소설로 『어쩌면, 진심입니다』 『후예들』 이 있다. 소설집 『신의 한 수』로 2022년 김용익소설문학상, 2023년 제1회 백릉 채만식문학상을 수상했다. 2020년 ‘심순’이란 이름으로 동화 「가벼운 인사」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비밀의 무게』로 창비 좋은어린이책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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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9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16쪽 | 135*200*30mm
ISBN13
9791160201901

책 속으로

그들은 생에 예의를 갖추지도 않고 배려심이 깊지도 않은 채찍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개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그저 어떤 종류의 채찍이냐 하는 것뿐. 아홉 가닥 채찍이라 해서 덜 아픈 게 아니고 서른아홉 가닥 채찍이라 해서 더 아픈 게 아니었다. (…) 채찍의 끝에 날카로운 뼛조각이 달렸든 가시, 쇳조각, 쇠구슬이 달렸든, 임계점을 벗어난 고통의 소리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 p.12

여자는 지나치게 건조해 보였다. 어설프게 살아 있느니 차라리 바싹 말라 죽어버리고 말겠다며 꼿꼿하게 수분을 빼고 있는 드라이플라워 같았다. 효령은 사진을 들고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치매가 오고서도 엄마는 속마음을 열지 않았다. 아니, 치매가 왔으니 더 어찌할 수가 없는 건가. 효령이 사진 속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엄마는 딴청을 피웠다. 마치 징그러운 그리마라도 본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다가 곧 건강할 때처럼 푸닥거리라도 할 태세로 자신의 방울을 찾아 헤맸다. 효령이 부르짖었다. “날 위해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뭔가를 할 수 없어? 제발 딱 한 번만이라도…….” 하지만 엄마는 눈을 꼭 감은 채, 여전히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찾지 못할 방울을 맹렬히 흔들어댔을 뿐이다.
--- p.42

아이의 인생이 펜의 분홍색처럼 곱게 빛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다 해도 대신 그 이해로 인해 무언가를 잃는 일 없이, 그저 주어지는 것은 기꺼이 누리되 가질 수 없는 것은 조금만 애태우면서, 가만히 살아가면 좋겠다. 자기를 파괴하고 주변을 망치고서야 이르게 되는 헤아림이 있다면, 그 헤아림이 어떤 경지든 효령은 윤지가 그것을 향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무모하게 도전하기보다 안전하게 포기하게 할 것이다. 실쌈스레 타협하도록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윤지가 부득이 생의 채찍을 맞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효령은 기꺼이 몸을 던져 대신 채찍을 맞을 것이다. 좌절의 채찍이든 배신의 채찍이든 실연의 채찍이든, 그 어떤 채찍이라 해도 아이의 무고한 피부에 상처 내지 못하게 하리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하리라.
--- p.70

남자는 쓰러져 있기보다 해야 할 일을 찾아 일어서는 귀연이 대견하다. 한편, 그녀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인 당사자가 자신일지 몰라 미안하다. 남자가 부다페스트에 도착하고 서도 내내 거리를 두다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건, 관광이 지겨워져서거나 혼자 있는 게 외로워져서가 아니다. 진짜로 귀연에게 살짝 미안해져서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나다.
--- p.101

나만 생각하고 살 거야, 나만. 스물두 살에 한국을 떠나면서 귀연이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다. 쉽지 않았다. 매몰차게 자신만을 바라보기로 작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타인에게 눈을 돌렸으며, 그 때문에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고단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자신만 생각하며 살겠다고 이를 악물었지만, 번번이 그 결심이 실수인 척, 우연인 척 느슨한 틈을 찾아 빠져나갔다. (…) 나만 생각하고 살 거야, 나만. 귀연에게 그 ‘나만’은 언제나 그림을 의미했다. 그림은 귀연의 모든 감각이었고 신체였으며, 영혼 자체였다. 죽음과만 맞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삶이었다.
--- p.120~121

가자, 계속 산책하는 거야. 요세핀이 검은 앵클부츠를 성큼 내밀며 걷기 시작하자, 마태도 난도도 씨엉씨엉 따라나선다. 음악에 따라 춤을 추는 물 분수의 하얀 날개가 세상을 관조하며 퍼덕이고 있다. 지나치게 초록인 나뭇잎도, 너무 부드러운 풀잎도, 심하게 단단한 자갈들도 모두 빛난다. 요컨대, 햇빛 아래 반짝이지 않는 것이 없다.
--- p.131

효령은 서랍 아래에서 여자의 사진을 발견한 이래, 부적이라도 되는 양 그걸 꺼내 보곤 했다. 배가 아픈지 고픈지 분간할 수 없었을 때, ‘장하다’는 말 뒤에 ‘징하다’는 의미를 감춰둔 친구와 헤어졌을 때, 내일을 이미 짓밟은 오늘이 영원히 반복되리라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상처를 자신을 학대해서라도 되갚고 싶었을 때 사진을 들여다보곤 했다. 기도를 하고 싶은 기분인지 저주를 퍼붓고 싶은 기분인지 스스로도 분간할 수 없었다.
--- p.165

내가 이미 그렇게 살고 있네. 대충 살지 그럼, 죽을 둥 살 둥 아등거리며 사나?
매일 밤 홀로 누워 주무시는 거는요? 그건 어때요? 너무 외롭잖아요. 들러붙어 사는 자들이나 외롭다고 투덜대지. 난 안 그래. 혼어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복숭아색으로 물드나 싶더니, 목소리 못잖게 젊어진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모두를 사랑할 수 있었고, 온전히 혼자여서 모두와 함께일 수 있었던 자의 얼굴. 내가 감탄하는 걸 눈치챈 합죽한 얼굴이 길게 웃는다. 나도 모르게 또 그녀를 따라 웃는다. 부럽습니다. 그래, 그래. 많이 부러워하게.
--- p.257

먼 훗날, 홀로여서 더 탄탄해진 사람들은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쓰윽, 한번 문지르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피부가 갈라지고, 고름이 쏟아지고, 때로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서도, 그렇게 많은 걸 잃고서도 여전히 남은 ‘혼자’를 추슬러 걸음을 옮겼다. 경계도 없고 한계도 없고 따라서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을,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의 자리를 향해서였다.

--- p.297

출판사 리뷰

“정착하지 않으려는 자유로운 영혼들에 대한 찬가”
“아름답게 홀로인” 후예들이 부단히 살아내는 삶에 대하여
“한국소설계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메타-메타 소설”(고종석·문학평론가)

‘혼어미’와 후예들의 신비한 관계, 이를 포착해 발화하는 존재의 의미
기존의 소설적 상상력의 범주-너머로 확장된 ‘새로운 소설’의 탄생,
‘소설의 자유’를 심화하고 확대한 ‘새 소설’!


1999년 중편「차 마시는 시간을 위하여」로 등단해 불가해한 삶의 면면을 유려하고도 고집스러운 문장으로 벼려내 온 작가 심아진의 두 번째 장편소설 『후예들』은 다채롭고 상징적인 이야기들을 담아낸다. ‘소설 속 소설가’가 집필해가는 소설을 이정표로 삼아 세 등장인물 효령, 귀연, 요세핀이 서로를 맞닥뜨리게 되는 날로 독자를 휘몰아가는 이 특이한 소설은 ‘메타-메타 픽션’, ‘메타적 화자’의 형식을 취해 독자로 하여금 서사의 안과 밖을 동시에 조망하게 한다. 즉 ‘메타-메타 픽션’, ‘메타적 화자’라는 형식은 단순히 소설가가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가 소설’이 아니라, 메타 작가가 여러 장면에 개입해 작중 인물과 관계를 맻거나 대화를 나누면서 그 경계의 모호함과 뒤섞임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영혼 중심에 존재하는 ‘혼어미’ 또한 화자로서, 인물들의 영혼을 매개하는 중개자로 등장한다. 소설 안 실재하는 혼어미는 “한때 우리의 어머니이고 누이이고 연인이며 스승이었”지만 현재는 그저 우리 주위의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 밖, 세 후예들의 영웅으로서, 메타-메타 픽션 속 실재하는 혼어미는 먼 옛날 영웅의 후예들을 대변하는 인물로, “‘모두의 어미’가 되기 위해 누구의 어미도 될 수 없”었던 선택받은 영웅이다. 그렇게 혼어미는 소설의 안과 밖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세 인물의 기둥처럼 존재한다. 자신을 버린 뿌리, 가족의 존재를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하는 양가감정을 지닌 효령의 앞에 수상한 노파로 나타나고, 헝가리에 가면 “아무에게나” 안부를 전해달라며 귀연과 요세핀의 존재를 냉연히 체화하고 있는 혼어미는 효령, 귀연, 요세핀이 서로를 만날 ‘그날’로 내달리는 모습을 마치 그들의 중심에 선 채 내려다보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또한 영웅의 후예들, 즉 혼어미와 세 인물을 『후예들』 속에서 다시 소설로 그려내는 소설가 역시 그들 주위에 산재해 서사를 조망한다. 이렇듯 영웅들과 그 후예들의 신비한 관계와 이를 포착해 메타 화자의 입을 빌려 발화하는 존재들은 『후예들』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을 점거한다.

이처럼 소설 『후예들』은 ‘소설 양식’이 역사적으로 발생한 터전이자 ‘소설가 정신’의 근원인 ‘자유’의 정신에 바탕하여 오늘날 소설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상투성을 벗어던지는 한편 근대 소설의 양식적 한계성을 돌파한다. 이는 심아진의 ‘특이한 소설 정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로 인하여 독자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더 깊이 자극받고 더 높이 고양되는, 한국소설사에서 특별한 도전적 의미를 지닌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소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생에 한 번도 홀로이지 않은 적 없는 자가 생을 실어 부르는 노래”

“아름답게 홀로”이기 위해 짊어져야 하는 것들

“자신만을 사수한 채” “머무르지 않기 위해 기를 쓰는” 영웅과 그 후예들은 시간이 지나 그 세계가 투미해졌다. 모두의 어머니였던 이는 한낱 노파가 되어 “증명할 수 없는 세계에만 존재”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족의 울타리를 아끼면서도 그에 잠식된 효령과 끊임없이 홀로이려, 영웅의 후예들을 닮고 싶어 했지만 끝끝내 홀로이지 못했던 귀연, 아이러니하게도 영웅의 후예들을 가장 닮았지만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찾아들어 가는 그의 딸 요세핀까지 그들은 모두 일평생 홀로 아름다우려 했으나 현실에서 짊어진 짐으로 인해 각고의 고통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영웅의 후예라는 점은 변함없듯이, 그들은 결국 “아름답게 홀로”일 삶의 경계선을 지나고 있다. 요세핀을 한국으로 불러들이고도 자신의 딸 윤지와 남편 사이에 자신의 배다른 자매일지, 조카일지 모르는 요세핀을 어떻게 “끼워 넣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받아들이려는 세상과 외면하려는 세상”의 힘겨루기를 하는 효령은 투미해진 후예들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편 귀연은 효령과 같은 세대의 후예이나 쇠락해진 정체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그 집착으로 딸 요세핀을 잃어 불안해하면서도 끝없이 ‘나’를 되뇌는 혼란스러운 후예들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요세핀은 자유로운 후예들을 가장 닮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관계에 얽혀 새로운 세계를 향한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새 후예들의 정체성을 계승했지만 곧 폭발할 수도 있을, 가능성을 가장 많이 지닌 다음 세대로의 후예들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정착하지 않는 불완전한 생에 대한 근원적 이해

“자네는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게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나? 옛날처럼 먼지 풀풀 날리는 광야가 우리들의 자리인 줄 아나?” 어디에나,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하는 영웅들은 그들답게 끝끝내 홀로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광야에 빌딩이 들어섰고, 다리, 공원이 생겼다. 영웅과 그 후예들이 가지는 ‘제자리’의 의미가 퇴색됐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무 곳이나 다 ‘제자리’라는, “자리라는 게 그렇게 눈에 딱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혼어미의 말을 따라 영웅과 그 후예들은 한평생 끊임없이 부유하면서 정착하지 않는 후예들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혹독한 과정을 거치고도 살아남은 후예들이 여전히 달리고 있다.”는 『후예들』 속 소설의 문장처럼, “그렇게 많은 걸 잃고서도 여전히 남은 ‘혼자’를 추슬러 걸음을 옮”기는 후예들이 향하는 마지막 지대는 결국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의 자리”일 것이다.

“요세핀이 검은 앵클부츠를 성큼 내밀며 걷기 시작하자, 마태도 난도도 씨엉씨엉 따라나선다. 음악에 따라 춤을 추는 물 분수의 하얀 날개가 세상을 관조하며 퍼덕이고 있다. 지나치게 초록인 나뭇잎도, 너무 부드러운 풀잎도, 심하게 단단한 자갈들도 모두 빛난다. 요컨대, 햇빛 아래 반짝이지 않는 것이 없다.”

옳다. 거기 더해, 반짝이는 것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 『후예들』은 정신적 자유와 독립을 지닌 영웅과 그 후예들의 옹호로 반짝이고 반짝이고 반짝인다.
―고종석·문학평론가, 작품 해설 「투란의 추억, 또는 움직이는 영혼을 위한 송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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