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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부. 봉수아, 통영 왕벚꽃 용화사 피아노 세병관 호사 시장 섬 터널 다정함 고양이 나의 손 잃어버린 시간 2부. 봉수아, 봉수아 무용이 ‘벽지5겹’ 실화입니까 곰팡이 봉수아 선물 전환 술꾼 생활 바보 두 번째 짓기 귀를 기울이면 서원 에필로그 가장 사적인 통영 사진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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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기 나는 일도 생활도 불안정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둥둥 떠서 살았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는 너무 이상적이었고, 그에 비해 내 생활은 너무 현실적이었다. 그 사이를 조율하지 못해 갈대처럼 이리저리 휘어졌다. 어느 때는 대학원에 가고 싶다가 어느 때는 정규직이 되고 싶다가 어느 때는 은둔자로 살아가고 싶었다. 이루고 싶은 건 많았지만 그것을 성취할 근력이 부족했다.
---「프롤로그」중에서 새롭게 깨달은 한 가지. 자연을 바라보면 내 마음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일과 생활에 쫓겨 살면 몸의 감각이 둔해지는데 자연으로 들어가면 주눅 든 마음의 근육이 기운을 찾는 듯하다. 마음 근육이 유연해지면 옆 사람에게 다정해지고, 나 자신에게도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프롤로그」중에서 나의 서원은 긴장을 푸는 것이다. 빳빳한 어깨를 풀고 생각을 멈추고 잘 먹고 잘 자기. 내가 제일 못하는 것들을 이곳에서 하고 싶다. ---「용화사」중에서 정해 놓은 일을 못 하고 의지 잃은 사람처럼 늘어져 있는 데도 이유가 있을 거다. 할 일이 많은데 몸이 말을 안 듣고 마냥 게으름을 피우거나, 잘 만큼 잤는데도 한없이 졸리거나, 약속이 있는데 씻기 싫거나. 의지와 상태가 제각각일 때 자책하기보다 이해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린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몸과 마음이 함께하지 않아 이 상황의 균형이 깨진 것이니 몸 쪽인지, 마음 쪽인지 살펴야 할 때라고 스스로 속삭인다. ---「세병관」중에서 과거의 일들은 제각기 치열하고 힘들고 어렵고 불편하고 아쉬웠는데 지나고 나면 흐릿하다. 그저 풍경이 되어 버린다. 여기 내가 앉아 있는 이 마루의 나무 감촉, 불어오는 바람, 툭툭 치며 지나가는 상념이 지금 내게 중요하게 와닿는 현재. 그러다 자리를 뜨면 이 세병관도 저 풍경으로 넘어가겠지. 그래서 드는 생각, 나의 현재를 여여하게 살아가고 싶다. ---「세병관」중에서 통영에서 으뜸가는 호사는 자연이다. 숲과 나무(동백림, 소나무, 편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남해의 파랗고 은갈치빛 나는 바다, 섬들과 공원들(이순신공원, 달맞이공원의 풍광은 정말 근사하다.), 해안을 끼고 보는 아침해와 저녁해. 걷거나 차를 타서 바라보는 이 모든 자연이 내 마음에 깃든 헛헛함을 쓸어 준다. ---「호사」중에서 행복한 것보다 좋은 게 좋다. 행복은 부담스럽다. 행복하면 그 행복을 지켜야 하고, 지키지 못하면 불행해질 것 같아 불안해진다. 행복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노력으로 쟁취하는 무엇인 것만 같다. 좋은 건 감당이 된다. 좋으면 좋아서 좋다 말하고 좋다 말하면 더 좋아진다. 그래서 행복할 때보다 좋을 때 더 잘 쉬는 것 같다. 좋은 건 행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것, 편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것, 가진 게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한 것, 만족스럽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한 것 같다. 행복이 꽉 들어차면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좋으면 좋은 것 사이로, 그 결핍으로 숨을 쉬게 된다. (…) 내 마음과 몸에 알맞은 현실을 내가 찾을 때 좋다는 기분을 느낀다. 나는 행복한 상태보다 불안하지 않은 상태를 더 갈구한다. ---「섬」중에서 부동산을 나서며 사수가 잘 샀다고 다독였지만 얼떨떨했다. 누군가 이 집을 왜 샀느냐고 물으면 나무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했으니까. 나무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어요. 나무가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어요. 주변을 봐도 나 같은 이유로 집을 사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무용이」중에서 뭔 짓을 한 거지. 집에서 네 시간이나 떨어진 남쪽에, 있는 돈으로도 모자라 대출까지 받아 이 아파트를 사다니. 우리는 넉넉하지 않다. 지금 사는 빌라도 대출이 적지 않아 빚을 갚아야 할 판에 말이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걱정은커녕 뿌듯했다. 잘한 거 같았다. 일단 이 돈은 생전 처음 나를 위해 썼다. 빚을 갚은 것도 아니고 억울하지도 않게 돈을 썼다. 먼 곳 바닷가 마을에 나만을 위한 공간이 생겼다. 설렌다. 이십 대 때부터 가져 보고 싶었던 나만의 집. 시간이 허락하면 언제든 내려가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얼마나 바랐나. ---「무용이」중에서 잎갈나무. 일명 낙엽송(낙엽이 지는 소나무라는 뜻)이다. 원산지는 일본. 일제강점기 때는 가로수로도 쓰고, 기차 선로로도 쓸 만큼 쓰임이 많은 나무였는데 지금은 쓸모가 없어진 나무라고, 그래서 대부분 베이고 사라진 나무란다. 우리는 낙엽송에게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다. 무용(無用). 쓸모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쓸모가 있다. 무용의 유용(有用). 줄여서 무용이다. 그렇게 낙엽송 삼형제 이름은 무용이가 되었다. 통영에 내려가면 제일 먼저 발코니로 가서 무용이에게 인사를 건넨다. 무용아, 잘 지냈니? 별일 없었니? 형제끼리 싸우진 않았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어른 무용이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무용이」중에서 일을 맡으면 완성까지의 단계를 짚으며 새벽에도 일하고 점심 거르고 일하고 경조사 때도 일하고 어느 때는 꿈속에서도 일했다. 일만 하다 보면 일하는 몸으로 변한다. 일에 몰두해 밥을 거르고 졸음이 와도 참고 일하거나 피로가 쌓이는데 휴식하지 않으면, 일하는 몸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하게 된다. 일하는 몸은 일에만 최적화되어 나머지 기능을 거부한다. 그러면 낮에도 밤에도 졸리고 기력이 없다 우울해진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일하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엄살 같지만 사십 대의 몸은 그런 신호를 준다. ---「생활 바보」중에서 지난 시간 나는 결핍을 감추거나 채우는 데 공을 들였다. 가까운 이보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 나보다 남에게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했다. 지식을 채우는 데 급급해 지혜를 느끼는 데 소홀했다. 귀를 열고 눈을 열어 자연과 시간의 변화를 감각하는 데 인색했다. (…) ‘나는 춤출 때 춤을 추고, 잠잘 때 잠을 잔다.’ 몽테뉴가 한 이 말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다. 이 말은 지금을, 현재를 살자는 의미 같다.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살자. ---「생활 바보」중에서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놀자. 몽테뉴처럼! 주방을 치우지 않고 밥을 해 먹어도 된다. 모든 관계에 종종걸음으로 쫓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할 테고 싫어할 사람은 나를 싫어한다. 내가 죽어라 애써도 안 되는 게 많은 것도 알겠다. 아, 나도 생활 바보를 면하고 싶다. 몸과 마음을 같이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제일 중요한 것!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더라도 나를 괴롭히지 말자. 건강한 삶을 포기하지 말자. 오늘 못 하면 내일 하면 된다. 어제만 삶이 아니고 오늘도 삶이고 내일도 삶임을 잊지 말자. ---「생활 바보」중에서 전영애 선생님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긴 세월 자신의 열정과 노동을 아낌없이 바치며 괴테 마을을 짓고 있다. 여백의 서원(誓願)이 서원(書院)에 와서 머물며 자연을 느끼고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예술을 아낌없이 누리라는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이타심이다. 이게 가능할까. “살아 보니까 바르게 살아도 괜찮아요. 손해 보지 않아요.”라고 하신다. ---「서원」중에서 애초 이 책을 쓸 때와 지금 달라진 게 있다. 우울감이 올 때 이건 지금 온 한 번의 우울이라고 여기고, 무기력함을 느낄 때 이것도 지금 온 한 번의 무기력이라고 여긴다. 한 번의 우울은 모든 우울이 아니고 한 번의 무기력은 모든 무기력이 아니다. 그건 엄연히 다르다. 무게도 다르고 깊이도 다르다. 오늘의 우울, 오늘의 무기력이니 반갑지 않은 그 손님을 어떻게 설득해서 내 집에서 내보낼지 궁리하면 된다. (…) 전에는 우울이 오면 이전의 우울, 지금의 우울, 앞으로 올 우울을 걱정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자책과 무기력과 불안에 사로잡혀 그것을 일시적으로 피하게 해 줄 자극적인 것을 찾아 바깥을 배회했다. 지금은 이런 감정이 올 때 내가 잠시 쉬어야 할 때임을,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멈춰야 할 때임을 받아들인다. 잠시 쉬어도 된다. 내려놓아도 된다. ---「에필로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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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이 책은 그리운 누군가에게 손을 흔드는 이야기다.”
입맛을 돋우고 마음을 채워주는 음식과 예술, 고요하게 오롯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곳… 통영. 지치고 힘들 때, 저자는 통영을 떠올립니다. 도시에서 짙게 쌓인 피로를 푸는 가장 현명한 치유법은 자연이라서 그렇습니다. 나무와 숲, 은갈치빛 바다, 소박하게 흘러가는 통영의 일상이 긴장을 풀어주고 식욕을 일으킵니다. 책 속 등장하는 통영의 음식들에 절로 군침이 돕니다. 온갖 해산물로 국물을 낸 서호시장의 개운한 시락국, 만재도에서 돌아갈 배를 기다리며 먹은 해물라면과 파전, 숙취를 씻어 주는 맑은 국물의 사량도 해물짬뽕까지. 그뿐 아닙니다. ‘제2의 집’ 봉수아가 있는 마을 봉숫골에도 바다를 듬뿍 담은 음식들이 가득해요. 신선도 100퍼센트의 에비텐동, 싱싱한 갈치조림에 산양막걸리, 관광객보단 주민들이 많이 찾는 북신시장에서 마주한 광어회와 오징어회, 바다를 보며 긴장을 내려놓고 마시는 맑은 술 한 잔까지. 무엇보다 입맛, 술맛, 살아갈 맛 돋우는 최고의 찬은 통영의 푸른 바다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배를 채웠다면 이제 마음의 허기를 채워야겠죠. 긴장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만드는 곳, 통영입니다. 저자는 어느 날은 절 용화사에 들러, 그곳에 펼쳐지는 바다 절경을 누립니다. 용화사를 배경으로 박경리 작가가 쓴 소설을 곱씹어보기도 하고요. 또 어떤 날은 관아로 쓰였던 세병관에 들러 그 나무 마루에 앉습니다. 하염없이 멍하니 산과 바다를 바라보며 “굳이 뭘 보태지 않아도 될 만큼” 느긋해지는 법을 배웁니다. 통영에서 제일 “으뜸가는 호사”인 자연 속을 마음껏 거닐었다면, 다음은 그 속에서 예술을 남긴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시간입니다. 전혁림과 박경리, 김춘수, 윤이상, 이중섭…… 통영엔 그들의 기념관, 생가, 미술관 등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할 예술이 가득합니다. 『나의 손이 내게 말했다』는 관광 책자나 검색 포털에선 만날 수 없는 한 사람의 통영 여행기입니다. 머리로만 살던 ‘생활 바보’가 몸과 마음의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워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자존감을 잃어버린 내면 아이가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과정의 기록입니다. 조금 늦게 ‘사는 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편지 같은 글입니다. 크고 작은 실패로 힘겨워하는 누군가에게, 아픈 시기를 견디는 이들에게 나도 그렇다고 내미는 손길입니다. 한마디로 이 책은 그리운 누군가에게 손을 흔드는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눈으로 통영을 읽게 되면, 여러분도 통영이 금세 좋아질 거예요. 통영의 오래된 동네 골목을 거닐며 내 조급함의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나에게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바다와 편백숲, 자연을 눈에 담고서 걷고 또 걸으며 마음에 쉼표를 새기고 싶어집니다. 우리, 언젠가, 통영에서 만납시다. 〈‘가장 사적인 한국 여행’ 시리즈〉 ‘가장 사적인 한국 여행’ 시리즈는 누군가의 개인적 시선이 보여주는 지역의 재미와 의미를 찾아 나섭니다. 첫 번째 이야기, ‘경북 울진’을 담아낸 노나리 에세이 『내게도 돌아갈 곳이 생겼다』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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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차오르는 줄도 모르고 지내다, 숨구멍을 찾고서야 비로소 그간의 삶을 돌아볼 때가 있다. 작가에게는 통영과 ‘봉수아’라는 이름의 집이 숨구멍이 되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거짓말처럼 통영의 햇살과 바다, 벚꽃과 골목들이 나의 시간으로 여여히 스며든다. 그러니 이 책이 내게도 숨구멍을 틔워 준 셈이다. 바삐 사느라 오래 못 본 친구에게 건네고 싶은 글들. 다정하고 아름답다. - 김하나 (작가, 팟캐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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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사람들에게 종종 서울을 떠나 바닷가 마을에서 살면 어떨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십 대 초반의 언젠가는 꼭 서울에 자리 잡고 싶었는데, 삼십 대 초반의 언젠가부터는 서울을 떠날 확률을 점쳐 보는 것에 대해, 그 시간만큼 달라진 나에 대해 생각한다. 정화가 요가 선생님에게서, 스님에게서 들었던 말을 나는 정화로부터 듣는다. ‘그런 생각을 하는 너를 봐.’ 정화는 자신이 늦었다고 얘기하지만, 언제나 나보다 먼저 가는 사람 같다. 나는 정화의 글을 만나기 이전부터 정화의 말에 영향을 받아 왔다. 언젠가 그가 ‘다자이 오사무, 다시 읽으면 정말 좋다.’ 건넨 말 덕에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들을 다시 읽었다. 신중하고 정갈한 정화의 코멘트에는 힘이 있어서, 좋다고만 생각하고 미루고 있던 것들을 새로이 보게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그랬다. 정화의 손이 내게 말해 주는 이름을 따라 읽어야 해서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동시에 바빠졌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생텍쥐페리, 몽테뉴와 카프카. 정화가 건네준 이름들은 적기에 나에게 올 것이다. 나는 정화가 책과 작가만 추천해 줄 줄 알았는데, 내가 상상만 했던 삶의 방식까지 추천해 줄 줄은 몰랐다. 시간이 지나 내가 정말로 바닷가 마을에 살기로 결심하게 된다면, 내 등을 밀어 준 손들 중 정화의 글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 김화진 (편집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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