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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프롤로그 1부 십 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난 2부 그림이 그림이 아닐 때 3부 밀약서의 비밀 4부 연애편지는 없었다 에필로그 세조대왕 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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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입구 담벼락에 엉켜 있는 수세미 넝쿨을 보며 나영은 꿈속의 한 소녀를 떠올렸다. 나무나 풀이나 꽃처럼 말을 할 줄 모르는 것들과 말하기를 좋아하던 덕중이었다. 그래서 덕중은 어려서부터 식물들이 어떤 효력을 지녔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 듯하다. ... 집안사람들은 덕중이 키운 식물들을 구경하는 것을 즐거워했고, 덕중이 키운 야채와 과일을 먹기 위해 날짜를 세며 기다리곤 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덕중의 정원’이라고 불렀다.
---「프롤로그」중에서 그들은 그제야 임영대군과 귀성군이 아침부터 입궐한 것이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했다. 궐 안의 여인이 궐 밖 귀성군에게 연서를 보냈다는 이야기에 임금도 금방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얼음같은 침묵이 흘렀다. “궐 안의 여인이라면, 그것이 누구란 말이냐? 정확하게 이름을 말해 보거라.” “덕, 덕…… 덕중입니다.” ---「1부 십 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난」중에서 임영대군은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빠르게 정리했다. ... 귀성군! 준아! 이 애비가 혼란스러운 단 한 가지는 정말 그 편지가 연서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준은 왜 그것을 뜯어보지도 않고 왕 앞에서 갑자기 연서라고 말한 것일까. ---「1부. 십 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난」중에서 소용 박씨의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상전하, 알고 계시는지요? 주상전하께서 형제의 가족을 처형하실 때마다 그 응보처럼 전하의 가족이 죽어 나갔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소첩을 죽이시면 응보처럼 또 다른 한 사람이 죽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소첩이 전하의 가족이면 형제의 측근이 죽어 나갈 것이고, 소첩이 형제의 가족이면 전하의 측근이 죽어 나갈 것입니다.” ---「1부. 십 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난」중에서 “백팔장!” 덕중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저절로 터져 나온 말이었다. 감추고자 깊이 닫아두었으나, 비밀 스스로 발효하고 팽창하여 뚜껑을 열고 나온 말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이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 뱉어내고 나니, 마치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느낌이었다. ---「1부. 십 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난」중에서 훈민정음 세종어지에 명백히 ‘스물 여덟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굳이 최만리 상소문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고, 단지 현왕께서 훈민정음 자음을 줄이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니, 학문적인 관점으로 차근차근 살펴보라고 했다. 문제가 되는 자음은 ㆆ와 ㅎ인 모양인데,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 두 발음이 혼동되기도 하고 같이 발음되기도 했다. 백성들이 사용하기 더 편해지려면 어떤 자음을 줄여야 할지, 신중히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2부 그림이 그림이 아닐 때」중에서 “네년이 가지고 온 뽕잎의 바늘구멍에 쓰인 글자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뽕나무를 상목이라고 하지 않더냐. 뽕나무 상(桑) 자를 쓰는데, 약자로 쓰면 나무 목(木)과 세 개의 열십(十) 자로 나타낸다. 즉 木과 세 개의 十를 합치면(十十十十八) 마흔여덟이 된다. 그래서 마흔여덟 된 자를 상년(桑年)이라고 한다. 아래 뽕나무 잎사귀 바늘구멍은 木에 十이 아홉 개 합쳐졌으니 얼마가 되느냐. 바로 백팔이 되지 않느냐.” ---「2부. 그림이 그림이 아닐 때」중에서 두 사람은 해가 져서 점점 그림의 색깔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안견이 떠나는 뒷모습을 신숙주는 길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를 대하는 자신의 마음이나 그림을 대하는 안견의 마음 수준이 같은 것을 보고, 여태 그를 화공으로 얕잡아보았던 자신의 옹졸함이 느껴져서였다. ---「3부 밀약서의 비밀」중에서 『월인석보』는 운문으로 된 『월인천강지곡』이 먼저 나오고, 그 내용에 일치하는 산문으로 된 『석보상절』이 뒤이어 나오기 때문에 단락마다 내용상으로 연관이 있어, 아무데서나 자를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유독 1권은 108면에서 뚝 끊고 막아버려서, 2권의 첫 장에서 끝맺지 못한 『석보상절』로 시작되는 것이 이상하다 했다. 나머지 권들의 첫 장은 모두 『월인천강지곡』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방비리의 말을 들으며, 김상선의 눈빛이 반짝였다. “상선 어른, ‘摠一百八張’이라는 표기 속에서, ‘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4부 연애편지는 없었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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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문학상 수상작가 김다은의 역작
『덕중의 정원』은 원래 작가가 준비에만 2년, 다시 집필에 꼬박 1년이 넘게 걸린 500페이지 가까운 소설로, 2010년 도서출판 ‘생각의나무’에서 출간한 『모반의 연애편지』를 완전히 새롭게 각색했다. 당시 이 책은 훈민정음 언해본을 다룬 대표 소설로 등재됐고,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도 선정됐다. 또 초판 출간 때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본문을 통틀어 총 84통의 서찰로만 진행되는 서간체 소설이었지만, 이번 『덕중의 정원』에서는 꼭 필요한 24통의 편지만 남기고, 나머지는 독자들이 훨씬 읽기 편한 산문체로 구성했다. 소설 형식만 바꾼 게 아니라, 사건을 이끄는 중요한 단서를 더하면서 단순한 개정판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다시 태어났다. 10여년 세월 사이 작가의 의식 변화도 그대로 반영되어 한층 성숙한 작품이 탄생했다. 이미 예전의 『모반의 연애편지』를 읽어본 독자라면, 새롭게 태어난 『덕중의 정원』과의 차이를 찾아보는 재미 역시 쏠쏠할 것이다. 저자의 말 책도 타고난 운명이 있는 것일까. 이 책은 본래 준비 기간 2년, 쓰는 데만 꼬박 1년이 넘게 걸린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이었다. 특히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와 본문을 통틀어 총 84통의 서찰로만 이어지도록 매우 심혈을 기울였고, 필자가 좋아하는 서간체 소설로써 자리매김하기를 바랐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좋은 책을 많이 만들던 도서출판 ‘생각의 나무’가 부도가 나면서, 출간된 지 1년여 만에 판매가 중지되어 인세는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 책에 쏟아부었던 열정과 노력의 무상함에 마음을 다쳤는지 다른 출판사를 찾아 재출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후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우연히 만난 한 독자가 불평하기를 훈민정음 언해본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한 위키 사이트에서 『모반의 연애편지』가 훈민정음 언해본을 다룬 대표적인 소설로 등재된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을 구할 수가 없다고 어떻게 된 것이냐고 따졌다. 당시 그 소설은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돼 큰 도서관들에는 들어갔으나, 일반 대중에게 전달될 시간은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강력하고 인상적인 독자의 항의를 계기로 10여 년 만에 개정판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이전의 『모반의 연애편지』는 소용 박씨가 귀성군에게 보낸 한 통의 연애편지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은 내용이 역사의 기록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도리어 귀성군이 소용 박씨에게 전한 한 통의 서찰이 십 년 만에 깨어나서 우연의 덫과 정치적인 계략의 회오리를 몰고 온다. 역사를 픽션으로 가공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기록의 빈틈을 보게 된 것이다. 특히 훈민정음이라는 언어의 정원에서 정치와 연애가 만날 때 어떻게 서로 사맛디 혹은 사맛디 아니하는지를 보여주게 되었다. 형식에서도 이전 소설과 달리, 꼭 필요한 경우에만 서간체로 살리고 나머지는 일반 소설처럼 기술하여 독자들이 읽기에 더 편해졌다. 이처럼 소설의 형식과 내용이 달라지니 단순한 개정판이 아니라 온전한 개정판이 되었다. 같은 이야기가 이렇게 달라지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시간과 함께 역사에 대한 필자의 의식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죽은 책을 살린 개정판이 아니라, 역사와 문학을 이전과 다르게 인식한 작가적 성장 과정의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흔히 개정판을 낼 때는 이전의 서문을 같이 넣는 것이 관례이지만, 이 소설은 너무 달라진 내용으로 기존 서문은 도리어 잘못된 전언을 줄 여지가 있어서 제거하기로 하였다. 흔히 같은 역사적 모티브를 여러 작가가 다르게 써내는 경우가 있지만, 한 작가가 같은 역사적 모티브를 전혀 다르게 썼으니 이 또한 실험소설이 아닌가 싶다. 한편, 이 소설에서 ‘訓훈 民민 正정 音음’이라고 표기한 것은 훈민정음 원본인 한문본이 아니라 훈민정음 언해본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표현할 때 ‘번역’이라고 사용하고, ‘언해’는 주로 한문을 국어로 바꾸어 표현할 때 사용한다. 그런데 세종 당시 간행되었으리라고 추정하는 훈민정음 언해본은 현재 찾아볼 수 없기에 소설에서는 이를 훈민정음 언해본 원본이라고 표현하였고,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언해본으로 세조 때 발간된 『월인석보』 1권에 들어있는 것을 소설 소재로 사용하였다. 십 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이 소설의 운명을 독자들도 함께 지켜봐 주길 바란다. 서울 떠나 정선군 아우라지에서 퇴고하고 2023. 7.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