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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데가 있어서요 (리커버)
이택민
책편사 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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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 서문: 당부의 말

- 1부 갈 데가 있어서요

우리는 모른 채 / 미지근한 심장은 언제쯤 / 같은 날, 다른 공간 / 죽음과 가장 가까운 맛 / 마른 사과 / 돼지고기 김치찌개 / 향으로 지르는 비명 / 얼마나 많은 힘을 주어야 하는 것이냐고 / 괜찮아, 다음 버스 타면 돼 / Texel Island / 기억이 저장되는 방식 / 흙길을 자처하는 여행가 / 택시 안에서의 묘한 기류 / 갈 데가 있어서요

- 2부 감정의 모행성

투박하게 단어를 썰어갈 뿐 / 장마가 오는 사이 / 무뎌지지 않도록 / 미완 / 어떤 계절을 살아가는 걸까 / 눈 / 밑 빠진 고독 / 혼자만의 철학 / 팔짱 낀 사람 / 추억이 나를 감는다 / 완주만큼 소중한 것 / 감정의 모행성 방백 / 생일 / 부스러기 / 틈이 많은 사람 / 나는 내가 어렵고 가을은 가을이 쉽다

- 3부 우린 국경선을 밟지 않고 국경을 넘었다

모기향 / 깡통을 타고 날으며 2 / 야속한 여름 / 새벽을 거닐다 / 헬싱키나 탈린 같은 곳으로 / 섬은 지구가 만들고 언덕은 바람이 만들었다 / 어깨를 툭 치는 / 부스 안 사람들 / 한 나라에서 한 나라로 / 오늘의 소란이 서른의 소란이 될 테니까 / 시처럼 음악처럼 / 마지막 페이지 / 우린 국경선을 밟지 않고 국경을 넘었다 / 어려울수록 펜을 쥐겠습니다

- 발문: 새벽길을 나서는 모든 그대에게

저자 소개 1

李澤珉

사색을 즐기지 않습니다. 매일 새벽 사색을 당합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과 불쑥 찾아온 마음을 글로 남기는 것을 즐겨합니다. 1인 출판사 〈책편사〉를 운영 중이며, 펴낸 책으로는 『고민 한 두름』 , 『불안 한 톳』, 『공허 한 거리』, 『첨벙하고 고요해지면서』, 『갈 데가 있어서요』, 『라이딩 모드』, 『혼술도감』, 『쓸모와 내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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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2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184쪽 | 120*188*20mm
ISBN13
9791197121623

책 속으로

기억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저장된다. 하나는 보고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당시의 기억 그대로 저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기억들이 자는 동안 머릿속에서 기억의 퍼즐을 맞추는 것이다. 전자는 강렬하고, 후자는 집요하다. 그래서 당신이 잠든 사이, 제 스스로 맞춰지는 퍼즐 조각에 의해 기존의 기억은 잠식되고 만다. 처음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조각된 기억으로 재배열되어 삶 속에 방치된다.
---「기억이 저장되는 방식」중에서

추억 위로 수북하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자 지난 여름의 끈적한 기운이 되살아났다. 필름 카메라는 이런 묘미가 있다.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은 쉽게 잊히는데 반해, 필름으로 담아낸 사진은 왠지 모르게 한 장 한 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따금 현상소를 찾아 혀를 길게 내밀고 있는 필름을 보면, 시간이란 게 흐르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수년 전의 내 모습과 오늘날의 내가 필름 한 줄에 함께 담겨 있다.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가 같은 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직선 위에 놓인 과거의 나를 만나기 위해, 미래의 나를 마주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필름을 감을 테다. 드르륵 드르륵, 추억이 나를 감는다.
---「추억이 나를 감는다」중에서

소박한 장면들이 모여 삶의 배경을 이룬다. 강렬한 추억은 유효 기간이 짧지만, 소박한 기억엔 유효 기간이 없다. 내일이라도 훌쩍 오이도나 소래포구 같은 곳으로 파란을 찾아 떠나볼까. 아니면 주말에 제천이나 단양 같은 곳으로 초록을 맡으러 가볼까. 어디라도 가서 하룻밤 머물다 오고 싶은 나날이다. 언제고 여행이 맘 편히 가능해진 날, 헬싱키나 탈린 같은 곳으로 가능한 한 멀리 떠나고 싶다.
---「헬싱키나 탈린 같은 곳으로」중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어 가든을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또한 웃음엔 국경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보다. 우리는 국경선을 밟지 않고 국경을 넘었다. 여행자는 여행자에게 위로를 받는다.
---「우린 국경선을 밟지 않고 국경을 넘었다」중에서

몸을 일으켜 미지근한 탕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늘어져 있다 밖으로 나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옷을 입는동안 살갗에 스치는 공기가 퍽 서늘했다. 카운터에 탈의실 키를 반납했다. 꾸겨 신은 신발을 고쳐 신고 있을때, 신발장 앞의 구두닦이 할아버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직 새벽이라 추울텐데, 어딜 그렇게 일찍 나가요.”
“아... 갈 데가 있어서요.”
어스름이 남아있는 새벽길을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자동차의 서치라이트가 무심하게 나를 스쳐 지나간다. 입김이 보였다 사라졌다 한다. 여명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낼 때쯤 도착한 도담삼봉. 이른 새벽 밖으로 몸을 내민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이미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삼봉 앞에 모여있다. 그들 또한 어디가냐는 가족의 물음에 갈 데가 있어, 라는 퉁명스러운 대답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일출을 어디로 담아 가려는 건지 삼각대를 줄지어 세워놓고, 사진 삼매경에 빠져있다. 몇 번 셔터를 누르고는 세 개의 봉우리처럼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까먹는 다. 허기진 배 때문인지, 친구들 생각이 나서인지 뒤에서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외로이 떠있는 바위하나처럼 자그마한 내 모습이 강가에 비쳤다. 머리 위로 천천히 볕이 내려앉았다.

---「갈 데가 있어서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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