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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컹하고 쫀득한 두려움
정영선 장편소설
정영선
낮은산 201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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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 소개

저자 : 정영선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중편 「평행의 아름다움」으로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소설집 『평행의 아름다움』, 장편소설 『실로 만든 달』, 『물의 시간』, 『부끄러움들』을 펴냈다. 부산소설문학상 부산작가상을 받았다. 부산 경남여고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글쓰기 동아리를 운영하다가, 지금은 경기도 안성의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 하나둘학교에 파견 나와 북한에서 온 청소년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가끔 글쓰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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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5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00쪽 | 296g | 153*210*20mm
ISBN13
9791155250167

책 속으로

엄마는 가끔이라고 했고 아빠는 자주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버리는 재활용품 통에는 늘 초록색 소주병이 서너 개씩 들어 있었다. 목이 긴 빈 소주병을 보면 꼭 그만큼 엄마의 마음에도 구멍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술은 엄마의 구멍을 채워 주는 게 아니라 구멍을 보여 주는 것이다.
--- p.41

핏덩어리처럼 붉은 것, 할머니는 그것이 심장이라고 했다. 거무튀튀하게 구멍이 나 있는 식물의 뿌리 같은 것은 허파라고 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져 있는 아기집도 있다. 할머니는 돼지국밥집 손녀이기 때문에 나도 알아야 한다는 듯이 그것들의 이름을 말했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나무의 이름을 외우듯 간, 허파, 심장, 아기집을 마음속으로 따라 했다. 그 이름들을 부를 때마다 내 몸의 간, 허파, 심장, 아기집이 움찔거렸다.
--- p.49

거리는 조용했다. 늙은 고양이가 아래위로 나를 훑어보고는 길을 건넜다. 아빠가 눈이 올까 봐 걱정하던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갔다. 날마다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 한 움큼씩 살이 찌고 문제 학생이 되고……. 내일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질지 모르겠다. 그 모든 변화를 견디고 있는 내가 낯설었다.
--- p.135

할머니는 숟가락이 국밥을 먹든 말든, 그까짓 것 먹어 봐야 얼마나 먹겠느냐는 듯 국 솥보다 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갈라진 뒤꿈치가 더 짙어진 것 같다. 아무리 봐도 나무뿌리 같다. 할머니가 입을 벌리고 자는 동안 씨앗 하나가 몸속으로 들어가 뿌리를 내린 건 아닐까. 조금만 있으면 나무뿌리가 할머니 몸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
--- p.136

“엄마는 아줌마랑 살고 싶어? 사람들이 알면 욕할 텐데.”
엄마가 못 알아들었다는 듯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동성애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결심이라도 한 듯 엄마의 검은 눈이 반짝거렸다.
“부끄럽지는 않아.”

--- p.180-181

출판사 리뷰

“위선자! 이때까지 당신이 한 말은 도대체 뭐야? 동성애를 이해한다며?”
엄마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해하는 것하고, 그 사람이 아내가 되는 경우는 달라. 나를 생각했다면, 아니지, 은수를 생각했다면 내가 물었을 때 부인했어야지.”(13쪽)
엄마는 동성애자였다. 어쩌면 지금도 그것을 숨기며 가정을 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분을 위장하고 있는 간첩처럼. 그로 인해 엄마 아빠는 이혼했다. 은수는 자신에게도 동성애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할머니 집에서 살게 된 은수는 내려지는 이삿짐을 보며 상념에 잠긴다. 낙서로 더럽혀진 책상, 조금 휘어진 책꽂이, 문고리가 뜯겨 나간 옷장 구석구석에 새겨진 흠들이 꼭 자기 몸에 새겨진 흠결 같다 여긴다.
“그 이유를 안 순간 엄마는 텅 빈 껍질이 되었다. 엄마와 함께했던 시간, 기억에서 악취가 풍겼다. 간첩하고 산 기분이었다.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정을 꾸린 여자, 나는 공범이 되기 싫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엄마를 비워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엄마에 대한 기억을 지울 때마다 내 몸 한쪽이 검거나 거무튀튀하게 변하는 느낌이었다.”(40쪽)
은수는 엄마에 대한 기억을 비워 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쉬울 리 없다. 아니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엄마라는 사람은 눈 코 귀 입처럼 자기 신체의 일부라고 여겼는데, 그 전부가 떨어져 나간 느낌일 테니까.
“모모니는 엄마의 애칭이었다. 엄마라는 말은 너무 흔해서 엄마를 엄마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모모니는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엄마였다. 그런데 이제 모모니는 없다. 그냥 엄마가 있을 뿐이다.”(57쪽)
마침내 은수는 엄마에게 묻는다. 참고 참았던 말을 꺼낸 것이다.
“그 아줌마랑 사니까 좋아?”
나는 뜨거운 침을 삼키고 물었다.
“으으 어 응.”
“엄마는 아줌마랑 살고 싶어? 사람들이 알면 욕할 텐데.”
엄마가 못 알아들었다는 듯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동성애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결심이라도 한 듯 엄마의 검은 눈이 반짝거렸다.
“부끄럽지는 않아.”(179-181쪽)
은수는 그 뒤로 어느 순간 엄마의 “부끄럽지는 않아”라는 말을 떠올린다. 엄마의 삶은 엄마의 삶대로 인정할 수도 있겠다 싶어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스스로도 변화해 가고 있음을 느낀다. 돼지국밥집에 살면서도 돼지국밥을 먹지 않던 은수가 이제는 그것을 먹는 것이다.
“멀미처럼 구역질이 났다. 휴지통에 쪼르르 달려가 뱉어 버릴까 하다가 꿀꺽 삼켰다. 할머니가 힐끔 돌아보았다. 나는 살코기 한 점을 다시 집어 입안에 넣었다. 이번에도 물컹하고 쫀득했다. 조금 냄새가 났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징그러웠을까?”(193쪽)

작가는 들고 있기도 놓을 수도 없는 얼음처럼, 차갑고 미끄러운 두려움을 지닌 사람들과 그런 기억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고 했다. 우리는 작중 주인공 은수에게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스스로를 긍정하고 나 아닌 다른 이들을 의미 있는 타자로 여기기 시작한 존재의 삶은 거기서부터 새로이 시작될 것임은 믿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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