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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학교 시절 소월과 백석 아오야마 학원으로 유학을 가다 일본에서의 문학수업 <조선일보>와의 인연 광화문의 3인방 실비 내리는 어느 날 시인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100부 한정판 시집 『사슴』 『사슴』은 문단에 던진 포탄 통영, 통영 진주에서 노래하고 술 마신 밤 함흥으로 떠나다 『사슴』을 보는 또 다른 눈 백석 시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 함흥에서 만난 자야 친구 신현중의 놀라운 배신 중일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최정희와 노천명과 모윤숙, 그리고 사슴 삐걱거리는 함흥 시절 뛰어난 《여성》지 편집자 화가 정현웅 나는 만주로 떠나련다 북방에서 권태와 환멸 측량도 문서도 싫증이 나고 흰 바람벽이 있어 압록강이 가까운 안둥 세관에서 시의 잠적 해방된 평양에서 38선을 넘지 않은 이유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전쟁과 번역 동화시의 발견 공격적인 아동문학 평론 학령 전 아동문학 논쟁에 휘말리다 살아남기 위하여 붉은 편지를 받들고 관평의 양을 키우다 평양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삼지연 스키장 취재기 남으로 보내는 편지 그리하여 사라진 이름 시인의 죽음 |
安度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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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스무 살 무렵, 백석의 시 「모닥불」이 처음 내게 왔다. 그때부터 그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사회과학적 열정과 기운이 문학을 견인하던 당시에 백석의 시는 내가 깃들일 거의 완전한 둥지였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집회에 참가해서 구호를 외치다가 돌아와 쉴 곳도 그 둥지였고, 잃어버린 시의 나침반을 찾아 헤맬 때 길을 가르쳐준 것도 그 둥지였다. _‘서문’에서
어린 백석은 수업시간에 경의선 열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의선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평양이 멀지 않았고, 10시간쯤 달리면 경성에 닿았다. 경부선으로 갈아타고 부산에 내리면 일본으로 가는 관부연락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도를 보면 바다 건너 일본이 지척이 아니었던가. 그것뿐만이 아니다. 북으로는 경의선의 종착지 신의주까지 달릴 수 있었고, 압록강만 건너면 드넓은 중국 대륙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경의선은 중국의 단동(안둥)에서 봉천까지 가는 단봉철도와 연결되어 바로 만주로 갈 수 있는 통로 구실을 하고 있었다. _본문 24쪽 백석은 외모만 ‘모던보이’가 아니었다. 일본 유학시절 습작기부터 그는 ‘가장 모던한 것’과 ‘가장 조선적인 것’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백석보다 앞선 주요한이나 정지용은 유학시절부터 일본어로 쓴 시를 발표했다. 그러나 백석은 단 한 편도 일본어로 된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모더니즘적인 시를 탐독하고 시론을 받아들였지만 조선 사람의 언어를 지키는 시인이고자 했다. _본문 51쪽 첫눈에 백석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가 박경련이었다. 그녀의 까만 머리는 가르마를 타 정갈하게 보였고, 갸름한 얼굴에는 두 눈이 유난히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말수가 적었다. 신현중이 좌중을 웃기려고 너스레를 떨면 가끔 입가로 살짝 웃음을 내비칠 뿐이었다. 그때의 헤프지 않은 미소는 백석의 가슴을 온통 뒤흔들었다. _본문 73쪽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백석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윤동주는 1936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니다가 이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가 되자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으로 전학을 갔다. 그는 문학소년으로 시를 가슴에 품고 장차 시인이 되는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의 책꽂이에는 김동환의 『국경의 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정지용의 『정지용시집』, 이은상의 『노산시조집』, 윤석중의 『윤석중 동요집』도 있었지만, 정작 읽고 싶은 『사슴』은 구할 수 없었다. _본문 136쪽 겨울방학을 앞두고 백석은 아버지가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12월에방학이 시작되면 지체 없이 경성으로 올라오라는 편지였다. 백석은 이사실을 자야에게 말했고, 자야는 아무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했다. “나 혼자 어떻게 경성을 간단 말이오” “왜요” “당신이 보고 싶어 미쳐버리면 어떡해? 경성역에 내렸다가 당신이 보고 싶으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함흥으로 돌아올지도 몰라.” _본문 168쪽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는 표현은 분명히 문장구조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충돌이거나 모순이다. 가히 연애의 달인답다. 여기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첫눈이 내리는 날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백석 이후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p.1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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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백석 평전』에서 새로 밝혀지고, 새로 규명된 백석
“백석의 생애를 완벽히 재구성하는 일에 성공하다” 이 책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백석의 생애와 관련된 사실들을 객관적인 자료를 근거로 재구성했다. 백석이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었는지, 그가 일본에서 유학하며 습작할 때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그동안 잘 규명되지 않았다. 안도현 시인은 백석이 1920년대 일본의 모더니즘 시론을 폭넓게 수용했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백석의 시와 산문에 드러나 있는 내용과 그의 실제 행적을 비교해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고당 조만식이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치지 않았다는 점, 백석이 사모했던 통영의 박경련이 그의 아버지처럼 폐결핵을 앓았고, 나중에 신현중과 혼인한 뒤에 아이를 낳은 적이 없었다는 점, 백석의 통영 방문 횟수가 모두 세 차례였다는 점 등 구체적인 세밀한 정황을 밝혀냈다. 더불어 1941년 평양에서 백석과 결혼한 문경옥의 오빠 문학수(오산학교 후배)와 깊게 교유했고, 그 사실이 백석의 수필 「사생첩의 삽화」에 드러나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 평전은 『조광』 창간호에 실린 「나와 지렝이」, 이 지면 같은 호에 ‘백정’이라는 필명으로 실린 「늙은 갈대의 독백」, 만주의 <만선일보>에 ‘한얼생’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는 「고독」 「설의」 「고려묘자」, 1957년 북한의 <문학신문>에 실은 「계월향 사당」 등의 작품을 백석의 시로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백석 문학의 본체성까지 현저히 손상시키고 혼란과 무질서를 조장시키는”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잘못 알려진 사실을 “말끔히 정돈시키고 있다.”(‘추천의 글’에서) 일제 말 백석이 친일작품을 발표한 적은 없지만, ‘시라무라 기코(白村夔行)’로 창씨개명한 자료를 발굴했다. 한때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 여사의 에세이 『내 사랑 백석』에서 기억의 오류로 인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잡았고, 김영한이 ‘김숙’이라는 이름으로 1939년 《삼천리》에 발표한 수필 두 편을 새로 발굴했다. 더불어 그동안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풍문으로만 떠돌던 백석의 연애담과 결혼생활과 관련된 사실들을 정리했다. 또한 해방 후 북한에 남아 있던 백석의 옆에 조선작가동맹 위원장이었던 소설가 한설야가 있어 백석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아동문학 논쟁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북한 문단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했고, 1948년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어떤 경로로 남한의 잡지에 마지막으로 발표되었는지를 추적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료 사진과 안도현 시인이 직접 작성한 백석 연보를 실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 『사슴』, 『사슴』의 출판기념회를 알리는 신문 기사, 『내 사랑 백석』을 출간할 당시 자야 여사가 이동순에게 보낸 편지, 이화여고보 재학 시절의 18세 박경련, 백석과 자야가 잠시 동거하던 서울 청진동 집, 이 책에서 처음 선보이는 백석이 「사생첩의 삽화」에서 묘사한 문학수의 그림 <죽은 새> 등의 자료 사진이 연대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또한 백석이 일생 동안 기차를 이용해 다녔던 길들을 지도로 보여줬다. 안도현 시인은 스무 살에 백석의 시 「모닥불」을 만난 이후 백석을 30년간 마음에 품어왔다. 안도현 시인은 “시인적 기질가 본성 자체가 백석 시인의 그것과도 너무도 닮아 있다.” 그의 “여러 시집들이 보여주는 시창작 기법과 표현양식, 포즈, 스타일 등에서도 백석의 호흡과 보폭”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안도현 시인은 “백석의 시세계, 시정신, 시인적途程을 배우고 닮아가려는 지향으로 살아온 것이다.” 『백석 평전』은 안도현 시인이 백석을 짝사랑해온 애착과 슬픔으로 쓰인 우리시대 최고의 평전이며 “우리 문학사에서 전무후문한, 유일무이한 명편”이라 할 수 있다 .(‘추천의 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