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 이반의 어린 시절
- 브르통의 '초현실'을 통해 이루어지는 마르쿠제의 '유토피아' 2. 안드레이 루블료프 - 하르트만의 '신념'으로, 키에르케고르의 '믿음'으로 3. 솔라리스 -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하이데거의 '양심' 4. 거울 -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싸우는 라캉의 '거울 이미지' 5. 잡입자 - 플로티누스의 '비행'을 위한 칸트의 '도덕' 6. 노스탤지어 -프루스트의 '회상'을 거쳐 플라톤의 '에로스'로 7. 희생 -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을 위한 프롬의 '존재양식' |
헤르메스 김
김용규의 다른 상품
|
1. 이반의 어린 시절
- 브르통의 ‘초현실’을 통해 이루어지는 마르쿠제의 ‘유토피아’ 사르트르는 이 작품을 사회주의적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그 정당성은 단지 1929년 브르통이 발표한 ‘초현실주의 제2선언’에 입각해서 말해질 때에만 그리고 동시에 마르쿠제가 주장한 유토피아론과의 연관 속에서만 보장된다. 우리는 이 작품을 해석하며 브르통의 ‘초현실’을 통해 이루어지는 마르쿠제의 ‘유토피아’를 본다. 2. 안드레이 루블료프 - 하르트만의 ‘신념’으로, 키에르케고르의 ‘믿음’으로 하르트만은 “충분한 근거, 또는 객관적인 확실성을 가진 눈뜬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기인격의 모험이 없다. 보지 않고도 믿는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관건이다”라고 했다. 같은 말을 키에르케고르는 “부조리의 힘으로 믿었다”라고 했다. 우리는 15세기 러시아 성화상(Icon) 화가인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생애를 다룬 이 작품에서 인간에게 신념이 무엇이고 믿음이 무엇이며,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본다. 3. 솔라리스 -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하이데거의 ‘양심 하이데거는 양심을 불안 속에서 불안해하는 우리에게 자신의 본래적 자기에로 돌아가라고 ‘탓하는 부름’이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름의 소리는 오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안에서만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솔라리스>를 해석하면서 인간에게 시간이 무엇이고, 양심이 무엇인지를 본다. 나아가 스스로 이러한 양심의 부름을 듣길 원한다. 4. 거울 -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싸우는 라캉의 ‘거울 이미지’ 인간의 욕망이란 상대의 인정을 받기 위한 욕망이라는 사실 때문에, 라캉의 ‘거울 이미지’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손잡는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에서는 이 둘은 저항하고 투쟁한다. 타르코프스키 작품 중 가장 난해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자전적 작품을 해석하며 우리는 오히려 가장 분명한 메시지를 듣는다. “행복하려고 욕망하는 자는 바로 그것을 위해 행복하고자 하는 그 욕망을 초극해야 한다”라는 타르코프스키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5. 잡입자 - 플로티누스의 ‘비행’을 위한 칸트의 ‘도덕’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인간들 가운데 신을 닮은 행복한 자의 삶이란 낯설고 세속적인 것들과의 부단히 이별하는 것이며, 세속적 쾌락을 초월하는 것이고 단독자의 단독자로의 비행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수확에 대한 기대 없이도 씨를 뿌리라는 칸트의 도덕이 언제나 함께 해야 한다. 도덕적이지 못하면 날지 못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잠입자>를 통해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전부인가? 전부이다. 6. 노스탤지어 -프루스트의 ‘회상’을 거쳐 플라톤의 ‘에로스’로 플라톤의 에로스는 인간을 지상에서 천상으로, 순간에서 영원으로,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향하게 하는 ‘상승적 창조자’(demiurgos)이다. 프루스트의 회상도 역시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찾아온 ‘천상의 구원’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노스탤지어>에서 바로 이러한 플라톤의 에로스, 프루스트의 회상으로서의 향수를 보여준다. 7. 희생 -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을 위한 프롬의 ‘존재양식’ 타르코프스키가 영화 <희생>에서 규정한 희생이란 ‘모든 이기주의적인 관계에 대한 전면적인 포기’이며 또한 ‘물질세계와 물질세계의 법칙의 굴레를 벗어남’을 뜻한다는 점에서 E. 프롬이 말하는 ‘존재양식’과 같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그것이 어떻게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구원과 연결되는가를 본다. |
|
철학카페에서 만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일곱 편
2001년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판타지를 결합한 철학 소설을 선보인 김용규씨는 다음해 여섯 가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열여덟 편의 영화를 통해 철학적으로 성찰한 영화 해석서인 『영화관 옆 철학카페』를 내놓았다. 철학과 현실, 영화를 접목시키는 그의 시도는 계속되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열 편의 영화 《십계》를 통해서 본 인간 존재에 관한 해석서 『데칼로그』에 이어 20세기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로 꼽히는 러시아 태생의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일곱 편 모두를 해석한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제 독자들 앞에 내놓는다.
단 일곱 편의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칸 영화제 그랑프리,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많은 영화상을 수상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한때 우리 나라 지식인들과 영화 마니아들에게도 유행처럼 다가왔다가는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너무 어려워.’ 또는 ‘졸리운 영화군’이라는 탄식만 남겨 놓은 채 난해한 영화로 관객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영화가 되고 말았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를 감상하는 일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일’ 곧 플라톤이 말하는 상기(想起)임을 분명히 했다. 예술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환영들 속에 불변하는 이데아들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가 보여주는 삶의 진실을 향한 모험 저자 김용규씨는 이 책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감독은 일종의 철학자가 되었을 때만 비로소 예술가가 되며, 그의 영화도 예술이 될 수 있다.”라는 타르코프스키의 말을 논증하기라도 하듯이 플라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헤겔, 프루스트, 마루쿠제, 에리히 프롬, 라캉 등 철학자들의 철학을 통해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바라보고 해석하고 있다. 모든 타르코프스키 영화들이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영화에서 추구했던 세계, 인물, 그리고 영화에서 사용했던 화법 등등이 일곱 편의 영화로 나뉘어 표현되고 있으나 결국은 하나임을 역설하고 있다. 나아가서 파멸될 위기 앞에 서 있는 인류를 절망적 국면에서 구하려는 노력과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았던 한 예술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이념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영화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그 하나였음을 이 책에서 저자는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언제나 철학을 보여주고 철학은 항상 영화를 읽어준다. 저자는 ‘철학을 영상과 이미지를 통해 보는 일’, 그리고 ‘영화를 철학적 개념들을 통해 읽는 일’이 그 자체로 즐거운 모험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모험의 끝에는 삶의 진실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작품들을 보고 읽는다는 것도 흥미진진한 모험이고 이 모험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