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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부끄러운 글
서장/ 7,936명 동료 광부들에게 드리는 글 제1장 운명, 순간의 선택 나의 고향, 장수(長水) / 환하게 묵묵하게, 산서초등학교 시절 / 고학의 연속, 중?고교 시절 / 어머니에 대한 기억 / 군인이 되어 /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바꾸다 / 기회의 땅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며 제2장 내 이름은 파독 광부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 / 동료의 죽음 / 신세계로의 적응 / 광부의 하루, 광부 코드 1662번 / 외롭진 않습니다 / 지하 수천 미터로 출근하다 / 김치와 쌀밥 대신 탄가루 묻은 빵과 함께 / 막장 안에서의 코담배 / 광부로 일한다는 것, 삶과 죽음의 기로 / 목숨을 담보로 하루하루 연명하다 / 석탄 문신은 광부 훈장 / 바위가 덮친 손바닥 / 친절한 독일인 감독관 / 광부의 휴일 / 월급, 그리고 아르바이트 / 광부 이발사 / 고사리 캐다 경찰서 가다 / 소시지와 젖과 마늘 / 광부 기숙사 생활을 정리하다 / 이태리와 스위스로의 첫 해외여행 / 귀국 준비 / 그리운 소녀 헬가 / 제2의 독일생활 제3장 교수가 된 광부 로즈마리 부인 / 체류 허가로 불법 체류를 면하다 / 벨기에 군대 PX 근무 / 손에 쥔 학생증 / 김상균 선생님 / 샹크 부인 / 너무 추운 방 / 돈, 돈, 돈이 없어서 / 늦깎이 독일 유학생의 12년 / 독일식 공부방법 / 독일의 교육제도에 대하여 / 독일 청소년의 생활교육 / 나의 대학생활 / 내 꿈은 초등학교 교사 / 학문의 아버지, 푀겔러 교수 / 독일 풍경 / 인생의 선물, 아내와의 만남 / 무엇보다 그리운 / 결혼 축하합니다 / 따로 사는 신혼생활 / 큰딸을 추억하며, 혈육의 사망신고 / 하크(Haack) 처형 부부 / 미라 제4장 아름다운 만남 잊을 수 없는 고(故) 이규호 장관님 / 내 인생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김춘식 사장 / 한국교원대학교의 여러 총장님들께 감사를 / 한국교원대학교에서 후학 지도 / 한국교원대학교 종합교원연수원 /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청소년개발원에서 / 한국청소년학회의 출범 / 두 교수와의 만남 / 저작 활동 / 사랑하는 제자들, 독일에서 / 사랑하는 제자들, 한국에서 / 40일간의 공포드라마-고(故) 정주영 회장 / 독일 국민과의 만남 / 40년을 뛰어넘어, 외국인 노동자와의 만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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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광부 파견의 역사적 배경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공식방문과 뤼프케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한독경제협력이 강화되었고 한국은 1970년대의 경제개발 시기에 독일에서 많은 차관을 도입하였다. 1959년부터 1976년까지 5억 1200달러를, 1977년부터 1980년까지는 2억 6100만 달러의 차관을 독일에서 도입하였다. 전후 폐허에서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 ‘독일을 배우자!’라는 구호 아래서 독일모델은 우리나라의 제2공화국뿐만 아니라 제3공화국에서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십수 년에 걸친 독일로의 광부, 간호사 파견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카지노 하나 외에 우리 광산마을에 아무것도 해준 것이 권 교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광산마을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 그리고 자연적인 조건이나 사회복지정책이 우리나라와는 큰 차이가 있어서 같은 수준에서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많은 부분에서 문제점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우리나라의 1960년대 초 국민소득이 90불이 안 되었을 때의 광산촌의 생활상과, 2004년 국민소득 1만불이 넘는 지금의 생활상이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탄 에너지가 석유와 가스 에너지로 바뀌면서 석탄 소비량과 채탄량이 점점 줄어든 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영국의 대처 수상도 광산 폐쇄와 그에 따른 광부들의 파업으로 상당 기간 많은 곤란을 겪었다.(우리는 영화 [브레스트 오프] [빌리 엘리엇] [풀 몬티] 등에서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광부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선진국들은 중?장기적 고용정책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여, 광부들의 자존감을 고취하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복지정책을 마련하였다. 광산촌을 인간 친화적으로 재건설하고, 광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며, 광산촌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방치하지 않고 오히려 외부인까지 광산촌으로 유입할 수 있는 유인정책을 펴왔다. 물론, 독일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의 광산촌 시설은 매우 원시적이어서 독일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시설을 건설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부족한 것은 광산촌에 인간 중심적인 중장기 복지정책이 펼쳐지지 못함으로써 공존하는 사회를 이룩하지 못한 것이다. “초현대적인 프로젝트로 재개발된 광산촌은, 20~30년 전 독일 부흥의 기관차 역할을 했던 광부들이 자녀, 이웃과 함께 진정한 삶을 향유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습니다. 지역문화, 휴식공간, 놀이공간이 복합된 지역사회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습니다.”(저자) 우리나라에는 강원도 태백시에 일부 광업소가 연명하고 있다. 광산촌에서 일하다 실직자가 된 수천 명의 광부들은 광산촌을 대부분 떠나야 했고, 광산촌을 떠나서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과거의 광부들의 삶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경제부흥을 일궈냈고 산업전사로서 훌륭하게 일해 왔는가를 인정하기는커녕 푸대접하는 실정이다. 산업화의 역군으로 독일에 갔던 광부 산업전사들, 국가 발전을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린 우리들, 지하 전쟁터에서 목숨을 담보로 일해 왔던 우리 동료들에 대하여 아무런 보답이 없음에 매우 아쉬울 뿐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