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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요안 미셸
이 책이 나오기까지 역사와 사회적 상상에 관한 대화 저자 소개 옮긴이 해제 | 역사는 어떻게 나아가는가?: 역사와 상상, 혁신 혹은 창조에 대하여 |
Cornelius Castoriad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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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쾨르: 인간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언제나 어떤 제도적 질서 속에 있지요. 바로 그 속에서 우리는 창조하다와 다른 생산하다를 만날 수 있고요. 생산은 재생산과 함께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있는 어떤 것을 복제해서 재생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상상력과는 달리, 생산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종합,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거죠. 내가 은유의 언어 차원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의미장을 교차시키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 p.45~46 카스토리아디스: 내가 논쟁을 벌이고자 했다면 당신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준 셈입니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역사로서의 사회는 의미에 속한다는 게 내 생각이니까요. 수단 대통령 니메이리나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우리 사이에 불연속성을 설정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층위에서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모두 말하는 두발짐승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유대교적 과거, 즉 성서 종교의 과거에 닻을 내리고 제도화된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절과 불연속성이 의미 층위에서 일어나고, 게다가 도둑이나 간음죄를 범한 사람에게 손이나 사지를 절단하는 것과 같은 다른 단절들도 따라옵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자책 관념에 매여 있지 않다면 받아들일 수 없고 비난해야 마땅한 일이지요.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로지 그런 불연속성입니다. --- p.55 리쾨르: 어쨌든 당신도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르고 앞선 것들과 연속성을 절대 갖지 않는 그런 종류의 분출이나 침입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거죠? […] 내 생각으로는 인간의 기억, 문화적 기억의 특징은 누적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기억은 앞선 것들을 지우면서 누적되는 기억이기에 단순히 덧붙여지는 게 아닙니다. 그래요, 그 기억은 앞선 것들과 연쇄를 이루고, 앞선 것들은 그와 동시에 그 기억에 선행하는 기억이 됩니다. --- p.64 카스토리아디스: 나로선 인간의 잠재력은 이를테면 잠재력의 잠재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잠재력이 창조되는 거죠. 여기서도 또 스콜라학파식으로 말할 수 있겠지요. 이 모든 잠재력은 최초의 어떤 잠재력 속에 있었을 거라고 말입니다.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잠재력은 피아노와 악보 표기법과 학생들에게 이를 가르치는 교수들, 종교 의례에서 어느 정도 분리된 음악 등을 전제로 하죠. 창조된 잠재력이 그만큼 많다는 겁니다. --- p.66 리쾨르: 우리가 우리에 앞선 것과의 연속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어떤 기대 지평을 투사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실제로 우리 앞에 혁신의 가능성을 열기 때문입니다. 앞선 것을 다르게 읽기 때문인 거죠… 역사성에는 전적으로 특수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물려준 유산을 이어받아 새로운 것을 세울 수 있는 바로 그 힘이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소급 효과라 부르지요. --- p.67~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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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창조라는 명제에 대한 기념비적 토론
리쾨르와 카스토리아디스는 역사적 창조가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 카스토리아디스는 기존의 질서 속에 아직 형상화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제도적, 예술적, 정치적, 과학적 등의) 형태들을 창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새로운 형태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어떤 천재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파리 코뮌 같은 전대미문의 정치적 형태의 출현과 고대 그리스에서의 수학의 탄생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하며 기존의 형태들에서 새로운 형태들을 추론하려 해서는 근본적으로 혁신적인 그 독창성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반면 리쾨르는 ‘창조’가 아닌 ‘생산’이라며 용어 자체에 반론을 제기한다. 리쾨르 역시 과학, 기술의 차원에서는 불연속성 혹은 혁신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모든 차원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이 새롭게 생산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인간의 역사적 창조라는 주장에 리쾨르가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언어의 존재, 즉 선재하는 규칙의 존재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이미 존재하는 형상화에서 출발하여 연속적인 해석과 재해석을 거쳐 나아간다는 텍스트 해석학 이론에 의거한 것이다. ‘소급 효과’라는 개념의 중요성이 거기서 생겨나는데, 리쾨르는 새로운 생산과 함께 과거에 묻혀 있던 잠재력이 해방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같고도 또 다르게, 미로의 갈림길 속으로 리쾨르와 카스토리아디스의 대담은 역사적 창조의 가능성, 창조와 생산 개념의 차이, 그리고 역사에서 의미의 불연속성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다. 두 사상가에게 중요한 지점은 순수한 인식론적 물음이라기보다는 실천적 차원으로서, 인간의 행동과 관련된 정치적 관심이 암암리에 논쟁을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인간은 역사를 바꿀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근본적 변혁’인가 아니면 ‘전통의 침전과 혁신’인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요안 미셸은 이들의 대담이 역사와 상상, 그리고 정치적인 것이라는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된 것으로 조망해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리쾨르와 카스토리아디스는 플라톤 이래 서구 철학에서 현실 또는 실재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비합리적이라고 불신을 받아온 상상력에 중요한 비중을 둔다는 점에서, 또한 상상을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적 변형이나 왜곡 또는 은폐로 간주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단절하고 상상력에 신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서로 만난다. 두 사람에게 집단적 차원의 상상은 상징과 제도들을 매개로 현실화되면서 리쾨르에게서는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로, 카스토리아디스에게는 ‘사회적 상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창조와 생산, ‘근본적 변혁’과 ‘전통의 침전과 혁신’으로 표현되는 역사 이해와 실천적 차원에서 다시 분명하게 엇갈린다. 이와 같이 대담 전체를 관통하는 두 사람의 입장 차이는, 두 사람 모두 반反전체주의 좌파이고 속류 마르크스주의를 지양했으며 정신분석에서 이론적 양분을 얻었다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리쾨르와 달리 카스토리아디스는 평생을 혁명적 기획을 포기하지 않은 활동가였던 데서 비롯된다고도 볼 수 있다. 치열한 공방을 보여준 이들의 대담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는가? 옮긴이에 따르면, 이 대담은 오늘날 더욱 복잡해진 위기의 상황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역사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하는 질문에 천착했던 두 사상가의 오랜 탐구의 여정을 소환해낸다. 이 책은 리쾨르와 카스토리아디스의 사상에 한걸음 다가가게 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사회 변화를 위한 상상력과 관련해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