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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모어 차트만의 서문
1. 뉴욕에서의 어린 시절 2. 가족의 비극과 어머니의 헌신 3. 독서와 기억력 4. 고교 시절 : 브루클린과 브롱스 5. 농장일꾼과 기계공 생활 6. 컬럼비아 대학교 7. 월 스트리트를 선택하다 8. 주식가치의 새로운 발견 9. 증권분석가로서 성공하다 10. 1920년대의 대강세장 : 백마장자가 되다 11. 노던 파이프라인 전투 12. 아들의 죽음과 <증권분석>의 탄생 13. 대폭락의 시련을 넘어 14. 가치평가 전문가 활동 15. 나의 극작가 경력 16. 상품준비통화 계획의 창안 에필로그1 : 63세 때의 자화상 에필로그2 : 80세 생일 연설 벤저민 그레이엄 연보 |
Benjamin Gra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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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 1911년 9월부터 1914년 6월까지 - 을 통틀어 나는 매우 다양한 일들을 했다. 형들이 우리 집안의 생활비를 벌었기 때문에 나는 적어도 내 용돈과 학용품 값은 벌어서 써야 했다. 1학년 때 나는 차이나타운과 보워리 인근의 파크로에 있는 한 영화관에서 평일에는 오후 5시부터 10시30분까지, 일요일에는 격주로 12시간씩을 매표 담당으로 일했다. 급료는 주당 6달러로 그중 60센트는 차비에 들어갔다. 나로서는 이게 두 번째 극장일이었다 : 처음은 1910년 여름 보드빌 하우스인 프로스펙트에서 안내인으로 일한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아주 정직하게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내 자존심을 고려할 때 떠올리기 꺼려지는 일들도 언급해야 겠다. 그것은 횡령에 관한 것이다. 나는 오랜 직업 생활을 통해 매우 조심스러운 정직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 그런 명성을 정당하게 얻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엄격한 정직함의 길에서 정확히 세 번 일탈했다. 아주 어린 시절 나는 엄했던 가정교사가 나눠주는 과자를 더 먹고 싶었다. 그래서 반짝이는 페니가 자판기의 동전구멍에 들어가지 않아 당황해서 다시 집으로 가져갔다. 그것은 페니가 아니라 5달러짜리 금화였다. 어머니는 동전이 없어져 매우 화가 났고, 다시 지갑으로 돌아온 것을 알고는 상당히 의아해 했다. (1900년대 당시에는 지갑에 금화를 넣고 다니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1페니 대신 5달러를 훔쳤다는 생각으로 매우 불안했으며 그 이후로 다시는 돈을 훔치지 않았다. --- p.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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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을 과학적 투자의 장으로 바꾼 인물
그레이엄 이전의 월 스트리트가 투기장이었다면 그의 등장 이후 월 스트리트는 과학적 투자의 장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그레이엄은 주식시장의 틀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그레이엄은 <월 스트리트 저널>이 선정한 "시대를 초월한 가장 위대한 투자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으며, 『미국 경제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그는 또 컬럼비아 대학교 경영대학원 등에서 30여년간 강의하면서 증권분석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가 남긴 저서인 《증권분석》과 대중적인 투자 지침서 《현명한 투자자》, 재무분석의 기초를 다진 《재무제표의 해석》 등은 월 스트리트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현존하는 최고의 투자자"로 불리는 워렌 버펫은 젊은 시절 그레이엄이 쓴 책의 열렬한 독자였고, 그후 그의 제자가 되었고, 또 그레이엄의 회사에서 일했다. 버펫이 "나의 85%는 그레이엄"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레이엄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특히 지금도 내재가치에 기초한 주식투자 분석에 기본적인 지표로 사용되고 있는 주가수익비율(PER)과 부채비율(debt-to-equity ratios), 장부가치(book values), 순이익 성장률(earnings growth) 등은 모두 그레이엄이 처음으로 일반화한 개념으로 버펫은 물론, 존 보글과 마리오 가벨리, 마이클 프라이스, 존 네프 등 월 스트리트의 대표적인 가치투자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진솔하면서도 재미있는 일화로 가득찬 회고록 이 회고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뉴욕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다. 그레이엄은 자신의 성장 과정을 회고하면서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과 그 이후의 가난한 생활,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어머니의 성품, 학창 시절의 추억, 학교측의 실수로 인해 기계공 등으로 일한 뒤 1년만에 다시 입학할 수 있었던 컬럼비아 대학교 입학과정, 그리스 로마 고전문학과 언어, 문학, 역사, 철학에 매료되었던 대학 시절 등을 무척 상세하면서도 재미있게 전해주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그레이엄이 월 스트리트에 첫 발을 내딛는 시점부터 가치평가 전문가로 일할 때까지 투자가로서, 또 증권분석의 전문가로서 활동한 시기다. 1910년대 중반 주식을 거래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투기꾼(speculators)"라고 부르고, 금융거래와 경마 혹은 다른 도박을 구별하지 못했던 시기에 그레이엄은 증권 중개회사인 뉴버거, 헨더슨 & 룁에 들어가 사실상 최초의 증권분석가가 되었고, <월 스트리트 매거진>의 금융 필진으로 일하면서 주식가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널리 알린다. 1920년에 뉴버거, 헨더슨 & 룁의 파트너로 승진해 투자연구 부서의 책임자가 된 그레이엄은 증권분석가로서 성공하지만 세이볼드 타이어의 투자 실패를 통해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1920년대의 대강세장이 시작되면서 그레이엄은 9년간 일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해 1923년 그레이엄 코퍼레이션을 세웠고, 그후 그레이엄-뉴먼 펀드로 발전하게 된다. 새로운 가치투자의 사례와 《증권분석》의 저술 회고록의 한 장을 차지하는 노던 파이프라인 전투는 그레이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당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재무제표를 분석해 이 회사의 과도한 잉여자산을 찾아냈고, 이를 근거로 소액 주주들에게 정당한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주주총회에서 경영진과 의결권 대결을 벌여 마침내 승리를 거뒀다. 그레이엄은 이처럼 이 회고록에서 자신의 가치투자 철학을 유감없이 발휘한 여러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어린 아들의 죽음과 첫 부인과의 불화라는 불행 속에서 증권분석 강의를 시작했고, 1929년 시작된 증시 대폭락의 시련을 딛고 명저 《증권분석》을 집필 구상한 지 6년여만인 1934년 출간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세 번째 부분은 그레이엄을 잘 아는 월 스트리트의 전문가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숨겨진 이력이다. 한 편의 희곡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리기도 했던 그의 극작가로서의 경력은 '80세 생일 연설'에서 손자 손녀들에게 말하고 있듯이 물질적 부와는 독립된, 지적 추구의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잘 전해주고 있다. 후세에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기를 기대하며 심혈을 기울였던 상품준비통화 계획은 정책으로서의 채택 여부를 떠나 그의 독특한 아이디어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레이엄은 자신이 가장 단순하고 중요한 물질적 풍요의 법칙을 알게 되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수많은 부침을 겪고 난 뒤였다고 털어놓는다. "가장 뛰어난 금융 전략이란 그 사람의 수입 범위 내에서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허황된 대박 신화와 10억 만들기가 유행하고 있는 시점에 다시 한번 조용히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