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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팔번뇌와 어머니를 노래하는 지극한 마음과 상상의 울림
1300년 전, 신라의 젊은이 혜초가 밟았던 서역으로의 길은, 불법佛法을 찾아간 역사 속의 길이면서 동시에 시공을 초월하여 지극한 마음들이 꿈꾸는 형이상학적 길이다. 미당의 시 「귀촉도」에서도 나오듯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는, 미당뿐만 아니라 많은 시인들이 항상 꿈꾸며 마음으로 순례했던 길이었던 것이다. 박진숙의 시집 『혜초일기』의 상상력은 혜초가 걸었던 길을 따라 펼쳐진다. 『왕오천축국전』의 여정을 따라 시인은 삶의 근원과 진리를, 불법을 만나고자 상상 속의 순례를 펼친다. 『혜초일기』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근원과 진리 그리고 불법을 찾아가는 마음의 행로이다. 시집 속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알 수 있는, 마음의 지극한 행로를 간명한 사유와 언어로 보여준다. 상황에서 의미로 단도직입하는 시인의 사유와 언어는 경전의 구절처럼 단순명쾌하면서도 큰 울림으로 우리를 근원의 벽 앞에 서게 한다. 서시에서 시인은 “그 끝없는 벼랑 위의 길”과 “천 길 허공”과 “꽃 한 송이 피고 지는 동안”으로 인간의 길을 노래한다. 생사가 없는 깨달음의 경지와 생사의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의 길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고, 그 간격을 노래한 것이 『혜초일기』라 할 수 있다. 『혜초일기』는 구도의 지극한 마음으로 씌어졌으며, 『금강경』의 높은 가르침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혜초일기』는 깨달음의 노래가 아니라 번뇌의 노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혜초일기』가 서시를 포함해서 총 108편의 시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도 암시된다. 108은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의 숫자이다. 시인은 혜초의 마음과 행적을 빌어, 백팔번뇌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2. 가벼운 아포리즘들이 범접할 수 없는 진정성 세상과 삶의 이치에 대한 『혜초일기』의 시적 사유들은 가벼운 아포리즘들이 범접할 수 없는 진정성에 닿아 있다. 거기에는 칼끝과 같은 긴장감이 감돈다. 이런 점에서 『혜초일기』는 감히 경전에 가까워지려 한다. 독자들은 『혜초일기』에서 지혜의 쇠북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혜초일기』는, 깨달음의 노래라기보다는 번뇌의 노래이다. 시인은 깨우침의 피안으로 건너가 버린 자가 아니라 삶의 고통과 세상의 수수께끼 앞에서 한없이 흔들리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존재이다.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순례의 길을 가되, 길 위의 모든 고통과 기쁨에 휩쓸리고 거기서 근원의 그림자를 보는 자이다. 가령 아래의 시는 길 위에서 한 사람을 만나 마음에 병을 얻은 사랑의 번뇌를 노래한다. 천상의 선인들도 때가 되면 옷이 더러워지고 몸에선 냄새가 나고 머리에 꽂은 꽃은 시들고 악기는 낡아 노래도 목이 쉰다는 한때뿐인 목숨 불어닥친 한순간의 폭풍 속에서 가야 할 길을 실날처럼 잡고 아비발치, 아비발치, 오늘 그 상사의 지옥을 독사처럼 물어뜯는 저를, 스승이여 죽비를 들어 꾸짖기만 하시겠습니까 ――「혜초일기 61」 하지만, 어머니의 무한 사랑 속에서 머나먼 순례의 첫걸음을 내디뎠던 시인은 순례의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간다. 고통과 번뇌로 가득한 순례에 지친 시인은 눈보라치는 마지막 고비에서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어머니를 찢고 나오기 때문에 어머니를 먹고 살기 때문에 다 먹고는 버리기 때문에 그 힘으로 죽을 때까지 살기 때문에 모든 생명의 처음이자 끝인 어머니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에 ――「혜초일기 99」 어머니는 생명이자 근원이기 때문에 순례의 출발도 어머니가 되고 존재의 근원을 찾아 도착한 곳도 어머니가 된다. 이 때 어머니를 일러 자연이나 대지 또는 부처라고 해도 될 듯하다. 모든 순례의 끝은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마치 풀과 나무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듯이, 인간도 어머니로부터 생명을 얻어 살다가 보다 큰 어머니인 대지로 돌아간다. 인간의 길이건 순례의 길이건 그 끝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래서 길은 있었지만 또 없었던 것과 똑같다. 이 또한 공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3. 종교적 주제나 소재를 지닌 많은 시집들 중 하나의 모범이 될 『혜초일기』 14년 만에 세상에 시집을 내놓은 박진숙 시인은 그간 혜초와 같은 뜨거운 삶의 궤적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녀의 시 속에 그려진 투명한 순간들은 살아 있는 영혼을 발견해낸 깨달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고통일지라도 우리에게 아름답게 비쳐지는 것은 시인의 삶이 그만큼 굳건해서일 것이다. “내가 부르는 삶의 노래. 부처가 아니어도 좋다. 서늘한 보리수 가지가 아니어도 괜찮다. 땅을 가르고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저 불타는 장작나무로 족하다. 절대의 침묵은, 노래가 끊기고 한 줌 재가 되어 자취없이 흩어지는 것은, 모두 그 후의 일. 사는 동안 아낌없이 이승을 사랑한 후의 일.” ―― 시인의 말 우리는 『혜초일기』에서 세상의 이러저러한 고통과 모순을 만날 수 있고, 크고 작은 불교적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이라는 순례의 길에서 순간 순간 가졌던 마음의 모습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혜초일기』를 읽으면 그 순간순간의 유일무이한 마음들이 투명하게 전해져 온다. 기쁘거나 괴롭거나 슬프거나 평온한 그 마음들은 어떤 경우에나 맑고 지극하다. 특히 꾸밈으로 내보일 마음의 사치나 겉멋은 없다. 그래서 시적 상황도 단순하고 언어도 직설적이다. 이런 진정한 마음들을 만나는 일은, 삶에 있어서나 문학에 있어서나 깨달음에 있어서나 매우 소중한 일이 된다. 아마도 『혜초일기』는 종교적 주제나 소재를 지닌 많은 시집들 가운데서 하나의 모범이 될 것이다.(이상의 시평은 문학평론가 이남호 고려대 교수 해설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