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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장 근원적인 서정의 원리를 보여주는 시편
노두식의 시들은 이 세상을 향해, 흔히 말하는 사회나 민중, 그런 쪽을 향해 열려 있지는 않다. 현실의 모순을 옳게 인식하고 그 극복을 위해 고투하는 문학과 그렇지 않은 문학의 대립이 문학의 근본 문제라고 진단한 평론가 최원식의 논리대로라면 노두식의 시들은 분명 후자, 그렇지 않은 문학 쪽에 선다. 혼자 사랑에 젖어, 그 다정하고 아쉬운 감정을 솔직하게 밝힌 이 시의 위치는 모순 가득한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시적 화자의 관념 속,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욕망의 공간 속에 놓여 있다. 그러니까 이 시를 ‘그렇지 않은 문학’ 즉 개인적인 문학이라고 해야 할지 자기 내부적 문학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두식의 시가 독자, 민중들의 기호를 끌어당기지 못하고 외면당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여전히 이런 시가 쓰이고 또 읽히고 있지 않은가. 남자들끼리 모인 어느 자리에서 제각각 한숨처럼 꺼내, 한 마디씩 던진 세속적인 방담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편이 그렇게 한번 읽고 덤덤히 내려놓을 정도의 평범한 작품만은 아니다. 겉으로는 혹 술기운 끝에 옆사람 누구에게 툭 뱉을 수 있는 반 농담 같은 고백으로도 들리지만, 이 시의 화자가 품고 있는 원망, 욕망, 곧 ‘풀꽃 같은 너와’ 함께 ‘한 살림 살아보고 싶다’는. 현실에서 전혀 실현 불가능한 원망이 우리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후미의 두 연은 솔직히 이미 한 번 ‘한 살림’을 살아본 사람의 내면 의식이다. 짐짓 주책없고 엉뚱한 욕망의 표출 같지만, 그래서 그것을 얼른 농담처럼 스스로 눙치듯이 하고 있지만, 이것은 앞서 말한 남자들이 미숙한 대로 가지는 로망에 대한 역설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시적 화자 자신이 단 한 번도 “함께 밥을 해 먹은 적이 없거나, 티브이를 같이 본 적이 없거나, 내복 속으로 손을 넣어 등을 긁어 본 적이 없는” 그래서 “……싶다”의 ‘욕망 충족’을 경험하지 못한 결핍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로망에 대한 역설로서 과연 화자가 ‘또 누구와 살’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말은 라캉이 주장한 욕망의 환유일 뿐이다. 이렇게 이 시는 시적 화자의 이루지 못한, 그리고 이룰 수 없는 원망, 욕망을 그 내면에 품고 있음에 술자리 방담 같은 쉽고 평범한 작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만약 한 걸음 더 이 시편의 안으로 들어가 이 아름다운 욕망의 좌절 아래에 도사린 화자의 고독함, 그 근원까지 읽어낸다면 그것은 실로 독자의 혜안이다. 특히 첫 행의 ‘한 번쯤은’으로 대변되는 시적 화자의 간절한 진정성과 맨 끝의 ‘또 누구와 살지’의 차마 속된 장난기 같은 발설로 이루어진 수미의 대조는 시의 구성상으로도 썩 재미있다. 2. ‘나는 나의 갈망을 아낍니다’ 이 시는 마치 거울의 유리면처럼 차갑고 차분하다. 거기에 비친 나와, 현실의 나라는 이중적 자아에 대한 통찰이 차가울 정도로 냉정하다. “거울을 떠나면/얼굴에 묻어 있던 그대도 떠나고/나는 일상으로 되돌아와서/다른 그대에게/거울 밖의 얼굴을 보이고 있다”며 시적 화자는 아무런 감정의 흔들림 없이 거울을 떠날 수 있고, 또 ‘얼굴에 묻어 있던 그대’도 떠나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또 ‘다른 그대에게’나의 ‘거울 밖의 얼굴을’보여주며 무덤덤하게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울을 통해 이상화되었던 자아를 버리고 일상 속의 자아의 위치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평론가 유성호는 노두식의 네 번째 시집 『꿈의 잠』의 해설에서 노두식 시인의 삶을 “슬픔을 불가피한 배음으로 하는 고독의 자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어떤 것” 그리고 “꿈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실존적 고독을 발견하고 표현한다.”고 말한 바 있다. 유종호가 서정주를 이야기하면서 인용한 “시의 목적은 놀랄 만한 사고로 우리를 눈부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한 순간을 잊혀지지 않는 순간으로 또 견딜 수 없는 그리움에 값하는 순간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쿤테라의 언설은 이렇게 노두식의 시를 이야기함에도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