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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동물들
동물과 함께 살기 위해 시작해야 할 이야기들
최태규이지양 사진
사계절 2025.04.11.
베스트
생태/환경 14위 사회 정치 top100 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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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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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들어가며

1부 인간과 부대끼며 사는 동물

1장 길고양이 ① - 돌봄과 폭력은 배타적이지 않다
2장 길고양이 ② - 고양이는 어떤 동물이어야 할까?
3장 개 - 사람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동물
4장 비둘기 - 비둘기는 하늘의 쥐
5장 쥐 - 인간이 가장 미워하는 동물
6장 해충 - 혐오만으로 맺는 관계
7장 제비 - 폐허에서 다시 만난 제비

2부 도시 속 야생동물의 의미

1장 너구리 - 가까이 살지만 보이지 않는 야생동물
2장 멧돼지 - 난동 전문 동물
3장 고라니 - 끝내 살아남은 도심 속 사슴
4장 백로 - 돌아오려는 백로와 다시 쫓아내려는 사람들
5장 까막까치 - 길조가 유해야생동물이 되기까지
6장 작은 새들 - 도시에 살아남은 다양성의 세계
7장 야생동물구조센터 - 야생동물에 진 빚을 갚는 마음

3부 돈이 되는 동물: 동물 산업

1장 동물원, 야생동물을 가두어 기르는 곳
2장 팬덤 속 푸바오
3장 고기가 되는 동물들
4장 개와 고양이를 바라보는 눈으로 넙치와 우럭을 바라볼 수 있을까
5장 마트의 동물들
6장 동물을 업으로 돌보는 사람들

동물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동물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사람 - 최태규와 이지양의 대화
참고문헌

저자 소개2

가축을 다루는 수의사로 10여 년 동안 일하다 동물 복지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어서 영국의 에든버러대학교에 다녀왔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박사과정. 동물복지를 공부한다. 동물복지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대학에서 동물 복지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가축으로도, 야생동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웅담 채취용 사육 곰을 구하기 위해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평소에 접하기는 어렵지만, 여전히 동물 복지가 필요한 세상 구석구석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어서 함께 『관계와 경계』, 『동물이 건강해야 나도 건강하다고요?』 등의 책
가축을 다루는 수의사로 10여 년 동안 일하다 동물 복지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어서 영국의 에든버러대학교에 다녀왔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박사과정. 동물복지를 공부한다. 동물복지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대학에서 동물 복지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가축으로도, 야생동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웅담 채취용 사육 곰을 구하기 위해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평소에 접하기는 어렵지만, 여전히 동물 복지가 필요한 세상 구석구석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어서 함께 『관계와 경계』, 『동물이 건강해야 나도 건강하다고요?』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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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지양

관심작가 알림신청
 
순수미술과 미디어를 전공한 시각 예술가이다.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당신의 각도’ 등 다양한 전시를 열었으며, 『일상의 낱말들』, 『사이보그가 되다』, 『1만 1천 권의 조선』 등의 단행본에 사진으로 참여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4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384쪽 | 572g | 140*200*26mm
ISBN13
9791169813686

책 속으로

돌봄과 폭력이 반드시 서로 배타적이지는 않다
한국 정부는 길에 사는 고양이의 개체 수를 조절하기 위해 길고양이를 잡아서 중성화하고 다시 길에 풀어주는 TNR(포획-중성화-방사trap-neuter-release) 정책을 배타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길고양이의 입양이나 안락사는 정책적으로 배제한다는 뜻이다. (…) 보호소에 들어간 고양이의 50퍼센트 정도가 ‘자연사’한다고 분류되는데, 이는 보호소에 방치된 채로 다치거나 아프거나 굶어서 고통스럽게 죽는다는 뜻이다. ‘보호’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통증과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는 뜻이다. 단지 5퍼센트가 안락사의 ‘혜택’을 받고, 그 밖에 입양이 30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 (…) 길고양이들은 대개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질병이나 사고로 길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다. 한국 사회가 만든 보호소는 그곳에 길고양이가 입소를 하든 하지 않든 고통을 방치하는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 p.28~29

여성혐오와도 싸우고, 고양이의 안위도 챙겨야 한다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반려동물 산업의 중심에는 ‘귀여움’이 놓여 있다. (…) 이것이 고양이에게는 썩 좋은 일이 아니다. 동물의 역할이 ‘귀여움’이 되면 동물이 지닌 수많은 특성과 그에 따르는 필요가 삭제되기 때문이다. (…) 주목할 만한 점은 동물의 귀여움을 향유하고 동물을 극진히 돌보며 새로운 인간-동물 관계를 맺는 이들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여성은 역사 속에서 잘 보이지 않던 돌봄의 주체를 도맡아왔는데 ‘동물 돌봄’이 중요한 사회가 되면서 여성의 역할도 잘 보이게 되었다. 이것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misogyny와 얽히면서 여성 집단의 관심사, 즉 고양이를 사랑하고 돌보는 일을 하찮게 여기거나 때로는 증오하는 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여성혐오와도 싸우고, 고양이의 안위도 챙겨야 한다.
--- p.43~46

혐오와 민원
앞뒤를 재지 않는 혐오가 마음속에 일었을 때 다짜고짜 분풀이할 방법으로 ‘민원’을 택하는 상황은 아직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한 동물들에게 무척 불리하다. 러브버그가 ‘싫다’, ‘없애라’는 민원이 낳은 결과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러브버그의 ‘창궐’은 기후 변화로 인해 한반도에 살지 않던 동물이 이주해 와서 살게 된 일이다. 그러니 이를 해결하려면 기후 변화의 원인이나 외래종의 이주 문제 등을 함께 살피며 고민해야 한다. 이는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이다. 민원인의 권리보다 시민의 의무가 중요하고 필요한 시점이다. (…) 해충은 응당 죽여도 되는 동물인가? 그들을 죽이면 안 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들을 죽여도 된다는 생각은 사슴이나 염소, 고양이나 토끼가 어느 섬에 창궐했을 때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비슷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 p.124~126

멧돼지와 인간, 누가 가해자인가
도시는 인간의 영역이라 굳게 믿는 이들은 사람을 피해자로, 멧돼지를 가해자로 규정한다. 얼핏 보면 현대 사회는 동물을 그저 먹거리로 취급하거나 귀여움의 대상으로 가두어 기르는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나 도시의 삶은 인간이 동물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고, 통제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도심에 출현한 멧돼지는 이런 굳건한 믿음에 균열을 만든다. (…) 호랑이와 표범, 늑대를 절멸시키는 바람에 멧돼지가 늘어나 문제가 되었는데, 그다음 순서로 멧돼지를 절멸시킨다면 우리는 그다음, 또 그다음에 누군가를 박멸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할 것이다.
--- p.166~170

도시화로 인해 예상치 못한 번성의 기회를 맞은 종들
도시화는 대체로 생물 다양성을 줄인다. 그러나 도시가 만들어낸 부자연스러운 환경은 어떤 종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번성의 기회를 주기도 한다. 도시의 구조물, 자동차의 소음과 매연, 도시의 식생 분포와 그들 간의 연결, 물의 흐름, 인구 밀도와 사람들의 음식물 처리 습관 등이 그에 대한 적응력이 높은 종의 생존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인간 위주로 만들어진 도시가 어떤 종의 천적을 없애거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그 종이 우점하는 도시 생태계를 만들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인간에 의해 늘어난 까치와 큰부리까마귀를 우리는 또 대량으로 죽이면서 생태계의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일까?
--- p.211~212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는 전보다 더 위험해졌다
통제할 수 없는 동물과 ‘교감’한다는 감각, 여기에 생태적 곤란에 빠진 종을 구조하고 구원한다는 서사까지 붙는다면 마치 자신이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먹이를 주면서 야생동물과 친해지는 일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조금 더 단호하게 말하자면 ‘먹이를 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길고양이나 비둘기처럼 ‘재야생화’되고 있는 종에게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갖게 된 영향력의 크기 때문에 일부러 먹이를 주는 행위는 전보다 더 위험해졌다. 함부로 먹이를 주어 이들을 인간이 통제 불가능한 범위까지 번성하게 만든다면 생태계에 돌이키기 힘든 혼란과 피해가 남을 것이다.
--- p.229~230

야생동물구조센터의 헌신
야생동물 재활관리사와 야생동물 수의사는 야생동물구조센터의 주축이다. 이 사람들이 일한 만큼 동물이 구조되고 살아서 나갈 수 있다. 몇 마리를 구조하고 살렸는지 세는 것도 인간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인간이다. 스스로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적당히 해도 세간에서 말하는 ‘불이익’ 같은 것은 없다. 주인 없는 동물을 돌보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박봉에 계약직이라 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 오래 일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사명감과 애정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곳에 몸을 던져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마음을 지속하고 확산하려면, 지금 우리가 나눠야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 p.261

다가오는 동물원의 밤
야생에서 숱한 동물들을 잡아다 가두어 기르고 구경하던 동물원의 약탈적 속성은 근본적으로 사라지기 어렵기 때문에 인간의 윤리는 더 이상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진귀한 동물을 구경하는 재미도 가상 세계에 기반한 더 자극적이고 덜 폭력적인 오락거리에 밀려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윤리적 정당성과 오락거리로서의 효용을 잃은 동물원이라는 공간은 적어도 이번 세기 안에 사라질 거라 예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할 것은 더 이상 동물원 동물이 늘지 않도록 하는 동물원 정책과 지금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들을 윤리적으로 다룰 구체적인 방안이다.
--- p.281

푸바오 팬덤에서 희망 찾기
문득 이것은 ‘희망’이 아닐까 생각했다. 푸바오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데 몰두하던 사람들이 이미지 뒤에 실재하는 동물을 관찰하고 걱정하기 시작했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푸바오 팬덤의 문제 제기가 무척 신선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들이 그저 동물의 귀여움을 소비하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돌 팬덤이 종종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하고 보호하기 위해 소속사나 세간의 공격에 맞서 전투에 나서기도 한다는 점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p.289

불매 운동의 한계
인간이 죽이지 말아야 할 동물의 범위를 소비자로서 넓혀가는 방식은 동물을 위해 어떤 성취를 할 수 있을까. (…) 어떤 경위로든 직간접적으로 동물을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운명적으로 선택받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다른 동물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끝내 이룰 수 없는 목표라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이는 결국 인간만이 향유하는 ‘지향’이나 ‘태도’로 귀결한다. 내가 동물을 죽였느냐 안 죽였느냐, 혹은 소비했느냐 안 했느냐가 어느 농장에 살고 있는 동물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소비자 정체성에 기대는 불매 운동의 인식론적 한계다.
--- p.310

동물의 복지와 인간의 복지는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은 방금 전까지 살아 있었던 넙치와 우럭을 먹기 위해 굳이 항생제나 화학 물질을 섭취하는 위험에 빠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넙치와 우럭을 기르고 팔아야 먹고사는 사람들의 삶도 같이 고민해야 한다. 물고기를 포함하는 동물의 복지가 인간의 복지와 연결되어 있다는 ‘원 웰페어One Welfare’ 개념이 우리 사회에 한 번 쿵 하고 떨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넙치와 우럭과 인간이 서로를 병들게 하는 일을 불안 때문에라도 멈추지 않을까.
--- p.327

동물학대죄는 사회적 약자를 향한다
최근 한국의 동물보호단체에서 동물학대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비판하고 고발하는 캠페인의 대상은 누구인가. 대체로 ‘개’를 길러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개를 먹던 시대와 개를 가족으로 여기는 시대가 충돌한 것이다. 인간의 웬만한 행위는 다 산업이 되는 사회에서 개를 먹는 일도 어느 시점에 ‘산업’이 되었고, 그 일에 기대어 생존해온 사람들이 있다. 개를 기르고 잡아서 식용으로 파는 것 이외에 마땅한 생업이 없는 이들은 어느 순간 개는 가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서 움츠러들게 되었고, 조만간 시행될 ‘개 식용 종식 특별법’에 의해 직업을 바꿔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새로 만든 법에 따르지 않으면 범죄자가 된다.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옳고 그름은 따져야겠으나, 마틴법 이후 200년이 지나도록 동물학대죄는 대체로 사회적 약자를 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p.348~349

출판사 리뷰

폭력과 멀지 않은 돌봄, 자본의 횡포,
달라진 환경과 새로운 윤리의 들끓음 속에서 여전히 소외된 동물들의 삶
동물의 입장에서, 동물을 주어로 삼아 대화하는 공론장의 탄생


동물을 집 안에 들이거나, 길에 사는 동물의 밥을 챙겨주거나, 고통 속에 죽임당하는 동물의 수를 줄이기 위해 고기를 덜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동물의 안위와 생존을 걱정하는 것을 넘어 동물에게 가족이나 시민의 지위를 주자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오늘 한국의 도시인들은 늘 곁에 살았던 동물들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다소 위태로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진심, 선의, 사랑 같은 말로 표현되는 이 실천들이 각 종의 고유한 특성이나 그 생태적 작용, 달라진 현대 도시의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혹은 인간과 얼마나 가깝게 지내는가라는 ‘관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집 앞에 찾아오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행위는 그 고양이의 허기를 잠시 달래기는 하겠으나, 길에서 떠도는 고양이의 개체 수를 늘려 이들의 삶의 조건을 악화시킬 뿐 아니라 고양이 밥을 먹으러 온 너구리, 비둘기, 까치 등 다른 동물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다. ‘반려동물’이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개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은 개에게 ‘귀여운’ 돌봄의 대상이라는 역할을 부여해 개를 점점 더 작고 약하고 통제 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반면 ‘가족’이 되지 못한 동물들은 보호의 범위에서 배제되거나 혐오의 시선 속에 놓일 수 있다. 집 앞에서 굶주린 쥐를 보았을 때 밥을 챙겨줘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관계 속에 동물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는 왜인지 불편하다. ‘관계’로 동물을 얼마나 잘 설명하고 존중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 친족이나 가족이 되지 않더라도 동물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없을까? (…) 실제로는 일방적이고 한쪽으로 치우친 관계를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가리고 있는 현실에서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종류의 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 개를 주인인 ‘나’와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더 깊숙이 종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어른’으로서의 개를 지워버린다. (…) 개를 무엇으로 규정하든 개는 개로 존재한다. 떠돌이든 반려동물이든 혹은 식용견이든 실험견이든 개는 개다. (…) 개에게 필요한 것을 고민하고, 개를 개 자체로 존중하면 좋겠다. 그 존중은 개가 가족이거나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개라서 받는 존중이어야 한다. - 66~79쪽

여전히 많은 동물이 인간에 의해 죽거나 삶의 터전을 잃는다. 길조였다가 유해야생동물로 전락한 까치, 갑자기 개체 수가 늘어났을 뿐 인간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는 러브버그, 먹이를 찾으러 왔다가 번쩍이는 네온사인에 길을 잃어 민가에 들이닥치기도 하는 멧돼지는 ‘너무 많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죽임을 당한다. 길고양이의 안락사는 허용하지 않는 나라에서 야생동물은 대량으로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때는 마을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했던 백로는 깃털이 날리고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서식지에서 쫓겨나고, 연간 20만 마리가 사냥이나 교통사고로 죽는 고라니는 멍청하게 차를 피하지 못해 죽는다며 조롱을 당하기도 한다.

저자는 인간의 불편함이나 혐오감을 이유로 동물을 무심히 죽이거나 쫓아내는 여러 장면들을 통해 우리의 종 편향과 빈약한 윤리, 부족한 생태적 관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나아가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지극한 돌봄을 받는 동물들도 실은 실내에 가두어진 채 본성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통스러운 치료를 견디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유행처럼 사용되는 ‘돌봄’이라는 말이 내포한 폭력과 동물을 사고팔아 생계를 유지해온 사람들에 대한 멸시에 대해서도 성찰해보자고 제안한다. 권리, 자유, 해방, 돌봄과 같은 개념들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이러스를 옮기고 식당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멧돼지를 그냥 내버려두란 말인가’, ‘병들거나 버려진 동물은 다 안락사를 하자는 말인가’, ‘공장식 축산을 옹호하는 것인가’라며 반감을 표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질문들에 단 하나의 답을 내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거나 ‘다 잡아서 죽여야 한다’는 식의 둔탁한 주장을 넘어 각 동물이 처한 상황과 생태적, 사회적, 정서적 파장을 고려한 신중하고 섬세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뜻에서 쓰였다. 동물을 진정으로 위하고 존중한다는 것은 이 어렵고 복잡한 논의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마음먹는 일이다. 내가 키우는 개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육류나 가죽 제품을 덜 소비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의 왜곡된 동물 사랑에 제동을 걸며 동물의 입장에서, 동물을 주어로 삼아 대화를 시작하자고 제안하는 뜨겁고 치열한 공론장이다.

‘야생동물이 너무 많다’는 인식은 인위적 개입으로 생태계를 관리해야 한다는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자, 야생동물에 경쟁심과 공포, 낯섦을 느끼는 이들의 민원에 대응하는 관료제의 정책 근거다. 얼마나 많아야 많은 걸까? 그에 대한 판단은 자연과학이나 편견, 감정 어느 하나에만 기대지 않고 복잡한 사회관계의 차갑고 뜨거운 부침에 따라 달라진다. 판단을 해도 되는지 망설이는 것 역시 하나의 판단이다. 우리는 이제야 동물의 입장에서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행위가 동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야생동물이 너무 많다는 판단도 조금은 더 조심스럽게, 덜 폭력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 217쪽

변화하는 도시와 달라진 사람들,
휘청거리는 동물들의 삶


이 책은 동물의 삶과 죽음, 번성과 절멸을 통해 본 한국 현대사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저자가 소개하는 동물들의 삶에는 급속한 산업화와 군사독재, 반反생태적 개발주의, 시장의 지배, 소비자 정체성과 개인 미디어를 갖춘 시민들의 등장이라는 한국 사회의 격렬한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1970년대 독재정권이 벌인 ‘전국 쥐잡기 운동’은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라’, ‘사회를 좀먹는 존재는 박멸해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리기에 적절한 이벤트였고 죽어가는 동물의 고통 따위는 고려하지 않던 시대라 가능했던 일이다. 당시 무분별하게 사용한 쥐약 때문에 여우를 비롯해 여러 종의 포식동물이 남한에서 사실상 절멸하고 말았다. 1980~90년대에는 정력에 좋다면 무엇이든 잡아먹는 ‘보신 열풍’이 불었다. 곰, 여우, 늑대, 너구리, 고라니, 오소리, 까마귀 등 온갖 동물을 잡아먹는 통에 상당수의 종이 절멸하거나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인간은 늘 야생동물을 잡아먹고 살아왔지만,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사고파는 시대에 접어들어 야생동물을 사고파는 ‘산업’이 등장하면서 이전과 다른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고라니가 살아남은 더 중요한 이유는 인간에게 고라니가 쓸모없는 동물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은 뿔이 중요한 약재로 쓰이는 문화권에 속하는데, 공교롭게도 고라니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뿔이 없는 사슴이다. 고라니와 달리 뿔을 가진 대륙사슴(혹은 꽃사슴)과 노루는 뿔을 약재로 쓰려는 사람들에 의해 멸종되거나 개체 수가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 뿔이나 가죽, 사향처럼 동물의 신체가 값비싼 ‘상품’이 되고, 그 상품의 거래가 ‘산업화’되는 일이 특정 종에게 일어날 때 그 종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고라니는 시장에서 팔 만한 부위가 없는 동물이라서 살아남았다. 야생동물의 멸종을 이야기할 때는 꼭 ‘서식지 파괴’와 ‘밀렵’이 그 원인으로 따라붙는다. 그러나 특정한 몇몇 종이 멸종한 역사를 돌아보면, 거기에는 분명하고 직접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멸종이라는 사건은 ‘인간의 욕심’, ‘환경 파괴’ 같은 흐릿하고 넓게 펼쳐진 이유로 일어나지 않는다. - 185~186쪽

과거에는 마을의 좋은 구경거리였던 백로는 2000년대에 들어서며 그 집단 번식지에서 냄새가 나고 깃털이 날린다는 ‘민원’ 사항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공무원들이 백로가 모여드는 나무를 베면, 다음 해에 백로는 그 바로 옆의 숲에 번식지를 차리고, 공무원들은 또 그곳의 나무를 베는 일이 계속되었다. 이 반복되는 소동은 정말로 백로 때문일까? 저자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부동산이 가장 중요한 나라에서 백로 서식지가 집값을 떨어뜨리는 주거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고, 더불어 오늘의 도시인들에게 동물의 배설물과 깃털을 더럽다고 여기는 감각이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 사회의 변화가 늘 찾아오던 백로를 어느 순간 ‘문제’로 만든 것이다.

동물을 영상이나 사진을 통해 더 자주 만나는 2020년대의 한국 사회는 푸바오라는 ‘아이돌’을 만들어냈다. 손에 개인 미디어를 든 사람들은 푸바오가 나오는 영상을 공유하고, 푸바오의 이미지를 활용한 각종 상품을 소비하며 대나무숲에 앉아 있는 대왕판다와는 전혀 다른 존재를 만들어냈다. 이런 열기는 사실상 푸바오의 복지와는 거의 관련이 없지만, 사랑하는 아이돌을 ‘많이 팔아주는 것’이 그 아이돌에게 이익이 되는 경험에 익숙한 사람들은 푸바오에게도 좋은 일일 거라 믿으며 소비에 열중한다. 저자는 “소비를 정의 구현의 도구로 해석하면, 소비 대상이 되는 동물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며 동물을 위하는 마음을 ‘소비’로서 실천하려는 최근의 경향에 비판적 견해를 표한다.

이 책에서 가축과 야생동물을 아우르며 폭넓게 보여주는 것처럼 동물과 인간은 오랜 시간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그 관계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격렬한 진통을 겪으며 함께 변해왔다. 이는 동물의 삶이 지금보다 나아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도덕이나 위생 관념부터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 정치?경제적 상황까지 포함한 총체적인 고려가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시의 동물들』은 ‘동물과 인간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구체적인 맥락을 펼쳐 보이며 독자들에게 한층 넓은 시야를 제공하고 있다.

동물원과 마트의 동물 코너가 불편해진 사람들,
야생동물구조센터의 헌신과 그에 대한 사회적 지지…
새롭게 자리 잡은 동물윤리에서 희망 찾기


책 전반에 걸쳐 저자는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동물보호운동의 여러 흐름과 시민들의 새로운 실천에 다소 비판적인 관점을 드러내지만, 이 비판이 시종일관 붙들고 있는 것은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대중의 새로운 감각과 고통받는 동물들을 구조하고 치료하고 돌보는 이들의 헌신에서 발견한 작은 희망이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마트에서 토끼, 다람쥐, 개, 고양이를 파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동물원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고, 동물원들도 종 보전이나 교육적 목적을 내세우며 스스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푸바오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가두어 기르는 동물에게는 정형행동이 나타날 수 있고, 움직일 기회와 동기를 제공하는 ‘풍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동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음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야생동물구조센터이다. 한국 사회는 이제 가축종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간섭 없이 살아가는 야생동물의 조난에도 개입하기로 했다. 차에 치인 고라니, 전염병에 걸린 너구리, 날개 다친 독수리를 치료하고 돌보는 일에 세금을 쓰기로 했고, 그 일을 하는 곳이 바로 야생동물구조센터이다. 치료한다고 해서 당장 이익을 보는 사람도 없고, 생태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내기에도 역부족이지만 그 일이 필요하고 의미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가 먹거리도 애완용도 아닌 야생동물을 걱정하기로 했고, 그 걱정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치 시시포스의 노동과도 같은 동물 구조에 애쓰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동물들이 보호받는 대상이 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동물복지 논의가 인간의 뚜렷한 돌봄 아래에 있는 가축종만을 포함했다면, 이제는 야생동물도 그저 동물이기 때문에 개체로서 존중받기 시작했다. 흔히 ‘야생’이라고 하는, 마치 인간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던 환상 속 세계가 이제 우리 사회에서 깨어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야생동물구조센터는 야생동물의 삶이 인간의 관심사가 되어가는 과정을 최전선에서 이끌고 있다. - 255쪽

저자는 합리성 너머에 자리한 이 열정과 헌신의 세계에 주목한다. 오늘밤 어느 지역의 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 비둘기 한 마리를 더 살려낸다고 해서 내일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비둘기는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되어 어딘가에서는 일부러 죽이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눈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동물을 살려내고자 하는 마음은 그 일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 헌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어떤 의미와 감각이 생겨나 또 다른 실천이 일어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어떤 선명한 결론을 내지 않는 이유는 이런 설명하기 어려운 움직임, 들끓고 있는 정동情動이 합리적인 판단 너머의 다른 작용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비워둔 자리는 오늘의 들끓음이 만들어낼 희망이 채울 자리라고도 볼 수 있다.

100여 장의 사진으로 만나는
지금, 여기 한국 도시의 동물들


이 책에는 사진작가 이지양이 전국 각지에서 촬영한 100여 장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가 먼저 글을 쓰고 그에 필요한 사진을 구하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이 책은 글이 먼저 나오기도 하고 사진이 먼저 나오기도 하며 서로에게 영감과 소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예컨대 사진작가의 개인 전시를 위한 작업이었던 백로와 러브버그 사진은 저자에게 도시인이 특정 동물들에게 느끼는 혐오와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으로서의 민원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했고, 각 종의 동물이 처한 서로 다른 현실을 담고자 한 저자의 의지는 사진작가로 하여금 야생동물구조센터, 닭 농장, 동물원, 국립생물자원관 등 전국 각지의 현장을 찾아가게 했다. 이 책의 부록에는 최태규, 이지양 두 작가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책의 범위를 확장해간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대화를 실었다. 글과 사진의 긴밀한 상호 작용을 독자에게 전하는 한편, 동물 사진을 찍고 감상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글과 사진, 그리고 이 대화를 통해 독자들은 지금, 여기 한국의 도시에서 어떤 동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생생한 현장을 만날 수 있다.

추천평

과거에 비해 동물을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이 늘었다고 느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때의 ‘사랑할 준비’라는 말 앞에는 괄호에 숨겨진 ‘제 딴에는’이 붙는 것 같다. 동물을 ‘아기처럼 귀엽고’ ‘인간의 돌봄 없이는 불완전한’ 존재로 취급하는 왜곡된 사랑의 방식은 한 개인이 행할 때는 단발적 사건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문화라는 이름의 거대한 집단 행위가 될 때는 필연적으로 동물을 인간(혹은 세계)에게서 소외시킨다. 그리하여 저자는 지금 이 사회가 “기르던 동물을 잡아먹던 시절보다 동물과의 거리는 오히려 더 멀어진” 것으로 느낀다. 이 책이 ‘뻔한’ 동물 책이 아닌 이유는 긴장감 때문이다. 길고양이가 일으키는 생태적 문제, 동물‘보호’ 수단으로서의 안락사, 개는 특별하다는 관계주의의 허점, 소비자 불매 운동이라는 한계에 갇힌 개 식용 종식 운동, 축산업자들의 ‘동물 돌보는 마음’에 대한 폄하. 저자는 우리가 선악의 범주에 세워두었던 익숙한 주장을 자꾸 ‘다시 살펴보자’ 한다. 속이 부대낀다. 마음에 불이 일어 제대로 논쟁하고 싶어진다. 읽는 행위 자체가 공론장을 만든다.

이 책은 누군가는 시작해야 했던 논쟁의 장을 열었다. 부디 많이 읽히고 더 많은 주장이 들끓길 바란다. 저자가 미리 제시하지 않은 답은 우리 사회가 함께 채워나가야 할 거대한 괄호다. 답을 찾는 과정은 어렵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이 주어가 아닌 ‘동물’이 주어가 되는 더 나은 꿈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공격적이면서도 필연적인 논쟁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다. 날카로운 문장들이 희망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비인간 동물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어떻게 지속하고 확산할 수 있을까? 명확한 질문이 있으니 이제 답을 찾는 일만 남았다. - 김다은 (〈시사IN〉 기자, 『동물의 자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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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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