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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부 3부 4부 작가의 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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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은 마음이 선해야 한다는 강박이기도 해요. 이것이 우리의 위선이 우리의 민낯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죠.
--- p.23 단 한 가지 이유라는 건 그럴싸하게 만든 명분인 때가 많잖아. 타인에게 설명하기 좋게.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도. 우리가 제일 설득하기 어려운 존재는 자기 자신인지도 모르겠어. 이유는 만들면 그만이니까. 인간은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몸 안에 가둔 채 끊임없이 흔들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닌가 싶어. --- p.30 그때 당신이 그랬지. 이런 시절에 행복을 느껴도 되는 거냐고. --- p.31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답은 정해져 있지 않아. 삶에 대한 모든 정답은 언젠가는 오답이 될 운명을 지녔어.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한 걸음 나아가고, 한 걸음 물러서도 보는 것. 정답이 아니라 이런 시행착오가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 --- p.32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우리는 우주에 대해 끝내 다 알아내지 못할 거야. 사실, 그러지도 말아야 해. 질문이 필요 없어진 우주는 가늠할 수 없이 크고 지루한 창고에 불과해질 테니까. --- p.33 슬퍼하고 또 웃길 바라. --- p.34 제발 정신 차리세요. 당신의 국가보다 당신의 속옷 상태가 당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니까요.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고 싶으신가요? 그럼 빨래를 하세요. --- p.43 어쩌면 외계는 당신에게 더 어울리는 곳인지도 모르겠어. --- p.50 물론, 별과 은하를 만질 수는 없지. 다행인 일이야. 아름다운 건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둬야 해. 그런 생각도 들어. 별처럼 정말 아름다운 건 우리가 손으로 붙잡을 수도, 영원히 소유할 수도 없는 것들이 아닐까, 하는. 아련한 그리움, 예기치 않던 설렘, 몸을 떨리게 하는 흥분, 낯선 친밀감, 모호하고 부유하는 감정들……. --- p.62 꿀벌이 실종되기 시작했을 때, 인류는 꿀벌들이 아마겟돈의 벌어진 대문 틈 사이로 날아간 것임을 눈치채지 못했어. 오래지 않아 대문이 활짝 열렸을 때는 피난처를 찾아 지구 밖을 두리번거려야 했고. --- p.72 나는 무지했고, 지금도 그래. 이건 무시할 만한 무지가 아냐. 나는 알아야 할 걸 몰랐고, 몰라도 될 걸 너무 많이 알았어. --- p.74 바람과 희망이 사라진 인간을 떠올려보세요. 그 안에 영혼이 있을까요? 바람과 희망, 그리고 영혼은 함께 소멸하고 함께 부활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누군가의 희망과 바람을 무참히 짓밟는 인간을 생각해보세요. 그 안에 영혼이 있을까요? 있긴 하겠죠. 지옥을 채울 영혼도 필요하니까. --- p.83 수화로 대화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표정에, 눈빛에, 입가와 몸의 조그만 떨림에 집중해요. 서로의 마음을 책처럼 펼치고 한 줄 한 줄 사려 깊게 읽어나가는 느낌이랄까요. --- p.92 승리한 국가와 민족과 종족은 존재할 수 있지만 개인은 오로지 패배한다는 것, 낯선 타자를 죽임으로써 패배하고, 낯선 타자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패배한다는 것, 전쟁의 결과와 상관없이 커다란 고통과 상처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 p.107 사랑은 폭풍우 치는 바다 위의 배와 같은 것 아닌가? 고요하고 싶어도 고요할 수 없는. --- p.124 길이,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살아가는 방법.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런 연습에 좀 더 익숙해지는 것이지 다른 무엇은 아니었던 거야. --- p.128 햇살이 부드럽게 몸을 감싸던 날들은 단순히 날씨가 좋은 날들이 아니었어요. 삶의 이유가 되는 날들이었죠. 지구인들은 아무리 비참한 상태라도 뿌리치기 어려운 삶의 이유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어요. --- p.135 식용 식물이 자랄 자리 일부에 관상식물을 심은 것은 호사스러운 선택이 아니었어. 화성에서 관상식물은 오감의 퇴화를 막는 마지막 보루야. 별은 만질 수가 없고 향기도 없으니까. 인간은 포만감만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절히 실감해. --- p.144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절망적인 상황을 곁에 두고도 즐거움을 찾고 누리려는 노력 역시 우리의 또 다른 의무라는 생각이 들어. --- p.145 식물을 바라볼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는 식물의 가장 큰 욕망이 숲을 이루고 싶은 것이어서가 아닐까 싶어. 홀로 우뚝 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것. 스며들고 어울리고 나란히 서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 이를 생명의 욕망이라고 불러도 될 거야. --- p.146 내 안에 작지만 반짝이는 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모든 게 쉬워져요. --- p.165 선의는 미끄러지기 일쑤인데 적의는 왜 이렇게 정확하게 목표에 도달하는 것일까요? --- p.1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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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국가와 자본의 경계에서
아스라한 섬광을 좇다 김기창 작가의 장편소설 《화성의 판다》가 출간되었다. 2014년 《모나코》로 제38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후, 《방콕》(2019), 《마산》(2024)에 이르는 ‘공간 3부작’을 10년에 걸쳐 마무리 지은 작가는, 이번 작품 《화성의 판다》에서 근미래인 2068년의 화성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주인공 마션(Martian) 그레이가 발신한 이메일 쉰일곱 통으로 이루어진 서간체 소설로, 화성 개척을 위해 파견대가 행성에 진입한 이래 200일 동안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그레이는 화성에서 식량을 마련하고 거주지를 확보하는 등 여러 생존 활동을 펼쳐나간다. 그러던 중 파견대에서 대원 한 명이 단독 행동을 하며 이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지구의 자국 이기주의에서 발현된 행동이 아니냐는 의심 속에 그레이는 동료들과 함께 이탈 대원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미스터리한 섬광과 기묘한 판다의 형상이 혼란을 가중시키는 가운데, 미확인 비행체까지 가세하면서 상황은 더 급박해진다. 한편, 그레이는 다른 대원 퍼플을 향한 사랑을 느끼며 기묘한 꿈을 꾼다. 기후 위기의 벼랑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 문명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기후 위기는 사회적 문제로 숱하게 거론되곤 하지만, 이 주제가 문학적으로 다루어진 경우는 한국소설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김기창 작가가 2021년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이라는 단편소설집을 펴냈을 때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해당 책에서 기후 위기를 주요 테마와 소재로 삼아 새로운 서사의 흐름을 발생시켰다. 이번 책 《화성의 판다》에서도 그 영향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소설의 배경 면에서 그러하다. 주인공 그레이는 전 배우자와의 추억을 얘기하면서 기후 열대화로 인한 대홍수를 언급한다. 엄청난 재난으로 인해 수만 명의 이재민과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또 화성 개척에 나선 선발대는 ‘인류의 멸종’을 염두에 두고 임무를 펼치는데, 그 멸종의 위협이란 아마도 더 이상 지구에서 인류가 살 수 없는 환경 조건이 되는 것임이 암시된다. 물론 《화성의 판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은 국가주의나 자본주의로 인한 갈등이지만, 소설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규정 짓는 것은 기후 위기이다. 리처드 파워스 같은 작가가 《오버 스토리》로 퓰리처상을 수상할 만큼, 서구권에서는 기후소설에 대한 관심과 위상이 높은 편이다. 김기창 작가는 한국문학의 맥락에서 기후소설의 지평을 열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화성에서 새로운 인류를 꿈꾸다 작가는 화성을 단지 황량한 곳, 개척해야 할 곳, 요컨대 지구의 식민지 격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곳, 하얀 도화지에 가깝다. 작가는 기후 위기로 인해 인류가 지구를 ‘탈출’한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 화성에 왜, 누가 가야 하며, 그곳에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화성의 판다》에서 화성인들은 스스로를 한때 지구에서 멸종위기종 보호의 상징이었던 ‘판다’에 비유한다. 이 고립된 행성에서 화성인들은 판다처럼 생존과 번식을 위해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생존을 넘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모색한다. 작품 속 대원들은 ‘정상성’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인물들은 성별이 모호하게 설정되고, 그레이, 핑크, 퍼플, 아이보리처럼 국적이나 인종을 넘어서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은 새로운 문명의 초석이 될 이주민인 동시에, 기존의 정상성을 탈피한 존재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이들 중 대다수가 지구 기준으로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 시력, 청력, 사지 장애 등 다양한 신체적 차이를 지녔지만, 이는 오히려 화성이라는 극한 환경에서 강점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불안정한 발전 상황에서 정전이라도 되면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모두의 안내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능력자들이 모두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도록 거주지 ‘플랫 원’을 설계하는 것 또한 대원들의 중요 관심사이다. 소설은 성별, 인종, 장애를 뛰어넘어 다른 형태의 인류를 모색한다. 이러한 ‘화성인’들이 만들어갈 공동체의 모습 또한 새로울 것임을 소설은 암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