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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불순한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1장 교실 문을 열면 다른 세계가 있었다 아침 교실, 기다리는 마음 어린이의 하루는 쌓인다 귀엽다는 말 참기 체육하는 몸과 마음 좋아서 하는 일 모르는 채 두기 어린이 스펙트럼 무서운 게 딱 좋아 정치하는 어린이들 욕 쪽지 어린이라는 세계지도 2장 불순한 어린이들 이상한 어린이들에게 시선이 향하는 이유 나쁜 것을 욕망하기 쌉가능, 억까, 힘숨찐, 에바 머글과 덕질 사이 표현하는 어린이들 학생 선수는 매일 배운다 그래서 같이 달렸다 어린이와 혐오 표현 '금쪽이'를 위한 변론 선생님 몇 단지 살아요? 건물주가 꿈이에요 가해자들 다른 세계를 상상하기 3장 어린이와 연루되기 연루된 몸들 아이와 어린이 서로에게 스며들기 유머의 기술 돌봄에 대하여 문어의 꿈 학군지 키드의 세계관 스승의 날들 상실과 애도 다른 몸을 상상하기 세월호 참사를 가르치는 일 어린이들이 미래의 주인공 과거는 갔고 미래는 몰라 에필로그 어둠의 어린이들을 변호하며 어린이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드리는 짧은 당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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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이 나오는 영화나 소설은 러닝타임과 쪽수가 정해진 닫힌 세계라서 안도감이 든다. 하지만 내가 어린이들과 맺은 관계는 안도할 수 없는 열린 관계였다. 앞으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르며, 떨어지는 운석에 맞듯 교실에서 사건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이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어린이 ‘전문가’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이들을 낭만적으로 보거나 미래의 희망이라며 오늘에서 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노골적인 혐오 발언을 하거나 친구에게 폭력을 가한 적 있는 나쁜 어린이. 다른 어린이들과 달라 ‘금쪽이’나 ‘찐따’라며 냉대받는 어린이. 솔직한 욕망에 빠져드는 어린이. 내가 본 어린이들은 다양했다. ‘순수함’이나 ‘어린이다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린이들이었다. 귀여워하거나 흐뭇해하는 시선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어린이들을 ‘불순한 어린이’라고 규정하고 글을 썼다. 어른들의 상상을 넘나드는 어린이들의 이야기로 어린이를 다르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너 탄핵 찬성이야 반대야?” “뭐가 찬성이고 반대인데?” “윤석열 대통령 좋아하면 탄핵 반대고, 싫어하면 찬성이야.” “난 그럼 찬성.” 정치에 별 관심 없어 보였던 두 어린이의 대화였다. 사회를 뒤흔든 중요한 소식은 어린이에게도 중요한 소식이었다. 어린이들도 대통령 이야기를 했다. 탄핵 선고 생중계를 교실에서 함께 보자고 했고, 자신이 다다음 대통령 선거에 투표할 수 있는지 계산해보았다. 사람들이 잘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하고 괴상하며 불편한 어린이들이 눈에 더 들어왔다. 어른들이 어린이를 이상적으로 묘사하거나 낙관적으로 예찬하는 일이 우스웠다. 불안한 어린이였던 과거의 나와, 흔들리며 관계를 쌓아가는 지금 어린이들의 불순한 모습은 제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조금씩 각도를 틀어 어른의 세계에서 빗겨 서 있던 나는 초등학교 교실에 와서 본격적으로 어른의 세계와 멀어졌다. 그 덕에 어린이들과 조금 다르게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오, 선생님 ‘힘숨찐’이었어.” 장난기 많은 어린이가 내게 한 말이다. ‘힘을 숨긴 찐따’라는 뜻이다. 나는 평소 ‘찐따’라는 말에 ‘긁히는’ 사람이지만, 이 말에는 다소 애정이 담겨 있었다. 강력하지만 자신의 힘을 숨기다 위급한 상황에 나서는 슈퍼맨처럼, 알고 보면 의외의 능력이 있는 사람을 ‘힘숨찐’이라고 불렀다. 그 말에 애정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어린이가 나에게 직접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썼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잘하지 못하는 학생이 배제되지 않는 경기를 원했던 나는 고심 끝에 반별 달리기를 미션 달리기로 바꾸었다. 팔벌려 높이 뛰기를 열 번 하고 뛰거나, 이길 때까지 선생님과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숫자를 100까지 세고 뛰는 등 미션을 넣어 승부를 교란했다. 세모와 나는 손을 잡고 함께 뛰었다. 우리는 운동장에 타원형으로 깔린 흰색 석회가루 루트를 따라서 달릴 수는 없었다. 비틀비틀,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행보를 꼬아놓은 미션지 덕분에 세모의 달리기는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어린이들은 반사회적인 표현이 ‘재미’있어서 반복했다. 저속한 언어가 주는 해방감에 이끌렸다. 저속함과 세련됨을 구분하는 언어 규범은 어린이들 사이에서 통용되지 않았다. 혐오 표현은 재미를 넘어서는 윤리적인 문제지만, 어린이에게 ‘혐오 표현’과 ‘재밌는 표현’은 경계가 얇았다. 어린이들이 혐오 표현을 사용하지 않게 하려면 혐오 표현에 담긴 사회적 맥락을 이해시켜야 하는데, 그 맥락을 어린이가 전부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건물주가 되고 싶다는 어린이들이 단순히 어른들을 보고 따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돈을 벌고 싶고,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고 이해했다. 나는 돈을 버는 일보다 돈을 버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 직업을 예시로 들며, 큰돈을 버는 일도 좋지만 교사는 어린이를 가르치고 돌보므로 사회에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돈이라는 결과만 고려하지 않고, 직업의 의미를 생각하길 바랐다. 어떤 일상을 살고 싶은지 물었다. 학교폭력을 이해하려면 학교폭력을 더 깊이 바라봐야 한다. 악하고 나쁜 어린이를 비난하기 전에 피해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가해자에게 어떤 대안과 교육을 제시할 수 있을지 고심해야 한다. 교육청과 학교는 법적 책임을 피하려고 관료적 행정 절차를 밟으며 조심한다. 매뉴얼과 법령에 입각해 학교폭력에 접근한다. 안전한 방식이지만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나는 가해자들이 더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악부터 사악한 악까지 가해자의 스펙트럼은 넓지만, 이 스펙트럼을 이해할 대본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혐오를 통과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몇 사람이 필요할까? 사회 구조와 만연한 혐오가 문제라고 말할 수는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당장 필요한 말도,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되는 말도 아니었다. 나를 아프게 하는, 내 몸이 틀렸다고 말하는 세계를 넘어서려면 다른 세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사람에게서 왔다. 사람이 있어서 난관을 통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이들은 자주 ‘손절’이라는 말을 썼지만, ‘손절’할 수 없는 관계와 공간이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 사람이 있으면 상상할 수 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누군가의 곁에 있어 주는 일이 절실했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했다. 나는 세월호 참사 이후 교과서를 그대로 가르치는 일은 야만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세상은 도덕적이며 국가는 믿고 의지할 만하다고, 문제가 생기면 경찰과 소방관과 제도와 법이 지켜준다고 말했지만 이 모든 질서가 뒤틀리고 제도가 사람을 지켜주지 않을 수 있다는 진실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니면 말끝을 흐렸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지킨다고 하네요.” 시민이자 사회 구성원인 어린이를 더 알고 싶어서 어린이들이 들려준 언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린이들은 온몸으로 자신을 쉽게 단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어서 듣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어른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어린이를 인정하는 용기다. 규정하거나 설명하려 하지 않고 다채로운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용기. 오늘을 사는 어린이를 직시하면 되는 일이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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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가해자 어린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린이들에게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무균실이 아닌, 사회 속 어린이를 바라보고 관계 맺는 법 “너 탄핵 찬성이야, 반대야?” “뭐가 찬성이고 뭐가 반대인데?” “윤석열 대통령 좋아하면 탄핵 반대고, 싫어하면 찬성이야.” “난 그럼 찬성.” 책 속에 등장하는, 12·3 계엄 사태 이후 교실에서 들려온 평범한 어린이들의 대화다.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시민이자 구성원인 어린이들은 주체적으로 세상을 학습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그런 어린이의 모습이 항상 순진무구하고 무해한 것은 아니다. 어른들이 쉽게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어린이들도 분명 존재한다. 학교폭력 가해자인 어린이가 있다. 일베 용어를 사용하는 어린이가 있다. ‘건물주’와 ‘돈 많은 백수’가 꿈이라고 외치는 어린이가 있다. 세월호 참사를 배우며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이가 있다. 어떤 어른들은 그런 어린이들을 손가락질하며 ‘요즘 애들’의 세태를 걱정한다. 하지만 어떤 가해자 어린이는 자신의 가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일베 용어를 쓰는 어린이를 들여다보면 반사회적인 표현에 이끌리는 어린이들을 매혹시킨, ‘놀이’로 변질된 지금의 온라인 혐오 문화가 있다. 건물주라는 장래희망의 맥락 속에는 오랫동안 노동의 가치를 중요시하지 않아왔던 우리 사회가 있다. 세월호 참사를 글로 배우며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하는 어린이에게 사회는 도덕적이며 국가는 우리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며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거짓말을 하는 세상이 있다. 우리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어린이들은 사회의 어둠이나 병폐와 무관한 무균실 속의 존재가 아니다. 어린이들은 흔히 ‘꿈나무’나 ‘미래’로 불리지만, 그들이 자라나기 위해 뿌리를 박고 있는 시공간이 ‘지금 여기’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저자는 자신이 목격한 어린이들의 어두운 면을 생생히 보여주면서도, 그 이유와 맥락이 어른들이 만들고 유지해온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짚는 의무를 잊지 않는다. 나아가 어른들이 어린이를 위해 어떻게 행동하고 변화하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이상하고 괴상하고 불편하고 예측 불가능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만큼 알게 된 스스로 판단하고 욕망하고 행동하는 ‘불순한’ 어린이들 저자는 어린이 시절 빈곤과 방임을 경험했다. 가난한 부모님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하느라 어린 자녀들을 잘 돌보지 못했고, 또래들이 ‘상식’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체득하지 못해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어른이 되고 교사가 된 후에도 ‘이상하고’ ‘불편하다’고 여겨지는 어린이들에게 더 눈길이 갔다. 어린이를 이상적으로 묘사하거나 낙관적으로 예찬하는 일을 경계했고, 어른들이나 또래로부터 소외되는 어린이의 마음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렇게 어린이들과 ‘조금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학기가 끝날 때까지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어린이가 있는가 하면, 이유 없는 무한한 애정을 주는 어린이도 있다. 적나라한 표현으로 선생님을 욕하는 쪽지를 몰래 주고받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른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현명하게 연대하고 서로를 돌보는 어린이들도 있다. 남들과 다르다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 어린이와 걸그룹 춤을 추는 남자 어린이가 있다. ‘찐따’나 ‘금쪽이’로 불리며 세상으로부터 소외되는 어린이가 있다. 보호자의 죽음을 경험하고 힘겹게 애도 과정을 지나는 어린이가 있다. 저자가 응시한 어린이들은 몇 개의 단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그렇기에 오히려 길게 이어지는 스펙트럼 같은 존재였다. 수많은 어린이들을 만나며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저자가 어린이들과 맺은 관계는 다정하고 안온한 관계가 아니라, 안도할 수 없는 관계였다. 어린이들은 무조건 어른들의 말을 잘 듣거나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기준과 생각에 따라 판단하고 욕망하고 행동했다. 저자는 ‘순수함’이나 ‘어린이다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귀여워하거나 흐뭇해하는 시선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어린이들을 ‘불순한 어린이’라고 규정하고 글을 썼다. ‘불순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순조롭지 않은 삶의 단면들을 드러내고 싶어서다. 또한 독자에게도 그 ‘불순함’을 함께 들여다보기를 요청한다. 이 책은 지금까지 사회가 어린이를 규정하는 편협한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 이토록 다양하고 다채로운 입체적인 어린이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시민이자 사회 구성원인 어린이를 미래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서 관계 맺을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