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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한 사랑
문녹주
고블 202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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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누가 가장 불쌍한가
어머니의 도원향
금서의 계승자
그 사람은 죄가 없어요
화엄사 들매화는 끝내 흐드러지고
좀비 정국에 올리는 편지
지속 가능한 사랑
작가의 말

저자 소개 1

여성이고 양성애자다. 1991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수상한 사변 소설을 쓰고자 힘낸다. 한자문화권 전반의 역사·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편이다. 지금은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서울에서 산다. 단편선 『책에 갇히다』 『은하환담』 『영원히 행복하게 그러나』 『퍼스트 컨택트』 등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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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6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344쪽 | 400g | 128*200*22mm
ISBN13
9791159259463

책 속으로

어머니는 들짐승처럼 아무렇게나 죽었다. 한때 동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했던 가상 세계 제작자는 강릉에 있는 야산에서 눈에 덮인 주검으로 발견됐다. 향년 68세. 사인은 저체온증이었다. 술에 취해 노숙했다가 새벽을 넘기지 못한 것 같다고, 내게 시신을 인계한 경찰이 전했다.
--- p.36

그렇게 책도 전기도 변변찮은 시대에도 아이들은 구술과 흙바닥과 철필과 석필을 이용해 배우며 자라났다. 교사가 이만하면 배울 만큼 배웠다고 인증한 고아는 출판 단지 옆 남부시장에서 ‘양육비’라는 명목을 받고 팔려 나갔다. 몇 세대 지나지 않아 ‘책’은 곧 특정 지식을 학습한 암기 노예를 이르는 말로 뒤바뀌었다. 한옥마을 옆에 있는 남부시장에서는 곧 새로운 ‘책’도 취급하기 시작했다. 지식인을 매매하는 문화는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지만, 한국어권 서적을 취급하기로는 전주 남부시장만 한 곳이 없었다.
--- p.70

김제 황야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은 높은 담장을 넘어 두 사람에게까지 닿았고, 가람이 이해할 수 없는 맥락을 담은 말들이 전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훗날 그 말들이 심장을 움켜쥘 줄도 모르고, 가람은 전영이 이끄는 대로 그 옆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만큼은 소년이 소녀에게 사로잡혔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 p.112

두 망명자의 삶이 겹치는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울은 자기를 이르는 말을 얻었으며, 가람은 금서를 통해 세계를 들여다보는 방법을 깨우쳤다. 그렇게 된 이상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 p.144

“그 사람은 죄가 없어요. 그것만큼은 확실해요.”

결과적으로, 혁진이 죄가 없다는 주장은 방송을 오래 탔다. 희정의 얼굴도 가려졌다. 다만 보도 방향이 사전에 고지된 것과 조금 달랐을 뿐이었다. 공영방송의 탐사 보도 「살인마를 사랑한 여자들」 특집은 순식간에 사회면의 화제가 되었다. 흉악범과 사랑에 빠졌다는 여자들이 줄지어 방송에 등장했다. 모자이크와 음성 변조 사이에 희정이 있었다. 희정은 그렇게 이슬비의 명성에 추가되었다. 방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희정은 5년째 다니고 있던 건설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 p.149

하진이 희정을 바라보았다. 소년과 청년의 중간 즈음에 온 청년의 얼굴은 볕에 그을리고 매끈했다. 휘둥그레 놀란 얼굴에는 정말 젊다 못해 어린 사람들이나 보일 수 있는 천진함이 섞여 있었다. 불안과 가난을 기반으로 삼은 사람 특유의 위태로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도 했다.

희정은 한때 자신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생각했다. 그때 희정은 자신이 얼마나 위태로워 보였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 p.177

음식입출력기는 식문화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재료만 갖추어진다면 못 만들 음식이 없었다. 갓 뽑혀 나온 따끈한 음식은 나무랄 데 없었다. 음식입출력기 회사는 집에서 5성급 파인다이닝을 버튼 하나로 먹을 수 있다고 광고했다. 여러 요리사가 달라붙어 몇 년 동안 축적한 각국의 다양한 레시피는 기가 막혔다. 유명 식당에서는 레시피를 상품으로 내걸었다. 이용자가 올린 집밥 레시피도 마찬가지였다.
--- p.219

선재는 피식 웃고 화엄사 방향을 바라봤다. 신라 시대부터 이어온 절은 조선 시대에 한 번 불탔지만 재건되었다. 선재가 죽은 다음에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만 같았다.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한 자리에 버티고 섰던 건축물을 다음 세대로 넘기려는 사람의 유지가 절간 하나하나에 서린 듯했다. 왕이 증축한 절은 왕조가 없는 세상을 맞이했다. 왕이 없는 세상에서도 불목하니가 사라지고 공양주 보살이 사라졌다. 마침내 화엄사 들매화가 화엄사를 떠날 차례가 된 것인지도 몰랐다.
--- p.265

온 나라가 초상집이었습니다. 서울은 수월하게 좀비를 진압했다고 들었습니다. 워낙 인구가 많으니 희생자의 절대 수가 만만치 않았다지만요. 부산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습니다. 좀비들은 오르막도 내리막도 힘든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부산에서 살아남기는 녹록지 않지요.

산이 많아 다행인 지역에 사는 저는 평야 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염려했습니다. 동시에 비겁하게도 제가 평야 지대에 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산이 많은 대도시에 산다는 것은 좀비 사태에도 별다른 불편을 겪지 않고 통제 구역만 피해서 일상을 그대로 영위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김제나 나주평야 지대의 사람들은 도대체 좀비를 어떻게 맞이했을까 상상했습니다. 그런 곳에 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지역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궁금했습니다. 마침 제게는 김제에서 농사를 짓는 사촌이 있지 않았습니까.
--- p.289

고개를 들자 언니의 얼굴이 보였다. 언니는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호기심과 당혹이 섞인 표정이었다. 정장 입은 어깨너머로 잠긴 방이 흘깃 들여다보였다. 방 안도 언니도 보고 싶지 않았다. 곧 내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언니가 저 방을 먼저 보여주려고 작심했다던 사람이 아주 지긋지긋했다. 아직 엄마도 못 봤다니, 엄마, 엄마야말로 내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 p.340

출판사 리뷰

탁월한 상상력으로 직조된 동양적 사변소설 세계관

문녹주 작가의 특징은 사변소설의 가장 한국적 현실, 혹은 동아시아적 감수성을 잘 설계해낸다는 것이다. 또한 소설집에 등장하는 지역만 해도 충청남도, 부산, 전주, 구례 등으로, 서울 중심주의적인 한계를 벗어나 있고, 다양한 방언 또한 본문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어머니의 도원향」에서는 심지어 상고한어 재구음(고대 중국의 한자 발음을 현대에 추정한 것)이 인물 간의 이해에 대한 핵심 열쇠로 등장한다. 가상 세계를 가장 탁월하게 설계하던 제작자였으나,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어머니가 남긴, 비밀스러운 세계로 향하는 암호로 고대 중국어가 활용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성 정체성마저 달라진 현재, 어머니가 살아 있을 적 보지 못했던 자신의 진정한 모습으로 가상 세계 속 어머니와 마주하며 그 세계 속에 서려 있는 감정과 마주한다.

문녹주의 시선은 자칫 배제되기 쉬운 현실까지 가닿는다. 기후 변화로 인해 식량 생산이 어려워져 음식입출력기가 대중화된 미래, 주인공 선재의 어머니는 화엄사의 공양주였으나 음식입출력기로 인해 실직하고 만다(「 화엄사 들매화는 끝내 흐드러지고 」). 그리고 수년이 흘러 화엄사로 다시 찾아온 선재는 화엄사의 들매화를 기후 변화라는 이유와 정부 주도로 다른 지역에 옮겨야하는 행정대집행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화엄사 스님들은 행정 명령에 결사 반대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선재와 화엄사와 얽힌 과거사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가족과 관계된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것임이 밝혀지고, 이후 선재는 새로운 방식으로 화엄사와 자신의 관계로 나아간다.

이 소설에서 문녹주는 기후변화로 인해 완전히 달라지고 있는 사회상을 식문화와 관련된 기술 발전과 그에 따른 소비 변화를 탄탄한 핍진성으로 그려내면서 어떻게 그것이 한 가족의 역사에 영향을 줬는지, 기후 변화와 화엄사 들매화를 둘러싼 행정 소동을 연결지으며 어떤 사회적 갈등이 기후 변화 이후 세계에서 어떻게 벌어지는지를 전개해 살아 있는 세계를 보여준다.

목재가 절멸하고 전주에 세워진 새로운 출판 시장에서 노예로 팔려다니는 인간 ‘책’들이 등장하는 「금서의 계승자」에서 역시 중심 소재인 ‘책’은 흥미로운 세계관에 보탬될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간의 성장과 관계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노예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책’이라고 불려지지 않을 때, 이들은 ‘책’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마음을 지탱하는 삶


『지속 가능한 사랑』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과거나 미래, 혹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되었든 인간은 다른 인간에 의해 정서적으로 상처받고, 힘을 얻고, 그동안 축적된 관계성에 의해 복합적인 감정을 갖는 존재라는 것이다. 살인마로 오해받는 한 죄수를 사랑하는 여성이 진실에 따라 점차 변화하게 되는 과정(「그 사람은 죄가 없어요」)을 그린다거나, 지역 내 이주민들을 위해 희생한 언니(「좀비 정국에 올리는 편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화자에서 우리는 다양한 층위의 관계성에 따른 깊은 정서 변화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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