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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내게 하나뿐인 당신
장욱진 그림
옹기장이 200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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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서문 _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아버지의 아프고 슬픈 음화 같은 기억_ 한승원

딸의 아버지
장경수 _ 우리 아버지, 장욱진

아들의 어머니
김수환 _ 어머니, 우리 어머니
이윤택 _ 나를 부끄럽게 하는 이바구
최완수 _ 형을 언니라 부르게 하신 뜻
이홍렬 _ 꿈에서 드린 용돈 이십만원

딸의 어머니
최 윤 _ 우수의 궁전
손 숙 _ 그래도 기다리는 마음
홍신자 _ 내 딸로 되살아나셨나?
김점선 _ 효도할 시간에 공부하라시더니

아들의 아버지
한승원 _ 내 불 내가 켜들고 내 게를 잡아야 한다
이철수 _ 취조실에서 지내게 된 별난 제사
정동영 _ 애기면장의 아들 사랑
주철환 _ 내 거울 속의 서글픈 미남

도판 목록 _ 장욱진

저자 소개 1

그림장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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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1월 26일 (양력 1918년 1월)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난 장욱진은 일제시대 때 동경의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으며, 해방 직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잠시 근무한 후,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봉직한 외에는 줄곧 한적한 시골 - 덕소, 수안보, 신갈 등지에 화실을 마련해서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했다.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신사실파 동인으로 향토성과 서정성이 짙은 화풍을 일구었으며, 만년에 중앙일보 제정 에술대상을 받았다. 6*25 동란 때 그린 에서 전란을 이겨내려는 꿈을, 작고하기 직전에 그린 에서 죽음의 예감을 그림에 담았다
1917년 11월 26일 (양력 1918년 1월)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난 장욱진은 일제시대 때 동경의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으며, 해방 직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잠시 근무한 후,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봉직한 외에는 줄곧 한적한 시골 - 덕소, 수안보, 신갈 등지에 화실을 마련해서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했다.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신사실파 동인으로 향토성과 서정성이 짙은 화풍을 일구었으며, 만년에 중앙일보 제정 에술대상을 받았다. 6*25 동란 때 그린 에서 전란을 이겨내려는 꿈을, 작고하기 직전에 그린 에서 죽음의 예감을 그림에 담았다. 그는 작품에서 주로 주변풍경, 가축, 가족을 소재로 다루었으며, 그 안에서 유희적인 감정과 풍류적인 심성을 표출했다. 또한 동양화와 서양화의 장벽을 넘나들며 우리의 전통을 현대에 접목시켜 조형적인 가능성과 독창성을 구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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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5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47쪽 | 450g | 154*210*20mm
ISBN13
9788990832047

책 속으로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아버지의 아프고 슬픈 음화 같은 기억

부부간에 생이별을 하게 되면 환장하게 좋았던 일들만 새록새록 떠올라 목 놓아 슬피 울고, 부모 자식 간에 생이별을 하면 궂은일들만 굽이굽이 떠올라 통회(痛悔)하면서 운다고 들었다.
나는 영화나 티브이드라마를 보면서 곧잘 눈물을 흘리곤 하는 사람인데, 이상스럽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속으로 통회하며 이 악물고 소리 없이 울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던 열아홉 살 되는 해 나는 시골 아버지에게로 가서 농사와 어업을 하며 살아야 했다. 아버지께서 두 해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절름거렸으므로 농사와 바다에서 김양식을 할 수 없었고, 살림살이는 극도로 어려워졌다. 나는 머슴살이를 하듯이 살림살이를 이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무렵 동창 친구들은 흰 모시옷에 밀집모자를 쓰고 한 손에 책 들고 다른 한 손에 부채 들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놀러 다녔고 바다에서 선유도 했다. 친구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일을 거들지 않고 신선처럼 배회했다. 그들은 도회에 나가 취직하여 살 꿈들을 꾸고 있었다. 어떤 친구들은 당시 유행하던 올백 머리를 하고 귀 밑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다. 영화배우처럼.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머리를 쑥대처럼 길렀다. 그런 채로 농사를 지었다. 물허름한 일복을 입었고, 장기질도 하고 두엄도 짊어져 날랐고, 산에서 땔나무도 해오고 울력도 나갔고, 장에 쌀을 팔기 위해 지게를 짊어지고 나가기도 했다. 그때 나는 장차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은밀하게 소설책들과 철학 서적들을 구해 읽고 있었고,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잡지 《사상계》를 정기 구독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버지는, 그렇게 부지런히 일을 하는 내게 이발소에 갈 돈을 주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마을에 나갔다가 오시면서 이발사들이 쓰는 가위와 바리캉이라는 이발 기계를 손에 들고 왔다.
“악아, 내가 머리 깎아주마. 이리 오너라. 젊어서는 동네사람들 이발 다 해주었더니라.”
아버지는 동생들에게 앉을 의자와 책보자기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책보자기를 목에 둘렀다. 아버지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내 주위를 절름절름 돌아다니시면서 머리를 자르기도 하고 깎기도 했다. 나는 눈을 감고만 있었다. “다 됐다. 머리 감아라.” 머리털을 떨고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의 경대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순간 나는 놀랍고 슬펐고 울분이 끓어올랐다. 내 머리는 팽이처럼 쫑쫑하게 볼품없이 깎여 있었다. 내가 늘 물에 비춰보곤 한 내 얼굴이 아니었다. 소인스럽고 옹졸하고 쩨쩨하고 비굴해 보였다. 그 어떠한 큰일도 해내지 못할 바보로 보였다. 내가 내 발로 걸어 이발소에 가서 내 돈 내고 이발사에게 이렇게 저렇게 깎아달라고 요구하여 나를 나답게 만들지도 못하는 주제에 하이칼라머리를 하고 살면 무얼 할 것인가.
내 가슴 속에서는 뜨거운 불덩이 하나가 뭉쳐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바느질 상자에서 가위를 집어 들고 내 머리들을 싹뚝싹뚝 잘라버렸다. 동생을 불러 바리캉을 잡혀주면서 나의 머리를 스님들의 그것처럼 밀어버리라고 명령했다. 내 동생은 히히히히 하고 웃으면서 내 머리를 하얗게 만들어버렸다. 동생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를 뽀도독 악물고 있었다.
그 스님 머리를 한 내 모습을 아버지는 외면해 버렸다. 여느 때 성질 꼬장꼬장하고 급하고 명분 어린 바른 소리 잘하시는 아버지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 이놈, 애비가 성치 않은 다리 이끌고 힘들게 깎아준 머리를 그렇게 매정스럽게 깎아버리다니, 이런 못돼 먹은 버릇을 어디서 배워 왔느냐!”하고 호통을 칠 법한데 아버지는 끝내 외면해 버렸다. 물론 그 이후 나는 나의 분수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나를 통회하게 한 것은, 그때 스님의 머리를 하고 있는 내 머리를 애써 외면하시던 그 모습이었다. 누구든지 아버지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는 다 통회한다. 그 통회는 아들딸을 거듭나게 한다. 나의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모든 것이 통회이고 깨달음으로 가는 고갯길이다. 아, 아버지 우리 아버지. 이 책이 독자 여러분에게 거듭나게 하는 길잡이가 되어 주기 바란다.

2005년 복사꽃 만발한 날, 해산토굴 주인 한승원

--- 서문

출판사 리뷰

장욱진 미술문화재단의 고문이자 故 장욱진 화백의 맏딸인 장경수씨는 부친과 각별한 부녀의 정을 나누었던 딸이다. 산책을 즐기는 부친과 함께‘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지루한 시간이었을 텐데도 으레 그렇게 따라다니는 것인 줄 알고 아버지를 달랑달랑 따라다니기도’했으며, 남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선문답 같은 부친의 이야기를 ‘통역’해주기도 하고, 부친과 팔짱을 끼고 물만두나 호떡, 핫케이크를 사먹으러 다니기도 했던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안고 있다. 사십이 넘은 나이에 식구를 놓아두고 훌쩍 덕소로 떠나 그림을 그리던 아버지를 주말에 종종 찾아가면, 술을 마시든지 산책을 하느라 집에 부친이 없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 부엌에 들어가보면 삼등분이 되어 남아있는 밥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냄비에 그날 먹을 밥을 지어 정확하게 삼등분을 해놓고 끼니 때마다 삼분의 일씩을, 아무 반찬도 없이 들었던 그의 아버지. 그는 그렇게 나뉘어져 있는 밥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장경수씨의 이 글 속에는, 그간 미술평론가나 생전 가깝게 지냈던 제자나 후배 등 미술 관계자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화가 장욱진의 생활적인 면모, 가족 간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본문 속에 담겨진 그림이 더욱 가깝게 다가오는 것 또한 그 때문이 아닐까.

고위 성직자로서 한국의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공헌한 김수환 추기경. 그를 가톨릭 성직자의 길로 이끈 그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 김수환 추기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신 분, 나를 있게 하고, 나를 가장 사랑하신 분’‘오로지 자식들을 피어나게 하기 위해 당신은 밑거름이 되신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옹기장사를 하신 아버지와 혼인하신 뒤로 평생을 가난에 쫓겨 여기저기로 이사를 다니며 옹기나 포목을 이고 그것을 파는 것으로써 생활을 하셔야 했던, 어머니의 팔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추기경은 초등학교 일학년때에 아버지를 여읜 후, ‘아비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절대로 안된다시며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 말엽에 학병에 끌려갔을 때의 일이다. 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어머니였지만, 자식이란 크면서 어머니의 품을 좀 떠나고도 싶어하는 까닭에 종종 갈등을 느꼈는데, 그 당시 그는 ‘만약 죽는다면 어머니가 보시지 않는 먼 곳에서 죽고 싶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죽는 것을 보시고 괴로워할 것을 차마 보지 못할 것 같았는데, 학병으로 나가 막상 죽을 위험에 임박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정반대로 어머니가 보고 싶고, 어머니 품에서 죽고 싶은 강렬한 소망에 사로잡혔던 일을 고백하고 있다.

국립극단 예술감독인 이윤택씨의 어머니는 집 밖으로 도는 아버지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팔도를 떠돌며 바람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준 집을 지키면서 딸을 키우고 미군부대 통조림을 따는 노동을 하면서 집나간 아버지를 기다리신 집지기였다. 그 지킴의 인내 끝에 삼동 외동아들이 태어났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역마살을 잠재울 수는 없었고, 그때부터 어머니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그를 아버지처럼 섬기며 아들에게 절대적인 종교와도 같은 기대를 하게 되었다. 자라는 동안 그는 그런 어머니가 부담스러웠지만, ‘오늘의 나를 키워낸 것은 역시 어머니의 독특한 교육관 때문이었다’고 회상한다. 오만하고 이기적인 선민의식을 잔뜩 부추긴 것이 어머니의 자식교육이었지만, 그 힘이 이윤택 씨를 지탱케 하고 어려운 현실의 고비를 넘기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누가 뭐래도 너는 이율곡 같은 선생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를 절망에서 구해내고 악의 구렁텅이나 소시민적 일상성에 몸을 내맡기지 않게 한 ‘의식의 힘’이었다. 이 의식을 끊임없이 환기시켜준 것이 잔소리였던 것이다.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 실장 최완수씨의 어머니는 탐미적이고 결벽성 있는 성품의 최완수 씨가 품위와 법도를 잃지 않도록 배려키 위해 구십평생을 헌신하셨던 분이다. 어릴때부터 우리 옷을 입힐 때는 언제나 두루마기를 갖춰 입히고, 신발도 구두를 수제화로 주문해 신게 하셨던 그의 어머니는 지난해 타계하시기 전까지 다달이 의복과 음식을 챙겨 보내시며 혹시 최완수 씨의 결벽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신 분이다. 그의 어머니의 자식교육은 남다른 데가 있었는데, 우선 말투가 남달랐다. 속되거나 상스러운 말투를 쓰지 못하게 하셨고, 때론 남들과 다른 용어를 쓰도록 가르치셨는데, 그 한 예가 형을 언니라고 부르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상류사회 언어라는 것을 백아 김창현 선생이 일중 김충현 선생을 언니라 부르는 것을 보고 깨닫게 된 것. 또한, 무슨 날만 되면 문 앞에 황토를 놓고 떡시루를 쪄서 고사를 지내면서 그 하루는 특별히 근신하도록 가르치셨는데, 대개 정월 한달과 시월 한달은 거의 근신하며 지내도록 하셨다. 근신하는 것을 체질화하며 성장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인격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집 밖에 나가서 음식을 먹는 것을 금하시며 인내와 위생, 식구들 사이의 결속을 지켜내기 위한 기초교육을 시키셨던 것이다.

방송인 이홍렬은 단신과 가난이 가져다주는 오기, 다혈질에 급한 성격으로 어린 시절 간혹 친구들과 다툼이 있기도 했는데, 싸운 뒤에는 울면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밖에서 생긴 일은 철저하게 밖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어머니가 이를 용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어린 그에게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워주시고 가정 내에서는 바깥일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가족과의 사랑을 쌓아가야 함을 일깨워주셨던 것. 그가 연예인 생활을 하며 최고로 치는 덕목이 신용과 책임인데 이 대부분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말씀이 아니라 생활 속 행동으로 배운 것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직 너무 젊은 나이, 쉰둘에 돌아가셨다. 의사도 포기한 암말기의 어머니를 업고 절박한 심정으로 안수기도를 받으러 돌아다녔지만, 그가 연예인으로 데뷔하는 것도 채 보지 못하시고 먼 길을 떠나고 말았는데, 제대로 장례를 치를 형편이 못 돼 교회 사람들이 와서 염을 하고 일체를 돌봐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 군대에 있을 때 어머니가 보내오신 편지를 꺼내 읽는 그. 누렇게 바랜 그 편지에는, 맞춤법도 틀리고 삐뚤삐뚤한 글씨로 ‘홍렬아...’하고 부르시며 안부를 걱정하는 어머니가 계시다.

소설가이며 서강대 불문학과 교수인 최윤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있어서 ‘우수의 궁전’이다. 성심여학교, 일본의 동경 앵정고등여학교, 이화여전, 중퇴로 끝난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거쳐 화원고등학교 교사, 중앙여고교사, 문화창조사와 여성문화사 편집실 근무에 이르기까지, 고생해서 배운 신학문을 자식교육에나 바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였다. 첫아이를 일찍 잃고 지금 맏이가 된 그의 언니가 어릴 때 심히 아파 아이를 또 잃을 것이 겁나 병구완을 위해 잠시 그만두려던 사회생활이 이후 세 딸의 출생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그가 어머니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두 가지. 하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눈을 뜨자마자 발견하는, 책 앞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 또 하나는 가족의 저녁생활이 시작되기 전이나 식구가 모두 자리에 누운 늦은 밤 불꺼진 부엌에 가만히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뒷모습. 그 뒷모습에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우수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고 회고한다.

연극인이자 방송인인 손 숙은 자랄 때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미움과 사랑이 언제나 엇물려 있다고 회고한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천석꾼의 이대독자로 귀하게 자라 지독한 이기주의자였고 철없었던 동갑나기 아버지에게 시집온 어머니. 한 집안에 양가 ? 생가시어머니, 생가시아버지, 서시할머니가 계셨고, 앞집엔 시삼촌댁, 시오촌댁들이 삥 둘러 동네를 이루면서 살고 있는 집이었다. 번잡하고 엄한 시집살이에 휘둘려 있는 동안 신랑은 공부한다고 훌쩍 일본으로 떠나더니, 새 여자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더니 그 ‘새 여자’는 아버지 친구분들 사이에서나 직장에서나 본부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무관심과 비례해서 어머니는 점점 거세지면서 그녀와 형제들을 몰아대기 시작했다. 그쪽 아이들과 비교해서 내 자식이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어머니는 자식들을 모두 데리고 서울살림을 시작했고, 자식들이 모든 분야에서 일등을 하기를 바라셨다. 터무니없는 욕심으로 그들을 들볶는 어머니가 참으로 부당하게 느껴졌던 그녀는 가엾은 어머니를 미워하고 어머니가 가슴아파할 것이라면 무엇이건 해서 약올려주고 싶기도 했다.“지긋지긋한 집구석 미련 없이 떠날거다”하며 대학도 졸업하지 않고 가난한 연극하는 남자 만나 어머니의 생명을 건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을 했지만, 집을 떠나던 날, 그녀가 떠나는 것도 내다보지 않고 방 안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너무도 안쓰럽고 가여워서 그녀는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웃는돌무용단>의 대표이자 무용가인 홍신자 씨의 어머니는 “여자는 남자와 달라 한번 혼인한 다음에는 배울 기회가 없으니 혼인 전에 남자보다 더 많이 배워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시곤 했다” 그래서 그녀가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웅변하는 것도 말리지 않고 아침마다 “목이 쉰다”며 식초에 달걀노른자를 섞어 먹으라고 주셨다. 그녀는 미국에 유학을 가서 고생을 끔찍이 하며 무용 수업을 하는 동안 점점 더 남편과 자식들에게 헌신적이었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맹목적인 그리움이 새삼스럽게 쏟아졌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녀가 미국에서 한 무용 공부의 결실을 한국 관중 앞에 내놓는 공연을 했을 때, 그것은 한국 무용계는 몰론, 그녀의 어머니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아름다움의 표현이라는 무용에 대한 고정적인 환상을 완전하게 깨버리는 듣도 보도 못한 춤을 추었던 까닭에 그 뒤로 어머니, 아버지와 사이가 매우 서먹서먹해지고 말았다. 게다가 혼기가 찰 대로 찬 딸에게 어머니는 만나기만 하면 ‘혼인하라’는 말뿐이어서 그녀는 되도록 부모와의 만남을 피하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만난 사람과 혼인을 했던 터라 어머니에게 미처 보일 틈이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한 해 뒤에 딸을 낳았는데 그 딸아이가 어머니의 재생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화가 김점선의 어머니는 일제 치하의 개성에서 태어났고, 그녀 역시 개성에서 태어났다. 6ㆍ25동란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도 개성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린시절 하루종일 실컷 놀고 집에 들어가 오늘은 이런저런 놀이를 했다며 즐겁게 떠들면 어머니는 자기도 어려서 그런 놀이를 했었다며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런 어머니가 친구같이 여겨졌고,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그녀와 통하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어린 시절,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분명한 잘못을 했을 때에 조용히 그녀를 불러 방에 그녀 스스로 차근차근 자신이 한 일을 얘기하도록 했다.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의 시간이었다고 그녀는 기억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말하는 것을 거들어서 결국 그녀가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본인의 입으로 앞으로 어떻게 고쳐나가겠다는 점까지 말하도록 자연스럽게 그녀를 이끌었던 것이다. 후회와 뉘우침과 각오의 눈물을 어머니 앞에서 흘리면서 오래오래 울었던 그녀. 그럴 때 그녀의 어머니는 인류를 대표한 스승이고 그녀의 영혼을 낳아준 아버지이고 그녀를 사랑으로 일깨워주는 지도자였다. 그녀는 수없이 되풀이되는 그런 울음을 통해 어머니 앞에서 커갔다.

소설가 한승원의 아버지는 몸집이 매우 작은 분이었지만 당신의 왜소함을 단단함과 야무짐으로 극복하였던 분이다. 어머니를 닮아 키가 큰 그는 가시내처럼 순했고, 아버지를 닮아 키가 작달막한 그의 형은 똘똘하고 야무졌다. 아버지는 대무른 그를 싫어했고, 대가 찬 형을 좋아했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가 사고로 오른쪽 다리가 5센티미터쯤 짧아진 이후 제대로 농사일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형편이 어려워졌다. 결국 열아홉살 무렵, 스스로 농사짓고 김양식하면서 소설을 쓰겠다고 책보따리 싸들고 집으로 내려왔는데, 어느 날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쟁기짐을 지우더니 앞장서서 소를 끌고 마을앞 들논으로 나갔다. 한번도 쟁기질을 해본적이 없던 그는 아버지의 채근에 못이겨 쟁기질할 놉을 대신하여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렸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소 가는 대로 따라다니며 소의 왼쪽 앞발이 딴 곳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고삐질을 시작하였다. 새때쯤에 그의 아버지는 주전자와 큼지막한 놋그릇을 들고 내려와 잠깐 쉬었다가 하라며, 손수 사발에 술을 따라주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쟁기질을 느그 삼대 할아부지한테서 배웠더니라. 그 할아부지가 그러시더라. 쟁기짐을 짊어질 수 있는 기운만 있으면은 쟁기질을 할 수 있다고. 남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못할 일이 어디 있다냐? 좌우간 가능하면 남의 그늘에 묻혀 살지를 않아야 쓴다. 내 불 내가 켜들고 내 게를 잡으면서 살아야 쓴다.” 그는 이 일을 오랫동안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다.

목판화가 이철수의 아버지는 영화, 그림 뿐 아니라 사실 종횡무진의 박식이어서 어느 자리에서고 대화를 이끌어 가는 데에 막힘이 없고, 화제가 풍부해서 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현주 목사가“이야기 솜씨로 말하면 아들보다 화가의 부친인 운남 선생께서 훨씬 탁월하셨고, 난 그분의 재미있고도 유익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워서 더욱 자주 갔다”했듯이 그의 부친은 사람들과 어울려서 이야기를 나누고 차와 음식과 마음조차 나누기를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가 생애 마지막 사업으로 시작한 표구점 ‘화산방’이 강북구 한 모퉁이에서 나이드신 이들이 격의없이 모이는 작은 ‘그레이구락부’가 되어있는 것만으로 그의 부친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친화력이 잘 드러난다. 부친의 성격과 솜씨를 두고 군인감이라는 이와 예술가 했으면 좋았겠다는 이가 있는데, 그가 보기에는 손으로 하는 일이면 무엇이라도 승산이 있었을 듯하다. 조각나무에 작은 그림을 새겨넣은 목걸이에서 벼루 상자, 과자 그릇 뿐 아니라 책상, 머릿장, 사방탁자까지를 썩 볼만하게 만들 수 있어서 지금 그의 곁에나 부친의 곁에 있는 물건이 대개 부친의 솜씨이거나 부친의 손길이 간 것이려니 하면 틀림없다고 한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의 부친은 남원 고보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스물여섯살 때부터 면장을 지냈다. 젊어서 면장이된 부친의 별명은 ‘애기 면장’이었다고 한다. 그 ‘애기 면장’은 곧 타고난 친화력과 ‘보스기질’로 주민들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는데, 하나같이 허약했던 그의 네 아들들이 전쟁의 혼란시대의 와중에 제대로 치료받을 틈도없이 차례차례 죽어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다섯 번째로 태어난 그는 기억에도 없는 형님들을 제치고 장남이자 집안의 십삼대 종손이 되어야 했다. 이미 네 아들을 먼저 잃은 아버지에게는 그의 존재가 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염려가 앞섰겠으나, 아버지의 적극적인 비호아래 어린시절을 실로 자유롭고 거리낌없이 세상의 모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 속에 묻혀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철저하게 자율적인 교육을 강조하신 분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각인된 아버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듣고 계신 모습으로 남아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며 친구들과의 사이의 일들을 아버지에게 들려드리기를 좋아했다. 그럴 때면 눈매가 매섭고 근엄한 표정의 아버지는 늘 ‘그래? 음... 그래?“하며 진지하게 들어주시곤 했던 것이다.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주철환의 아버지는 늘 그에게 미안해하셨다. 그가 여섯 살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서울에 사시던 아버지의 손아랫누이인 막내고모가 그를 양자삼아 데려가 키운 것이다. 또순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고모님은 억척스런 분이셨고, 생활력이 매우 강한 분이셔서 돈암동 시장에서 가게를 하며 알뜰하게 돈을 모아 신당동에 여관을 장만하신 것. 그의 고모님은 그가 빗나가지 않게 하려고 엄한 교육을 펴셨다. 흔히 아버지의 부재를 권위의 부재로 해석하는 일이 있는데, 그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빈 자리를 고모님이 대신한 셈이다. 평생을 방랑벽을 버리지 못하고 사신 아버지의 낙천주의는 생활고와는 조화를 이룰 수 없었고, 아버지는 서글픈 노년을 맞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아기르며 그의 아버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다만 겉에서, 그것도 거리를 두고 무심히 보았을 뿐이다.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눈치채지 못하고 도리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는 이제 아버지 무덤가에 풀뽑는 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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