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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
대수롭지 않은 평행우주 고양이 심해의 파수꾼들 마인드 리셋 여자의 계단 작품 해설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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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레나는 특유의 발랄하고 생동감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비록 찰나지만, 선생님은 그때 우연히 평행우주를 엿본 건지도 몰라요.” 응? “아니, 분명해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가능한 세계가 만들어져요. 그것도 무한히. 선생님은 하나의 선택을 한 거고, 그때 갈라지듯 다른 세계가 만들어졌을 거예요. 그 세계를 엿본 게 분명해요. 놀라워요. 나 말고도 다른 세계로 건널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어떤 선택을 통해 선생님이 지금 이 바에 앉아 있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일찍 자고 일어나 실험실로 나서는 선생님이 사는 세계가 있고, 집에서 맥주를 마신 뒤 지각을 한 선생님이 사는 우주도 저기 어디엔가……” 잠깐! 손을 들어 그녀가 말을 멈추게 했다. 레나는 말을 멈췄지만, 진심으로 놀라운 무언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상에, 평행우주라니.
--- p.83 태주를 뒤따르며 복도를 통과하는데, 갑자기 그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본다. 그의 동공 반응에서 불안을 읽어낸다. 왜? 나는 의아해 그를 쳐다본다. 순간 캐터필러와 닿은 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설마…… 지금 내 몸체의 중량을 걱정하고 있는 건가? 맙소사. 인식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결과가 된다. 안 돼. 하지만 늦었다. 2층 바닥 전체가 무너져 내리며, 우리는 밑으로 끝없이 추락해 간다. 이미 모든 것을 태우고 재만 남은 2층을 지나 더 깊숙이, 밑으로, 어둠으로…… 그리고 암전. [관찰대상자 기억 뉴런 신호 반응 없음] 나는 또 그를 구하지 못했다. --- p.13 그중 단 한 마리만은 아무리 내쫓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녀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모이 먹기에 정신없는 다른 녀석들처럼 고개를 까닥이던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쳤다고 여긴 건 과장된 느낌이었을까? 녀석의 시선은 미동도 없이 나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외형은 다른 비둘기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생물의 몸체가 아니었다. 금속이나 플라스틱도 아닌 한 번도 보지 못한 재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걸음을 쫓듯 움직이던 고갯짓과 시선. 그건 마치 움직이는 피사체를 따라 작동하는 CCTV의 그것과 같았다. 저게 뭐지? 순간 여인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른 척해. 나는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서둘러 다가갔지만, 발걸음에 놀란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오르자, 한두 마리씩, 모든 비둘기가 함께 날아올라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 p.65 그곳에는 아직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캡슐 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으로 아이들을 쳐다보는 로비 옆으로 닥터 주가 다가왔다. 로비, 너처럼 특별한 아이들이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로비는 닥터 주를 쳐다봤다. 실험은 실패하지 않았어. 오히려 육지에서 온 손님들은 충분히 만족하고 돌아갔단다. 그래서 이 아이들도 계속 성장할 수 있게 되었어. 로비, 네 덕분에. 로비는 꼼지락거리는 아이들을 쳐다봤다. 이 아이들도 성장하게 되겠지. 그러면 너처럼 특별해지고 싶을 거야. 그래서 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또 네가 지나간 삶을 따라가고 싶겠지. 너처럼 특별한 아이가 되고 싶어서. 특별한 아이. 로비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면 나도 무처럼 될 수 있는 건가? 로비는 늘 가슴속에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무를 떠올렸다. 무처럼 특별한 사람, 로비만의 신화를 만들고 싶었다. --- p.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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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존재, 타인의 고통을 묻는
조용한 사유의 SF 소설들 기억은 고통의 형상으로 존재하지만, 그 고통을 신체에 새기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자신의 삶이 기록한 서사의 책임을 기꺼이 감내하는 주인공들. 기억은 조작이 가능하고, 얼마든지 과거의 내가 아닌 채로 다시 살 수 있지만, 차마 그 생을 선택하지는 못하는 이들의 영혼을 작가 이준희는 가만히 위로한다. 평행우주를 유영하는 마음들, 조용한 혁명처럼 다가오는 이야기들 장르로서의 SF가 아니라,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문학적 감각으로서 SF를 다룬 이 소설들은 현실과 비현실, 과학과 감정, 세계와 개인의 경계를 부드럽게 넘나든다.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던 일상 속에 한순간, 미세한 충돌처럼 개입하는 다른 차원의 가능성. 기억을 지우는 시술을 받으려는 사람들, 심해 도시에서 태어난 최초의 아이, 평행우주를 넘나드는 고양이, 시간을 조작하는 기술들. 이 모든 낯선 요소들을 이준희는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설득력 있게 배치한다. 이 책은 ‘마음의 소설’에 가깝다. 세계가 무너질 때, 끝까지 남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진실을 되새기게 한다. 그 모든 평행우주에도 여전히 고양이 한 마리가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름답고 이상한 상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소설집이다. 세상의 존재들에게 안부를 묻는 마음 인간의 의식은 실제보다 뒤처진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은 무수히 많은 감각 신호 중 일부만 받아들일 뿐이며, 그것도 약 1/3초가 지난 뒤에야 의식한다고. 우리가 현재라고 의식하는 세계는, 사실 1/3초 늦은 세계인 셈이다. 또 하나. 인간은 50밀리 초(0.05초) 이하로 제시되는 자극에는 반응하지 못한다고 한다. 100밀리 초(0.1초) 이상은 제시되어야 반응할 수 있다고. 분명 존재함에도 우리가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자극들, 실제와 의식 사이에 놓인 1/3초 지연된 세계 같은 것들. 늘 이런 세계가 궁금했고, 끌렸다. 보통의 감각과 언어로는 놓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가능성으로 존재해야만 더욱 선명해지는 세계. 이 책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은 그 가능성의 세계에 사는 존재들에게 안부를 묻는 마음으로 쓴 것이다. _작가의 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