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앞머리에 덧붙이는 글 - 4
시학 - 11 - 아리스토텔레스 시론 - 32 - 호라티우스 시를 위한 변호 - 53 - 필립 시드니 시법 - 74 - 니콜라 부알로 괴테와의 대화 - 103 소박 문학과 감상 문학 - 122 - 프리드리히 실러 『서정 담시집』 서문 - 139 - 윌리엄 워즈워스 시의 옹호 - 162 - 퍼시 비시 셸리 글짓기의 철학 - 186 - 에드거 앨런 포 프랑스 상징주의 - 209 시와 추상적 사고 - 238 - 폴 발레리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 276 - T. E. 흄 시인에 대하여·젊은 시인에게 - 305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의 상징주의 - 326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시의 증거 - 344 - 폴 엘뤼아르 |
김석희의 다른 상품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기원전 384년에 마케도니아의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왕 아민타스 3세의 주치의였다. 성씨가 따로 없던 시대여서 이름이 그냥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왕자 필리포스와 어릴 적부터 친구로, 궁전에서 함께 자랐다. 18세 때 아테네에 있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입학했고, 나중에 그곳의 교수가 되었지만, 기원전 347년에 스승이 타계하자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필리포스 왕의 궁전에 머물면서 왕자(훗날의 알렉산더 대왕)를 가르쳤고, 기원전 335년에 아테네에 돌아와 리케이온에 자신의 학원을 차리고 12년 동안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다. 시내에서 리케이온에 이르는 산책로를 오가면서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곤 했는데, 이런 교수법 때문에 ‘소요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기 제자들의 수강 노트이다. 물리학·형이상학·논리학·수사학·정치학·윤리학 등 다양한 주제에 걸친 약 400편의 글이 그의 저술로 추정되고 있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아테네에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고, 마케도니아 출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사제에 의해 신에 대한 불경죄로 고발당했다. 이듬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학원을 제자에게 물려준 뒤 어머니의 고향인 할키스로 망명했고, 그해 말에 병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에 대한 하나의 반론으로 쓴 것이다. 플라톤은 시의 모방은 진리와 무관하며, 시인은 시민을 현혹해 이성적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때문에 시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모방의 예술로 간주하고, 제9장의 ‘개연성’ 이론으로 시를 옹호하고 나섰다. 시란 ‘이미 일어난 일’을 다루는 게 아니라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대상으로 한다. 이 개연성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다루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시학」은 2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번역은 그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발췌한 것으로, 텍스트는 잉그램 바이워터(Ingram Bywater)가 영역한 것을 사용했으며, 무라지 요시나리(村治能就)의 일역판을 참고했다.] --- 「시학 - 아리스토텔레스」 중에서 시가 우리의 주제이긴 하지만, 나는 시작(詩作) 기술 전반에 대해 말할 뿐만 아니라 시의 여러 종류와 그 각각의 기능, 좋은 시에 요구되는 플롯의 구조, 시를 이루는 요소들의 수와 성질에 대해서도 논하고자 한다. 자연스러운 순서에 따라 원론적인 사실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서사시와 비극과 희극과 디티람보스, 그리고 대부분의 피리와 리라 연주는 전반적으로 보면 모두 모방의 여러 형태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세 가지 점에서 서로 다르다. 즉, 모방의 수단이 다르거나 대상이 다르거나 방식이 다르다. 사물을 재현할 때 어떤 이들은 형상과 색채를 수단으로 사용하고 또 어떤 이들은 목소리를 사용하듯이, 위에 언급한 여러 기술 분야에서 전체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은 리듬과 언어와 선율(멜로디)이지만, 이것들은 하나씩 독자적으로 사용되거나 두세 가지가 결합하여 사용된다. 예컨대 피리와 리라의 연주에서는 리듬과 선율의 결합이 수단으로 사용되고, 피리 소리를 흉내 내는 따위의 기술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무용수의 모방에서는 선율 없이 리듬만 수단으로 사용되는데, 무용수는 춤사위의 율동으로 사람들의 행위와 감정만이 아니라 성격까지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문이나 운문에서는 선율 없이 언어만 사용하여 모방하는 기술도 있고, 운문에서는 운율을 하나만 사용하기도 하고 여럿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이런 모방 형태를 일컫는 명칭이 없다. 소프론이나 크세나르코스의 흉내극과 소크라테스의 대화록 등을 일컫는 공통된 명칭이 없고, 이 두 가지 경우의 모방이 3보격이나 애가나 다른 종류의 운문으로 되어 있다 해도, 그것을 가리키는 공통된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운율의 명칭에 ‘시인’이라는 말을 덧붙여서 ‘애가 시인’, ‘서사시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사람들이 그들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 모방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시를 지을 때 운율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의학이나 자연학에 관한 저술이 운문으로 되어 있으면 그 저자를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엠페도클레스는 작품에 운율을 사용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따라서 호메로스를 시인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엠페도클레스는 시인이 아니라 자연학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런 경우의 모방이 카이레몬의 랍소디아 『켄타우로스』처럼 온갖 운율로 이루어져 있을 때도 우리의 입장은 역시 마찬가지여서, 카이레몬을 시인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런 기술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자. 마지막으로 디티람보스와 송시, 비극과 희극처럼 앞에서 말한 모든 수단들, 즉 리듬과 선율과 운율을 결합한 기술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은 세 종류의 수단을 모두 함께 사용하고 또 어떤 것은 하나씩 따로 사용한다는 차이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기술의 이런 차이를 나는 모방 수단이라고 부른다. --- 「제1장」 중에서 모방자들이 모방하는 대상은 행위인데, 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귀하거나 저열할 수밖에 없다. 이 좋고 나쁨의 경계선은 인류 일반을 구분하는 경계선이기 때문에, 인간 성품의 다양성은 이 기본적인 구별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모방 대상인 행위자들은 좋고 나쁨에 있어서 우리들보다 수준이 높거나 낮거나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화가들의 경우, 폴리그노토스가 묘사한 인물들은 우리보다 잘났고, 파우손이 묘사한 인물들은 우리보다 못났으며, 디오니시오스가 묘사한 인물들은 우리와 비슷하다. 위에서 말한 기술들이 모두 이런 차이를 허용하고, 이런 다름으로 제각기 대상을 묘사하면 서로 다른 별개의 기술이 될 것은 분명하다. 이런 차이는 무용에도 나타날 수 있고 피리와 리라 연주에도 나타날 수 있으며, 언어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기술, 즉 산문이나 가락이 없는 운문에도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면 호메로스가 묘사한 인물들은 우리보다 잘났고, 클레오폰이 묘사한 인물들은 우리와 비슷하고, 최초의 패러디 작가인 타소스 출신의 헤게몬이나 「딜리아스」의 작가인 니코카레스가 묘사한 인물들은 우리보다 못났다. 디티람보스와 송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티모세오스와 필록세노스가 쓴 『키클롭스』에서 볼 수 있듯이 등장인물을 서로 다르게 묘사할 수 있다. 이런 차이는 비극과 희극을 구별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희극은 등장인물들을 당대의 사람들보다 못나게 묘사하고, 비극은 잘나게 묘사한다. --- 「제2장」 중에서 이 기술들의 세 번째 차이는 각 종류의 대상을 모방하는 방식이다. 모방의 수단과 대상의 종류가 둘 다 같다 해도, 호메로스가 한 것처럼 때로는 서술체로, 때로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말할 수 있으며, 이런 변화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체로만 말할 수도 있고, 마치 모방자들이 묘사된 일들을 실제로 하는 것처럼 이야기 전체를 극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서두에 말했듯이 이런 기술의 모방은 수단과 대상과 방식이라는 세 가지 점에서 차이가 생긴다. 모방자로서 소포클레스는 잘난 사람들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호메로스와 비슷하지만,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인물들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또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파네스와 비슷하다. 사실 비극과 희극이 연극(드라마)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연극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줄거리를 행위로 연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리스 사람들은 비극과 희극을 둘 다 자신들이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희극은 메가라가 민주정 사회가 되었을 때 나타났기 때문에 메가라 사람들이 발명했고, 키오니데스와 마그네스보다 훨씬 오래전에 살았던 시인 에피카르모스가 시칠리아의 메가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메가라 사람들이 희극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펠로폰네소스의 일부 도리스 사람들은 비극도 자기네가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코메디’와 ‘드라마’라는 낱말을 제시하는데, 그들의 언어에서 시골을 나타내는 낱말은 ‘코마이’인 반면, 아테네 사람들은 시골을 ‘데메스’라고 부른다. 따라서 희극 광대를 뜻하는 ‘코모디아’라는 말은 술잔치를 뜻하는 ‘코마제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희극 광대들이 볼썽사납다 하여 읍내로 들어오지 못하자 변두리의 시골 마을, 즉 ‘코마이’를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공연한 데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언어에서 ‘행동하다’를 뜻하는 낱말은 ‘드란’인 반면, 아테네 사람들은 ‘프라테인’이란 말을 쓴다고 한다. 그들의 모방 기술에 나타난 차이의 수와 성질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자. --- 「제3장」 중에서 시는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에 뿌리를 둔 두 가지 원인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모방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인간이 보여주는 타고난 성향이고, 이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이다. 인간은 가장 모방적인 동물이고, 모방을 통해 배움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둘째, 누구나 모방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즐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두 번째 주장의 진실성은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짐승이나 송장 자체를 보는 것은 괴로울 수 있지만, 그런 사물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보는 것은 기쁨을 안겨준다.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또 다른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학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가장 큰 즐거움이다. 학습 능력이 아무리 열등하다 해도 그들은 배우는 것을 즐긴다. 그림을 보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는 이유는 그림을 보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배우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저건 누구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전에 그 사물을 본 적이 없다면, 그 작품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것은 그림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솜씨나 채색이나 그와 비슷한 다른 원인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모방은 우리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고, 하모니와 리듬에 대한 감각도 타고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즉흥적인 작품에서 시를 창조한 것은 타고난 본래의 기질 때문이고, 이 초창기의 성과를 대부분 점진적으로 개선한 결과였다. 하지만 시는 곧 시인 각자의 개성에 따라 두 형태로 나뉘었다. 시인들 가운데 좀 더 진지한 이들은 고귀한 행위와 고귀한 인물들을 묘사할 것이고, 그보다 경박한 시인들은 비천한 자들의 행위를 묘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박한 시인들이 처음에는 상대를 욕하고 비난하는 풍자시를 지었지만, 진지한 시인들은 송가와 찬가를 지었다. 호메로스 이전에도 그런 시인이 많이 있었겠지만, 그들이 쓴 그런 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호메로스 이후에는 그런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호메로스의 『마르기테스』나 다른 시인들이 쓴 비슷한 시가 그렇다. 호메로스는 진정으로 시인들 중의 시인이고, 문학적 탁월함만이 아니라 그가 묘사한 극적인 인물들을 통해서도 비길 데 없이 우뚝한 존재인 것처럼, 극적인 독설이 아니라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자들을 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통해 희극의 일반적인 형태를 처음으로 보여준 인물이기도 했다. 사실 그의 『마르기테스』와 우리 희극의 관계는 『일리아스』 및 『오디세이아』와 우리 비극의 관계와 같다. 하지만 비극과 희극이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시의 한쪽 계열로 끌려간 사람들은 풍자시 대신 희극의 작가가 되었고, 또 다른 계열로 끌려간 사람들은 서사시 대신 비극의 작가가 되었다. 이 새로운 형식은 종전의 형식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비극이 그 고유한 형태를 이미 완성했는지 어떤지, 비극이 그 자체로 평가받을 수 있는지, 아니면 그것도 역시 청중과 관련하여 평가받아야 하는지 -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긴 하지만, 비극은 - 희극과 마찬가지로 - 처음에는 단순한 즉흥시였다. 비극은 디티람보스의 저자들로부터 시작되었고, 희극은 아직도 여러 도시에 살아남아 있는 팔리카의 저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비극은 새로운 요소가 나타날 때마다 그것을 다시 새로운 형태로 개선함으로써 점진적으로 발달했다. 비극은 많은 변화를 거친 뒤 자연스러운 형태에 이르렀고, 거기에서 멈추었다. 처음으로 배우의 수를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린 것은 아이스킬로스였다. 그는 연극에서 합창이 맡은 역할을 줄이고 대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했다. 세 번째 배우와 무대 배경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소포클레스였다. 비극은 웅대함도 얻었다. 짧은 줄거리와 해학적인 대사를 버리고 사티로스극 같은 무대에서 벗어남으로써, 발달의 후기 단계에서 뒤늦게나마 위엄을 얻었다. 그리고 비극의 운율은 그 후 강약격에서 약강격으로 바뀌었는데, 비극이 원래 강약격의 4보격을 사용한 이유는 무용과의 관계가 지금보다 밀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사 부분이 도입되자마자 적절한 운율이 자연스럽게 나타났는데, 알다시피 약강격은 모든 운율 가운데 대화체에 가장 적합하다. 우리가 대화할 때 6보격으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어조에서 벗어날 때만 6보격을 쓰는 반면, 대화를 나눌 때는 저도 모르게 약강격으로 말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또 다른 변화는 에피소드, 즉 장면의 수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 밖에 남아 있는 문제들, 즉 추가된 장식이나 그것이 도입된 이유 따위를 자세히 검토하려면 글이 길어질 것이기 때문에, 앞에서 말했듯이 여기서는 그것을 제외할 수밖에 없다. --- 「제4장」 중에서 |
|
시의 기원을 묻고, 그 미래를 가늠하는 사유의 지도
『세계시론산책』은 한 편의 시가 되기 전, 그 뿌리와 논리, 감각과 이념을 치열하게 묻고 고민해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 편역자의 열정과 성실한 문장으로 다시 불러낸 책이다. 이 책은 그저 “시론(詩論)”을 모은 문학 자료집이 아니다. 그것은 시라는 장르에 대해 사유한 철학적 산물이며, 시인의 탄생과 죽음을 오가는 역사적 변증법의 기록이며,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문학과 언어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에 대한 긴 여운의 해답이기도 하다. 1. 『문학청춘』의 연재에서 시작된 ‘산책’의 기록 책의 시작은 소박하다. 『문학청춘』의 주간인 김영탁 시인과 번역가 김석희가 술자리에서 나눈 이야기, 그리고 어느 봄호를 향한 번역 청탁. 이 작은 약속은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총 15회에 걸친 시론 번역 연재로 이어졌고, 마침내 단행본이라는 응축된 형식으로 완성되었다. 김석희는 “서양에서 ‘고전’으로 평가받는 시론 중 읽을 만한 것”을 직접 고르고 골랐으며, 단순한 언어 전환에 그치지 않고, 그 사유의 무게까지 한국어의 정서로 이식하는 번역을 감행했다. 단지 고전을 옮긴 것이 아니라, 고전을 읽어낸 또 하나의 ‘시론 산책’이자 ‘비평적 실천’인 셈이다. 2. 2,000년에 걸친 시론의 역사를 넘나들다 『세계시론산책』은 고대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시에 대한 주요한 사유들을 폭넓게 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작하여 호라티우스의 「시론」, 시드니 경의 「시를 위한 변호」, 워즈워스와 셸리의 낭만주의적 주장, 발레리의 추상적 언어론, 릴케의 시인론, 예이츠와 엘뤼아르의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까지, 그 사상적 스펙트럼은 동시대 문학이 가진 기반을 넓게 조망하게 만든다. 이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연성’ 개념은 시를 현실보다 더 철학적인 것으로 보았던 고대 사유의 정수를 드러내며, 셸리의 「시의 옹호」는 시를 문명의 가장 깊은 도덕적 감각으로 본다. 반면 릴케는 ‘시를 쓰고자 하는 젊은 시인에게’ 삶을 먼저 사랑하라고 조언하며, 예이츠는 상징이 지닌 힘과 영혼의 구조를 설파한다. 각각의 시론은 시대와 사조를 반영하면서도 인간과 언어, 예술과 현실 사이의 심층적인 균열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3. 번역가의 ‘사유’가 더해진 입체적 읽기 김석희는 단지 원전을 옮기는 번역자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탁월한 독자이자 분석가이며 해설자다. 그의 번역은 원문 충실성을 담보함과 동시에, 오늘날 독자가 읽을 수 있는 ‘맥락’을 고스란히 마련한다. 특히 각 시론의 해설에서는 해당 사상가의 철학적 배경, 생애의 흐름, 문학적 위치 등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어, 단편적인 이론 수용을 넘어 사유의 체계 전체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의 문장은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유연하다. 복잡한 사상을 친절히 풀어내되, 결코 그 깊이를 훼손하지 않는다. 더불어 직역과 의역의 경계를 유려하게 조율하며, 원문의 철학적 긴장을 우리말의 미학으로 온전히 되살린다. 특히 발레리나 포 같은 난해한 문장들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독자들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한다. 4. 시론은 곧 우리 시대의 자화상 『세계시론산책』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과거의 사유를 박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우리 시대의 문학적 고민과도 깊이 연결된다는 데 있다. 디지털 시대, AI의 언어 생성이 보편화되는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시는 무엇인가?” “언어는 감정을 대신할 수 있는가?” “시는 사라졌는가, 혹은 살아 있는가?” 이 책은 시가 단순한 문학 장르가 아니라, 인간의 ‘말하는 존재로서의 기원’과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의 힘’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만든다. 시의 죽음을 논하는 시대에 오히려 시의 원형을 되짚는 작업은, 인간됨의 근원을 찾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 산책으로 이끄는 사유의 길 『세계시론산책』은 시인들을 위한 책이지만, 시를 쓰지 않는 이들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언어를 사랑하는 이들,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 예술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반드시 한 번 거쳐야 할 사유의 길이다. 고전 시론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과거의 명문장을 복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어떤 언어를 믿고, 어떤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지를 다시 묻는 일이다. 산책은 천천히 걷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사유의 기회다. 이 책은 그 느린 걸음 속에서, 시라는 깊은 우물의 물줄기를 우리 곁으로 불러내는 고요한 전율의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