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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열 군데나 다닌다니, 불쌍한 사람!’ 오블로모프가 생각했다. ‘그것도 삶인가!’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삶에 의미가 있을까? 몸이 몇 개나 있어도 모자랄 텐데? 물론 공연을 보거나, 리지야라 했던가?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 여자는 상당히 예뻤으니까! 그런 여자와 시골에서 꽃을 따며 살아도 괜찮겠지. 하지만 하루에 열군데 넘게 돌아다녀야 하다니……아무리 생각해도 불쌍한 사람이야!’
--- p.33 ‘일에 귀밑까지 빠졌군, 좋은 친군데!’ 눈으로 그를 배웅하며 오블로모프가 생각했다. “세상일에는 문외한이 되어 버렸어! 그래도 출세는 하는 모양이지? 조만간 국정을 쥐고 흔드는 고위고관이 되겠지, 세상에서는 그런 걸 출세라고 하니까. 출세에는 인간성은 필요 없겠지. 지성이나 의지, 감정 따윈 그에게 도움이 안 돼. 그런 건 지나친 사치일 뿐이지. 한 인간이 짧은 생애 동안 한 가지 일에만 매달려 평생 살아야 하다니, 언급할 가치도 없어. 그런 상태로 8시부터 12시까지 집에서, 12시부터 5시까지 관청에서 일을 하다니, 정말 가엾은 사람이야!” --- p.39 “도둑이나 창녀, 구제할 길 없는 바보를 그릴 때에도 그들도 사람임을 잊으면 안 돼요. 인간성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당신들은 머리로만 글을 쓰려하고 있어요!” 오블로모프가 거의 울부짖으며 열변을 토했다. “사상을 나타내는데 따뜻한 마음은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상은 사랑을 통해 그 결실을 맺는 겁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손을 내밀어 일으켜 줘야죠. 그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면 진심으로 울어 주어야지, 그를 조롱해서는 안 됩니다.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고 그가 당신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하듯 그에게 대해주란 말입니다 —그럼 당신의 글을 읽고 당신 앞에 기꺼이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 p.42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이들에 대해 세상은 선량하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그들은 악하지 않을 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 앞에서 누군가 거지에게 얼마라도 베풀려 하면, 그도 2코페이카를 던져 줄 것이다. 하지만 욕하고 비웃으며 쫓아내려 한다면, 그도 덩달아 욕하고 비웃을 것이다. --- p.45 매일같이 보는 사이라 해서 그 친분이 그냥 얻어지지는 않는다. 장점만 즐기고, 단점을 들추어내어 서로에게 상처 주고 상처 받는 관계가 되지 않으려면 적잖은 경험과 논리,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함이 필요한 법이다. --- p.103 “사교계! 사회! 안드레이, 자네는 일부러 나를 사교계에 데려간 거겠지? 하지만 자네의 그런 행동은 내가 그곳을 더 혐오하게 만들 뿐이야. 삶이라, 아주 멋진 삶이로군! 그런 곳에서 대체 무엇을 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지성과 흥미? 두고 보게, 그 삶을 움직이고 있는 중심은 어디에 있지? 아무데도 없네. 생명과 이어질 듯 깊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그런 사교계에나 돌아다니는 무리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네. 잠들어 버린 사람들, 나보다 못난 사람들이라고! 그들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뭐지? 그렇군. 그들은 누워 있는 게 아니라 매일같이 파리처럼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지만 사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나? 홀에 들어서면, 사려 깊은 얼굴을 한 손님들이 보기 좋게 정해진 자리에 점잖게 앉아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지. 실로 멋지지 않은가! 그럴 듯한 인생목표 따위도 없네! 지성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정말이지 나무랄 데 없는 모범이 되어 주겠지! 이래도 그들이 죽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평생 앉은 채 잠만 자는 거와 뭐가 다른가? 나는 집에 가만히 누워 있을 뿐 카드게임 같은 걸로 골머리를 썩이지도 않아. 그런 나의 어디가 그들보다 못하다는 건가?” --- p.240 ‘아아, 사랑의 온기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는 공상에 잠겼다. ‘아냐, 삶은 반드시 인간을 재촉하는 법! 어디로 도망가도 삶의 낙인이 찍히게 마련이지. 얼마나 많은 새로운 움직임들이 느닷없이 삶 속에 파고들었던가. 일이 늘어날 뿐이야! 연애란 가장 어려운 인생의 학교다!’ --- p.332 “만약에.” 그녀가 매섭게 질문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책과 관직, 사교계에 질린 것처럼 이 사랑에도 질려 버린다면요? 이대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경쟁자도 없고 다른 사랑도 없는 채, 그저 당신 집 긴 의자에서 잠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 옆에서 문득 잠이 들어 버린다면요? 그리고 제 목소리로 당신을 눈뜨게 할 수 없다면? 심장에 있던 병이 다 낫고, 다른 여자가 아니라 당신의 낡은 실내복이 당신에게 더욱 간절해진다면요?” --- p.361 교활함이란 잔돈과 같아 많은 것을 살 수는 없다. 동전으로 한두 시간 정도를 때울 수 있는 것처럼, 교활한 수단은 지금 당장 무언가를 감추거나 속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중요하고 커다란 사건의 결말을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 p.366 “행복, 행복이라!” 잠시 뒤 빈정거리듯 말했다. “행복이란 얼마나 허약하고 덧없는 것이란 말인가! 면사포, 화관, 사랑, 사랑! 그래, 그건 다 좋다 이거야. 돈은 어떻게 하고? 어떻게 먹고살아? 깨끗하고 올바른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랑, 사랑까지 돈으로 사야 하는 건가!” --- p.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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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로모프주의란 무엇인가
러시아 문학비평가 도브롤류보프는 그의 유명한 평론 〈오블로모프주의란 무엇인가〉(1860)에서 곤차로프 《오블로모프》의 소설 주인공 오블로모프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을 다루었다. 이때부터 ‘오블로모프주의’란 말은 러시아인의 삶과 문학에서 잉여인간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러시아 지식계급의 근본적 약점을 찌른 사회의 폭로문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평론에서 도브롤류보프는 오블로모프를 19세기 러시아문학의 대표적인 캐릭터 ‘쓸모없는 사람’의 계보에 올려놓았다. 뿐만 아니라, 구두를 신는 것조차 하인 손을 빌려야만 하는 지주귀족의 삶이 오블로모프를 줏대 없고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한다. 당대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서 오블로모프주의(오블로모프기질)란 과연 무슨 뜻일까. 그것은 농노제 바탕 위에 생겨난 낡은 러시아 지주귀족의 대표자를 일컬으며, 러시아 일부계층에서 볼 수 있는 특질을 곤차로프가 작품화한 것이다. 결국은 새로운 일, 미래에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계속 과거로 돌아가려는 오블로모프의 모습을 통해 상공업 발전으로 빠르게 변해가는 러시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세대의 상징인 것이다. 러시아문학 거작 《오블로모프》 톨스토이는 이렇게 절찬한다. “《오블로모프》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진정 대작 중의 대작이다. 이 작품의 성공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한바탕 소동으로 끝나는 일회적인 것도 아닌 바람직하고 아주 의미심장한 것이다.” ‘오블로모프’라는 이름은 오래전부터 문학애호가에게 친근한 말이 되어 왔다. 청년 지주귀족 일리야 일리이치 오블로모프는 페테르부르크 관청 일을 그만두고 시내에서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른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와는 대조적인 소꿉친구 슈톨츠는 활동적이고 폭 넓게 사업을 하고 있다. 이렇게 정반대인 두 사람이지만 오블로모프는 슈톨츠를 믿음직하게 생각하고 슈톨츠도 오블로모프의 순수한 마음을 소중하게 여긴다. 오블로모프가 무위도식하며 파멸해가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던 슈톨츠는 젊은 여자 친구 올가에게 그를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다. 올가와 오블로모프는 점점 서로 이끌리고 오블로모프의 삶도 크게 바뀌는 듯하지만, 그는 결국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올가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그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잠들고,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오블로모프는 미망인 아가피야의 셋집에 안주하고 만다. 이제 그의 삶에는 아무런 발전도 전진도 없는 것이다. 특성이 없는 그러나 강한 인간 탄생! 소설의 기본 골격은 주인공 오블로모프의 사랑 이야기다. 언뜻 보면 소설은 단순하고 어떤 면에서는 쓸데없이 장황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소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달리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고 작가는 예술적 재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이 소설의 전례 없는 성공의 비밀을 말해준다. 곤차로프의 창작활동은 《평범한 이야기》 《오블로모프》 《단애》의 세 장편과 세계 일주를 적은 《전함 팔라다호》가 전부라고는 하지만 그가 투르게네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거장이라는 것에는 달리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발표한 작품은 몇 편 되지 않는데도 그것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러시아문학계에 크나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의 대표작 《오블로모프》는 러시아 국민성의 한 단면을 보편화한 것으로 단지 문학뿐 아니라 러시아 연구를 위해서도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되었다. ‘오블로모프’가 게으름뱅이의 대명사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제1편에서 주인공은 침대에 누워 독자 앞에 나타난 채 거의 거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오블로모프》가 세계명작이란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이처럼 단조로운 주제와 게으른 주인공임에도 독자에게 권태감을 느끼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충분한 예술적 만족을 주는 데 있다. 왜냐하면 곤차로프는 움직임이 없는 무위의 경지 속에 특수한 정적(靜的)인 미를 발견한 독특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문학의 거장 곤차로프! 곤차로프(1812~1891)는 1834년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하고, 30년 가까이 재무관리와 검열관으로 일했다. 1852~55년 러시아 해군제독의 비서로 일본까지 항해한 일은 평온한 그의 삶에서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으며 《전함 팔라다호》(1858)에 잘 묘사되어 있다. 곤차로프는 1847년 첫 소설 《평범한 이야기》로 문단에 등장하였는데, 이때 영향력 있는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의 호평을 받아 유명해졌다. 1859년 그는 10년간 심혈을 기울여 집필해온 장편 《오블로모프》를 완성, 〈조국의 기록〉에 네 차례에 걸쳐 발표한 뒤 곧바로 단행본으로 출간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장편은 《평범한 이야기》보다 주제와 사회적 본질, 심리적 측면에서 더욱 완숙한 작품으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오블로모프》의 성공 이후 1869년 《단애》라는 뛰어난 소설도 발표한다. 이상의 3편 소설에서 곤차로프는 느긋한 몽상가와 민첩한 실리적 인물의 전형을 대조하면서 옛 러시아 귀족주의 전통과 함께 이제 막 발달하기 시작한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서로 불안하게 공존하는 그때 러시아 사회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