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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때리고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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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은 공을 내려놓고 예리를 꼭 안았다. 예리는 잠시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었으나,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에 곧 자연스레 두 팔을 혜경의 허리에 감았다. 긴장이 서렸던 표정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두 사람의 포옹이 끝나자 옆에 서 있던 진희가 예리를 향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 에브리마트…… 맞으시죠?” “뭐야, 예리 너 용진희 씨랑 아는 사이야?” “아, 네. 제가 아르바이트하는 데서 같이 일하시는 언니 같은데……. 맞죠?” --- p.10 첫 시작은 열아홉 살이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강박 증상은 스물여섯이 될 때까지 예리를 괴롭혔는데, 최근 들어 더 심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참아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참을수록 불안감은 점점 더 커졌다. 심지어 당장 숨이 멎을 것 같은 호흡곤란 증상까지 나타났다. 그럴 때면 결국 강박이 잦아들 때까지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 p.31 “퇴근한 거야?” 재성이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으며 진희 쪽으로 다가왔다. 진희는 누가 볼세라 재성의 팔뚝을 잡고 지상 주차장으로 끌고 갔다. “왜 여기까지 왔어? 퇴근 시간은 어떻게 알았고?” “어린이집에 전화해보니까 오늘 태율이 다섯 시 반까지 있을 거라고 해서. 이쯤 퇴근하려나 싶었지.” “네가 어린이집에 전화를 왜 하는데?” “왜긴, 아빠잖아.” 진희는 뭐가 문제냐는 재성의 저 표정을 볼 때마다 뺨을 한 대 후리고 싶었다. --- p.68 “예리 씨는 농구를 진짜 좋아하나 보다.” “좋아하기도 좋아하는데, 뭐랄까…… 농구가 저한테는 도피처인 것 같아요.” “도피처요? 스트레스 해소?” “네, 뭐 그런 것도 있고요. 농구를 하는 동안 잠깐이라도 현실을 잊는 거죠.” --- p.84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진희는 차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와 함께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지금 속에서 끓고 있는 감정을 고작 눈물로밖에 표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했다. 불줄기가 뿜어져 나와도 모자랐다. 꼭 눈물이어야 한다면 차 유리를 다 깨뜨릴 만큼 콸콸 쏟아져야 했다. --- p.110 세은이 담배를 피우며 했던 말처럼 자신도 그저 묵묵히 나아갔어야 했다. 예리가 표류할 때면 늘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질문이 있었다. 그건 여기까지 오느라 놓아버린 것들에 대한 미련이었다. ‘그때 내가 하고 싶은 걸 택했더라면.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정한 길로 달려봤더라면.’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예리는 세은이 내뿜던 담배 연기를 떠올렸다. 불은 뜨겁게 타오르다가도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아무 흔적도 없이. 그렇다면 대체 무얼 위해 불을 지피는 거지. --- p.137 물건들은 평소처럼 아무런 대꾸도 없었지만 왜인지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희도 벌써부터 나를 잘라내는구나.’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것들은 결국 종이 위에 새겨진 잉크에 불과했다. 혼인신고서도, 근로계약서도. 종잇장만큼이나 얇은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니. 이렇게 베일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진희는 아주 긴 종이에 어깻죽지부터 골반까지 선명하게 베인 느낌이었다. --- p.171 혜경은 정장에 구두 차림으로 나타난 예리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리야, 어디 갔다 왔어?” “면접…….” “그래? 고생했네. 잘 봤어?” 예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혜경이 예리를 보니 셔츠가 땀에 젖어 있었다. “땀은 왜 이렇게 흘렸어?” “좀 뛰어오느라고요. 쌤, 저 옆에서 연습해도 돼요?” --- pp.175-176 골대까지의 거리를 가늠하여 적당히 무릎을 굽히고, 허리춤 높이에서 공을 단단히 잡는다.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인 채로 눈으로 림을 정확히 조준한다. 후, 짧게 숨을 뱉고는 무릎을 펴면서 팔을 일자로 올린다. 공이 가슴팍을 지나 인중쯤 왔을 때 팔을 펴면서 점프한다. 공은 이제 손바닥에서 손가락으로 이동한다. 점프가 정점에 가까워질 때 손끝으로 힘껏 공을 챈다. 팽그르르 회전하는 공이 솟아오른다. 포물선을 그리며 림으로 날아간다. --- pp.202-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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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농구가 저한테는 도피처인 것 같아요.” - 예리의 이야기
현실을 마주하는 용기와 꿈을 좇는 무모함 사이에서 예리는 장기 취준생이다. 남몰래 강박 장애를 앓고 있고, 부모님께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고 속이고 마트에서 일하고 있으며,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상태이다. 사실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해본 적이 없기도 하다. 그저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사회인의 무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책임감만 떠안은 채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예리에게 농구는 잊고 있던 오랜 꿈이다. 선입견과 관습 속에 가족에게도 존중받지 못하고 포기한 꿈이지만, 아직도 농구공을 잡으면 그때의 마음이 역력하다. 코트 위를 달리며 공을 튀길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모든 걱정과 부담이 사라지는 걸 느낀다. 그러나 이걸 업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잠시라도 현실의 막막함을 잊게 하는 도피처일 뿐이다. 예리는 어둠 속에 서 있는 골대를 바라보았다. 밤바람에 그물이 슬쩍슬쩍 흔들렸다. 공을 바닥에 몇 번 튀기고, 팔을 뻗어 슛을 던졌다. (133쪽) 코트 위의 농구선수는 오직 골대만 보고 질주한다. 자신이 가는 곳에 과연 골대가 있는지, 골대라는 게 있기는 한 건지 의심하지 않는다. 예리는 그 질주의 동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답을 찾아 헤맨다. 자신만의 골대를 찾고자 오늘도 공을 튀기고 또 튀길 뿐이다. “농구공이 바닥을 때릴 때마다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지길 바랐다.” - 진희의 이야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 진희는 아들 ‘태율’을 혼자 기르는 싱글 맘이다. 태율이 어릴 때, 불륜을 저지른 전 남편 ‘재성’과 이혼하게 되었다. 자신과 아빠에게 끔찍한 상처를 준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불륜만은 자신의 이혼 사유가 되지 않기를 바랐던 진희였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면접교섭권 때문에 그러기 싫어도 재성에게 태율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혼할 당시에는 혼자서도 충분히 태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진희 혼자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에는 힘에 부치고, 거기에 재성의 끊임없는 재결합 요구를 내치는 것까지 견뎌내야 한다. 진희의 고충은 재성이 재결합을 빌미로 아빠에게 이혼 사유를 얘기하게 되면서 절정을 찍게 되는데, 혹여라도 자책할까 봐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아빠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진희는 손에 든 농구공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힘껏 내리쳤다. 분명히 똑바로 내리쳤는데 공은 저 앞으로 튕겨 나갔다. (16쪽) 때로는 내가 바닥에 튀긴 공이 나의 예상과 다른 곳으로 튕겨 나가기도 한다. 모든 게 내 손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아무것도 손에 쥔 것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서둘러 다음 움직임을 생각해야 한다. 진희는 이제 막 알게 된 것이다. 공이 내 손을 떠나가는 순간부터 경기는 시작된 것임을. 매일같이 치열하게 달리는 현실의 코트 속 우리의 이야기 진희에게도 예리에게도, 그리고 소설 밖의 우리에게도 현실의 바람은 거세기만 하다.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있다. 그런 때에도 상황은, 나를 둘러싼 세상은 계속해서 움직이라고 종용한다. 잠시도 멈춰 있을 수 없고, 쉴 새 없이 기쁨과 슬픔이 오가는 농구 경기처럼 우리의 인생은 늘 치열하다. 다행인 점은 경기는 언젠가 끝난다는 것이고, 아직 우리에게는 공을 튀길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각자의 골대가 다를지라도 분명 공을 던질 차례가 올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달라도 언젠가 그 끝에는 계속해서 움직였던 지난날에 대한 보상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바닥을 때리고』를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도 결국 그 지점이라는 것을 독자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