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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우리 _7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_49 아직은 고양이 _87 인디언 돌 _119 해저로월 _151 속삭이는 깃발들 _197 바다 가는 날 _233 십일월이 지나면 _265 해설 | 전청림(문학평론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겠다 _303 작가의 말 _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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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는 상대방이 자신의 소리와 냄새를 견디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랑이라 여겼던 것들이 어느 순간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서둘러 내려놓고, 가벼워지고 싶은. 승희는 이 방에서 나가기 싫었다.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 p.29 「이후, 우리」 중에서 오늘이 우리 정원의 절정인 것 같아. 정아가 속삭인 말처럼 오늘이 절정이었으면 했다. 정원에서 겪은 소소한 갈등은 한철 위기였기를,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길 바랐다. 반전을 예고하는 복선도, 불길한 징조도 없었다. 볕이 잘 드는 자리를 고르셨네요, 빛이 좋아서 잘 자랐어요, 라는 정아의 말에 주인집 눈빛이 묘해진 것 외에는. --- p.71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중에서 수진아, 하고 부르자 희미하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또 한번 불렀다. 수진아, 여름이 끝나가고 있어. 나는 자꾸만 나무 그늘 아래서 실컷 잠을 자고 싶어. 서가의 책을 가지런히 정리하다가도 톡 건드려서 다 떨어뜨려버리고 싶어. 그럴 때면 주머니 속의 쪽지를 만지작거려. 그러니까 나는 고양이가 되지 않을 거야. 아직은. --- pp.116-117 「아직은 고양이」 중에서 군데군데 벗어져 드러난 하얗고 매끄러운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우리가 할머니가 된 뒤에도, 어쩌면 이 세상에 우리가 존재하지 않을 때도 나무는 살아 있겠구나, 하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그런데 나무 입장에서는 다른 나무만큼 살아내라는 강요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배롱나무의 꽃잎은 쪼글쪼글 주름이 져서 이미 태어날 때부터 늙어 있었던 것 같았다. 어른이 되기 전에 지쳐버린 우리처럼. --- p.129 「인디언 돌」 중에서 “삶을 믿었죠. 자신의 의지와 선택이 빚어낸 결과를, 간혹 주어지는 행운과 우연과 운명이 얽혀 일으키는 기적 같은 일을. 불행이 계속되어도 때때로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삶을.” --- p.194 「해저로월」」 중에서 고양이라고 믿어서 고양이가 되는 거라면, 진실이 아닌 걸 진실이라고 믿으면 그것은 진실이 되는 걸까요? --- p.212 「속삭이는 깃발들」 중에서 더 올라가야 해. 숨이 차오른다. 천천히, 천천히. 다 올라왔는데 여전히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기다릴 텐데. 내 곁에 있던 따듯한 것.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바다만 보고 돌아갈게. 곧 갈게. --- p.264 「바다 가는 날」 중에서 엑스레이 사진을 보던 의사가 소영의 발목에 가골이 형성됐다고 설명했었다. 뼈가 부러지면 연결 부위에 뼈와 흡사한 조직이 생기는데,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진짜 뼈로 굳는다고 했다. 남녀 사이도 비슷하지 않을까. 사랑 비슷한 감정이 생겨났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게 정말 끈끈하고 단단한 사랑이 되는 건 아닐까. --- p.298 「십일월이 지나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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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거리에 있다.
우리의 우정과 상처를 한없이 가볍게 여기는 그 거리에.” 정선임의 인물들은 밤을 건너는 중이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어떤 비밀을 속살거려도 괜찮을 듯한,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잠시 동안만 허락되는 비밀스러운 시간. 규칙과 규율로 통제되는 낮과는 달리 어떤 비이성적인 일이 벌어진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신묘한 밤에, 잘 알지 못했던 상대의 내밀한 마음을 꺼내어 헤아려보고 외면해왔던 진실에 가까워진다. 함께했던 시절로부터 너무나 멀어져 이제는 서먹해진 ‘우리’의 관계를 낱낱이 해부하고 재조립해본다. 그리고 돌이켜본다. 그동안 함께 지나온 숱한 밤들은 어떤 밤이었나. 소설집의 문을 여는 「이후, 우리」는 코로나19 변종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 근미래를 그린다. 정부 지침에 따라 감염자로 분류된 ‘승희’는 일주일간 ‘생활치료센터’에 격리된다. 특정한 고통을 공동으로 경험한 이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연대의 공간에서, 승희는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십대 여자아이 ‘유정’, 튀르키예 출신 유학생 ‘하산’과 함께 짧지만 강렬한 우정을 나눈다. 사회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모여 피워내는 공명의 시간은 이들로 하여금 외부로부터 부여받은 각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진정한 의미에 관해 톺아보게 만든다. 특히 견고하게 유지해왔던 승희의 방어벽이 유정에 의해 무장 해제되는 장면은,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한 사람의 세계가 확장되는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때로 친밀함은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악용되기도 한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속 ‘나’는 대학생 시절, 함께 공유하던 문서함에 ‘정아’가 남긴 글을 고치거나 삭제하며 그의 삶을 평가하고 재단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어리고 미숙했기에, 다시 만난 정아와는 ‘공유 정원’을 통해 완성해지 못했던 우정의 장을 이룩해보고자 한다. 정성을 들여 식물을 키워내듯 마음을 다해 보살폈더라면 달라졌을 정아와의 인연을 반추하면서, ‘나’는 정아가 남기고 간 식물을 “품에 꼭 끌어안”는다. 구근 주위의 흙을 맨손으로 팠다. 얼어서 잘 파지지 않았다. 손이 시리고 아팠지만 개의치 않았다. 구근의 잔뿌리가 다치지 않게 살살 뽑아내 컵라면 용기에 담은 뒤 흙을 퍼서 고르게 덮었다. 우리에게도 아직 남아 있는 문장이 어딘가에 있을까.(85쪽) 소중했던 시절을 붙잡아둘 수 있는 건 “우리에게도 아직 남아 있는”(「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무언가가 존재하리라 믿는 마음 덕택이다. 첫 소설집에서 ‘고양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유령 같은 존재를 감각하게 만들어주었듯이, 정선임의 작품에서 고양이는 곁에 없는 대상을 향한 믿음이 투영된 상징물로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정선임의 인물들은 사라진 연인이 고양이로 변해 찾아왔다며 자신마저도 고양이가 되어버리는가 하면(「아직은 고양이」), 죽은 반려묘가 여전히 곁을 맴돌고 있다고 믿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실감을 소화해보려 노력한다(「속삭이는 깃발들」).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한심하다고 여겨졌던 이 인물들의 경험이 화자인 ‘나’에게만큼은 전달되기 시작하면서, 잊힐 뻔했던 존재들에 형태감이 부여된다. “우리가 믿을 수 있고 믿고 싶어하는 것. 보고 싶고 듣고 싶지만 사라졌고, 결코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싶지 않은 것.” 즉, 정선임이 그려내는 고양이는 “소망의 다른 이름이다”.(전청림, 해설)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다음 문장을 적어야 했다. 아직은 쓸 수 있으니까. 믿음도, 사랑이라는 말도.” 믿음은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이들이 지닌”(「속삭이는 깃발들」) 신실한 마음이다. 「속삭이는 깃발들」의 ‘형지’는 저마다의 소망을 지닌 채 광장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에겐 없는 그 간절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의구심을 품는다. 한 번도 무언가를 “제디로 믿은 적이 없다는 것”, 그것이 “나의 죄”라고까지 말하는 형지는 한 사람이 갖는 신념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형지는 자기 삶의 의문스러운 부분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주된 근원인 타국의 여인 ‘마이라’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지나온 생을 곱씹는다. 이렇듯 믿음의 문제를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낯선 존재에 정선임은 ‘마이라’라는 공통된 이름을 붙여본다. 「해저로월」은 오랜 타국 생활 끝에 사망했다는 고모 ‘미경’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포르투갈로 향하는 ‘나’의 여정을 그린다. 그곳에서 ‘나’는 친척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질 나쁜 소문들과는 달리 고모가 “자신의 길에서 달리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곳에서 ‘마이라’로 불렸다던 고모의 족적을 따라가는 동안, ‘나’는 어린 시절 고모가 손에 쥐여주었던 차갑고 매끈한 마작 패의 감촉을 생생하게 되새겨본다. 손안에 들어오는 작고 매끄러운 물체의 감각은 「인디언 돌」로 이어진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겉돌던 ‘나’는 ‘아희’를 만나 벼락처럼 뜨겁고 반짝이는 우정을 나눈다. “서로에게 이야기할 게 너무 많아서”, “아주 사소한 감정도, 별일 아닌 일상도” 전부 털어놓기 바빠서 둘은 몽돌을 쥔 사람만이 발언할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들어냈다. 그 매끈한 돌의 감촉은 한참의 시간이 흘러 ‘나’가 아희 없이 홀로 거리를 오갈 때 뒤늦게 “따뜻하다못해 뜨거워”지며,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증폭시킨다. 후반부에 나란히 배치된 「바다 가는 날」과 「십일월이 지나면」은 이처럼 개인을 압도하는 세월의 흐름 앞에 놓인 인물들을 그린다. 폐암 말기에 섬망 증세를 보이는 할머니와 노화로 인해 요의를 조절하지 못하게 된 엄마(「바다 가는 날」), 그리고 암에 걸려 누군가의 간병을 필요로 하는 아버지(「십일월이 지나면」)는 결혼도 하지 않은 자식에 의탁하는 대신 스스로 요양원에 입소하기를 선택했다. ‘정상 가족’을 이루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부모 세대가 염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러한 선택을 초래한 현실이 “텁텁하고 쓰”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을 삼킨다.”(「바다 가는 날」) “자신할 수 있는 미래란” “십일월이 지나면 겨울이 온다”(「십일월이 지나면」)는 명료한 사실뿐임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그런 ‘나’를 지켜보며, 이미 지난한 삶을 겪어본 자가 품는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품위를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힘없이 축 늘어진 성기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볼품없던 몸. 그런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는 건 회복이나 성장이 아니라 죽음뿐이었다. 단의 소설을 보며 이런 게 사랑이냐고 물었지만, 실은 나에게 묻고 싶었다. 무엇이 사랑인가. 고통을 느껴야 사랑인가. 바닥까지 드러나야 사랑인가.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단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260쪽) 미로처럼 복잡하게 꼬인 삶의 내부를 파고들면, 몸체를 숨긴 채 웅크리고 있던 저마다의 고통이 드러난다. 정선임의 인물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과격하게 돌파하기보단 때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바다 가는 날」) 기다리며 이 어려움의 정체를 고요히 들여다보고 이해하고자 한다. 그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성숙한 방책임을 작가는 알고 있다. 그러니 길고 긴 밤을 통과해 지금의 자리에 잠시 멈춰 선 이들은, 방향을 잃은 게 아니라 제자리에서 단단해지는 중이다. “삶이 있으므로 무언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믿음으로써 지탱될 수 있는 것이 삶”(전청림, 해설)이기에, 오래도록 지켜야 할 소중한 믿음 하나씩을 찾아 손에 쥐어본다. 메마르고 갈라진 도시의 살풍경을 부드럽게 봉합하는 회복력은 그러한 결심에서부터 비롯된다. 머지않아 상처가 났던 자리에 도톰히 새살이 차오를 것이다. 작가의 말 물과 흙으로, 혹은 바람으로, 구름과 안개와 공기로 흩어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소설을 쓰는 건 정말로 세상에 흩어진 것들을 모으는 일인 것 같다. 슬프고 무섭고 귀엽고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고 이어서 엮어본다. 모아서 잇다보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딱 들어맞는 순간이 찾아온다. 우연이 만들어낸 기적처럼. 소설을 쓰면서 난 이 세계가 조금 더 좋아졌다. 2025년 11월의 어느 밤 정선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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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알을 씹듯 차곡차곡 생을 써나가다가 어느 순간 문득 한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서게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갑작스러워 보일지도 모른다. 지쳐서 그렇다고, 시간이 해결해주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선임 작가는 알고 있다. 그들은 방향을 잃은 게 아니라 ‘멈춤’으로써 걷던 방향을 떠나는 중이라는 것을. 가장 묵묵한 방식으로 고요한 이격을 감행하는 중이라는 것을. 여기, 작가가 어떤 인위적인 형식이나 과장된 감정 없이 섬세한 정공법으로 구현해낸 여덟 편의 소설이 있다. 이 단단한 소설들은 삶이 우리에게 남기는 상실과 슬픔, 불안과 결핍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세계를 이해하려는 문학적 의지의 결정체이다. 구근이 담긴 컵라면 용기를 품에 안고 어딘지 모를 어딘가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 마음. 그것이야말로 용감한 사랑의 증거임을 믿는다. -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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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내뱉고 들이쉬는 이만 번의 호흡에 새겨진 각각의 사정과 아름다움을 수집하기 위해, 그리고 각기 다른 그 숨이 전부 어렵게 내뱉어졌다는 걸 기록하기 위해 이 소설집은 생겨났다. 정선임은 그렇게 모든 일상의 면면을 세계의 희망으로 받아들여 채록한다. 작은 생명이 군집되어 우글거리는 미니어처와 디오라마, 그리고 옥상 정원의 풍경 속에서 멸망 직전의 우주를 구해내는 역설로 말이다. - 전청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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