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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혜 할리와 로사
정선임 해변의 오리배 김이설 최선의 합주 얽힘 코멘터리 기획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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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는 영영분식의 사장님이 그렇게 많이 시켜서 다 먹을 수나 있겠느냐고 물어보지 않아서 좋았다. 로사와 둘이 식당에 가서 양껏 시켰다가 다 먹을 수 있겠느냐는 쓸데없는 질문이나 무슨 아가씨들이 이렇게 많이 먹느냐, 그래서 애인이 생기겠느냐는 무례한 말까지 들으면 당장 입맛이 달아났고, 보란 듯이 꾸역꾸역 먹다가 체한 일도 많았다.
--- p.16 「이주혜, 할리와 로사」 중에서 우리에겐 선택지가 두 개 있어. 하나는 다시 한옥마을로 돌아가 한지길을 훑어 보고, 내처 경기전과 전동성당까지 보는 다소 빤한 관광 코스야. 또 하나는 한옥마을 반대쪽으로 가서 치명자산 천주교 성지를 보고 오는 아주 특별하고 거룩하며 기억에 남을 만한 코스고. 할리는 로사의 말솜씨에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일은 아니야. 아무래도 산이라 올라가기가 쉽지는 않거든. 괜찮겠어? 그 저질 체력으로 괜찮겠냐는 말일 것이다. 할리는 잠시 망설였다. 한옥마을 방향을 굽어보고 이내 몸을 돌려 치명자산 쪽을 올려다보았다. 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 할리는 저절로 떠오른 그 말을 구호 삼아 따르기로 했다. --- p.30 「이주혜, 할리와 로사」 중에서 저 아래 시내에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건물들은 이제 별자리처럼 이어지는 조명의 윤곽으로만 남았다. 할리는 빛과 어둠의 교대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고작 흙 한 줌이 돌아왔는데, 그것을 우리는 귀향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할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무엇을 참는지도 모르고 한껏 참았다. --- p.39 「이주혜, 할리와 로사」 중에서 할리가 그때 쫓아온 남자애 중에 속으로 좋아하던 애가 있었는데, 하필 그날 아빠가 입고 있던 속옷이 너무 누렇게 바랜 상태라 그 후로 그 남자애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고 털어놓자, 로사는 자기 첫사랑은 고등학교 때 반장이었는데, 전교에서 일 등을 한 날 축하파티를 하러 온 가족이 로사네 중국 식당에 왔고, 하필 그날 로사가 엄마 대신 서빙을 보고 있었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할리가 그 남자애 지금 전주에서 제일 돈 많이 버는 한정식집 사장이 되었다고 말하자, 로사가 자기 첫사랑은 차이나타운 옆에서 한의원을 한다고 말했다. --- p.47 「이주혜, 할리와 로사」 중에서 로사는 할리가 어디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알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여행일 뿐 아직 귀향은 아니라는 것도. 한번 흩어진 것들에게 돌아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는 것도. --- p.50 「이주혜, 할리와 로사」 중에서 미연은 심리상담사에게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라고. 말하던 도중 숨을 쉬었는지 미간을 찡그렸는지 목소리가 가라앉았는지 같은 것도, 문자에서 말줄임표나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하나짜리 ‘ㅋ’ 따위도 일일이 신경 쓰지 말라고. 그러나 미연은 그러지 못했다. 사람들의 말은 자꾸만 밟히고 서걱거렸다. --- p.57 「정선임, 해변의 오리배」 중에서 얼마 전 미연은 그 시절의 일기장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문장에 낯이 뜨거워졌다. 스스로 자아가 없던 시절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누군가는 남들이 보이는 곳에 낙서를 하지만 미연의 사랑은 그런 방식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우선은 숨겼다. 일기장에 이름을 적고 감췄다. 상상 속에서 고백하는 장면을 써 보기도 했다. 그렇게 글로 쓰고 나면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 p.63 「정선임, 해변의 오리배」 중에서 엄마의 말대로 결혼 생활 중에 있을 수 있는 한순간의 외도쯤으로, 둘만의 문제로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수의 상대가 내담자였다. 내담자는 자발적이지 않았다고 했으나 현수는 상호 합의라고 했다. --- p.88 「정선임, 해변의 오리배」 중에서 마치 버려진 바다 같아. 승재는 소설 끝에서 관람차 창문 너머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적었다. 그날 이후로 미래를 미리 본 사람처럼 여자가 남자에게서 멀어졌다고도. 미연은 실제로 자신이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해변에 서 있던 오리배를 보았다. 끝이 정해진 바다와 진짜 바다는 건널 수 없는 오리배. 해맑은 표정과 녹이 슨 몸체가 기억났다. 지금의 자신과 닮은 것 같다고 느낄 뿐. --- p.92 「정선임, 해변의 오리배」 중에서 유나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핸드백 안에서 빛이 뿜어져나왔다. 응원봉이 다시 발광하고 있었다. 미연은 자신과 같다고 여겼다. 응원하다 지쳐버렸지만 여전히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이 혼재되어 패악을 부리듯 발광하는. 빛나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질척대는. --- p.94 「정선임, 해변의 오리배」 중에서 아빠가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오빠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나는 이제부터 오빠와 함께 살게 되겠다는 걸 알아챘다. 처음 본 오빠였지만 동그란 눈, 짙은 눈썹, 그림자가 깊은 옆 모습까지 아빠를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오빠를 환대했고, 아빠는 조금 긴장한 채 오빠를 내 앞으로 슬쩍 밀었다.“오빠가 우리 유현이한테 줄 게 있다는데?” 오빠가 쑥 내민 건 비닐 포장에 담긴 여덟 개들이 스펀지 컵케이크였다. --- p.104 「김이설, 최선의 합주」 중에서 “이제 그 시절에서 나와.” 그 이야기는 하면 안 되는데. 오빠가 사라졌던 시절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잖아. 그럼 오빠도 꺼내면 안 되는 이야기인데. 나와 오빠가 경은 언니에게 우리를 만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안 물어 봤던 것처럼 오빠도 꺼내면 안 되는 이야기인데. 오빠의 반칙이었다. 나는 오빠를 노려보았다. “너도 너의 궁리를 해야지.” 일을 안 한 지 삼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돈을 안 벌었기 때문에 최대한 소비를 절제했다. --- p.121 「김이설, 최선의 합주」 중에서 리코더 연습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홉 명이 같은 소리를 낼 때도 있고 화음을 넣을 때도 있는데 언제나 이탈하는 소리가 있었다. 때로는 소리가 부족하기도 했다. 누군가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며 강사는 한 명씩 따로 불러보게도 했다. 하지만 개인 연습을 할 때는 한 명 한 명 제소리를 다 내던 사람들이 합주만 들어가면 소리가 비어서 강사가 짜증을 내곤 했다. --- p.127 「김이설, 최선의 합주」 중에서 지금의 나는 그 시절에 대해서 아주 간헐적인 기억만 할 수 있는 사람이 돼버렸다. 스물다섯 살에 입사해 서른두 살에 퇴사했다는 사실과 사람들로부터 배제되었다는 감각과 결국 내가 버티지 못해 스스로 뛰쳐나왔다는 열패감만 또렷할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오빠 말대로 충분히 멀리 도망친 것이 맞았다. --- p.129 「김이설, 최선의 합주」 중에서 아홉 명의 합주는 무사히 잘 마쳤으나 결국 빈 소리를 내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빈 소리를 그대로 둔 채 연주했다. 관객들은 그게 우리 전체의 소리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우리의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었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럼 상관없었다. 어쩌면 소리를 내지 않은 사람이 제일 떨리고, 두렵고, 어렵고, 힘들고,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 p.137 「김이설, 최선의 합주」 중에서 |
낯익은 동네, 첫사랑, 그리고 그때의 너와 나.
그 곳으로 돌아가는 길은, 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 앤솔러지 ‘얽힘’ 두 번째 프로젝트. 김이설, 이주혜, 정선임이 함께 만들어 낸 한번 흩어진 것들로 향하는 마음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 새로운 형식의 한국문학 앤솔러지 시리즈 ‘얽힘’의 두 번째 이야기 『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가 출간되었다. 얽힘(Entanglement) 시리즈는 우리의 삶이 개별적이면서도 우주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문학적으로 구현한다. 세 명의 작가가 독립적인 소설을 쓰면서도 서로의 세계관과 소재를 공유하며 하나의 책으로 엮어내는 프로젝트다. 작가들은 앤솔러지의 테마를 함께 정하고, 각자의 작품 속에 다른 작가의 장소나 키워드를 끌어오기도 한다. 결국 연결고리가 드러나기도 하고 또 숨어있기도 한, 얽혀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세 편의 단편소설이 완성된다. 독자들은 소설을 읽으며 예상치 못한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또 그렇게 연결된 이야기가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듯 이 한 권의 책 속에서 확장된 세계관으로 나아간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얽힘’ 2기에는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 문학의 중심에서 굵직한 작품들로 독자들의 신뢰를 받아온 김이설, 이주혜, 정선임 작가가 참여했다. 이들은 첫사랑, 익숙한 동네, 지나간 시절의 상처를 테마로, 그 시절을 떠나온 누군가가 다시 그곳을 찾아가는 낯선 여정을 각자의 언어로 섬세하게 그려냈다. 세 작품 이주혜의 「할리와 로사」, 정선임의 「해변의 오리배」, 김이설의 「최선의 합주」는 각기 다른 서사이지만, 전주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공통된 장소를 배경으로 삼고 있어, 책을 따라 읽다 보면 마치 세 명의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또한 추억과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정서를 입체적으로 담아냄과 동시에, 익숙했던 것들, 그 시절의 나에게 이별을 고하며 낯선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결연한 마음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책의 마지막에는 작가들이 서로에게 던진 질문과 답을 담은 「얽힘 코멘터리」가 수록되어있다. 이를 통해 독자는 기획부터 집필까지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각 작품의 성취뿐만 아니라, 이들이 모여 함께 도달한 문학적 지점을 함께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얽힘 시리즈 소개 ‘얽힘’은 다람의 문학 앤솔러지입니다. 세 명의 작가가 쓴 세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됩니다. 각 소설은 독립적이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 안에서 예상치 못한 연결고리를 찾아낼 것입니다. 그렇게 연결된 이야기는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듯 확장된 세계관을 향해 나아갑니다.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001 성혜령 이서수 전하영 『봄이 오면 녹는』 002 김이설 이주혜 정선임 『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 003 서장원 이선진 함윤이 (출간 예정) 004 예소연 전지영 한정현 (출간 예정) 005 연여름 조우리 황모과 (출간 예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