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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 유키 로사 0......1 작가의 말 |
李柱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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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문장을 꼭꼭 씹어 흠향할 수 있었다. 단어 하나하나를 소중한 씨앗처럼 내 가슴에 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말이 되어 나와주지 않았고 나는 다 좋다는 뜻으로 그저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거렸다. 유키 주위로 석양이 흩뿌리는 분홍빛 방울이 소나기처럼 우수수 쏟아졌다. 빛의 방울이, 빛의 줄기가 유키를 휘감으며 떨어져 내렸다.
---p.91 아이누 신의 노래는 전부 ‘나’로 시작한단다. ‘나’라는 신이 일인칭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야. 그러니까 우리가 그 노래를 부르는 순간 ‘나’는 올빼미고 범고래고 곰이지만 동시에 다행이라는 뜻의 유키, 너일수도 있고 눈이라는 뜻의 유키, 나일 수도 있으며 나의 유키에일 수도 있어. 노래하는 순간 우리는 그렇게 모두 하나의 ‘나’, 동포, 우타리가 되는 거야. ---p.94 다음 날부터 나는 교복을 뒤집어 입고 등교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누’는 죽으면 옷을 뒤집어 입고 관에 들어간다고 유키가 알려줬다. 이승과 저승은 모든 게 반대이므로 망자가 무사히 저승에 당도해 조상신을 만나려면 그곳의 법칙대로 옷을 뒤집어 입어야 한다고 했다. 뒤집힌 옷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표시했다. 유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나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이승에서 죽은 자가 되기로 했다. 그러면 유키가 저승에 가 있더라도 산 자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게 이승과 저승을, 죽은 자와 산 자를 맞바꿀 수 있을 것이다. ---p.140 아가, 누구나 제 몫의 파도를 넘나들며 산단다. 그러니 파도에 쓸려가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길 빌어야지. 누구나 제 몫의 파도를 넘나들며 산다. 할머니의 그 말이 제겐 여전히 나침반이 되어줍니다. ---p.166 당신에게도 이런 기억이 있지 않나요? 주변 사람들에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낯선 음식, 낯선 언어가 당신 몸 속 깊숙한 곳에 송곳니처럼 박혀서 가끔 조용히 반짝이고 있지는 않은가요? 평소에는 존재하는지도 모르다가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찾아오면 순식간에 날카로워지거나 반대로 온순하게 침을 흘려대는 그런 송곳니가요. ---p.167 이름도 정체도 모르는 그 아이를 제멋대로 허우의 아이와 겹쳐 보면서 가벼운 호의를 베풀고 혼자 흡족한 일박이 일을 보냈습니다. 단 하루의 시간여행을 경험하듯 그 시간을 누렸습니다. 그 아이가 부두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경찰이 오는 걸 알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은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십수 년간 저 자신조차 철저히 속여온 어떤 기만을 선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저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호의와 친절 따위로는 한 사람의 삶을 조금도 구할 수 없다는 걸요. 저의 다정은 어떤 힘도 없다는 것을요. ---p.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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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나’는 새로운 ‘당신’이 되었다”
제 몫의 파도를 넘나들며 서로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노래 2016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한 이래, 첫 장편소설 『자두』부터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섬세하고 예리한 언어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차곡차곡 다져온 소설가 이주혜가 어느덧 등단 10년을 맞았다. 그리고 그는 네 번째 장편소설 『나는 노래한다』에 이르러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한층 선명히 보여주며 그의 목소리를 돌올하게 드러낸다. 이주혜는 삶에 들이닥친 변화의 순간, 자신의 운명과 지난 과거를 마주하는 세 인물을 통해 제 몫의 파도를 건너며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노래를 날카롭고도 의연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일인칭으로 생생하게 그려낸 청춘의 성장기 0보다는 크고 1보다는 작은 가능성의 세계로 향하는 기적 『나는 노래한다』의 이야기는 2025년 발표한 단편소설 「할리와 로사」에서 출발한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할리헤어숍의 ‘할리’와 로사네일살롱의 ‘로사’의 짧은 전주 여행을 통해 두 인물의 매력을 접한 독자들은 이번 장편소설에서 둘의 두 번째 여행에 동행하게 된다. 별안간 동네가 재개발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접한 뒤, 폐업과 휴업의 갈림길에 선 두 사람은 “잠시 쉽니다”라고 쓴 안내문 한 장만을 내건 채 “0보다는 크고 1보다는 작은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8면)는 임시 휴업에 돌입한다. 그리고 “한 번도 안 가본 곳”, “아는 사람이 없는 곳”(15면)으로 떠나기로 한다. 그렇게 홋카이도로 여행지를 정하고 준비하는 순간부터 서로의 과거는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도안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사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도, 사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도” 피하며 지켜온 “적절한 거리와 적당한 낯섦”(32면) 은 예기치 못한 진실 앞에서 놀라운 반전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인물 ‘유키’는 단연 독자들의 마음속에 오래 남을 빼어난 여성 인물로, 이주혜 작가는 일본 본토인들에게 핍박받아온 아이누족의 문화를 통해 정체성의 문제와 두 언어 사이의 감각을 깊게 파고든다. 또한 유키의 목소리를 빌려 위태롭고도 눈부신 청춘의 성장기를 일인칭으로 생생하게 그려낸다. 유키의 마음을 고스란히 옮기려면 모든 걸 바라볼 수 있는 삼인칭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얼마간은 삼인칭으로 이야기를 이어보았다. 그러나 유키의 입으로 아이누의 노래에 관해 서술하는 장면들을 쓰면서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아이누가 되고 싶었던 유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이누 신요 한편이어야 했다. 그동안 쓴 문장을 모두 지우고 유키 챕터의 첫 문장을 다시 썼다. 나는 노래한다. 그렇게 나중에 소설 전체의 제목이 될 문장이 찾아와주었다. 여기서 ‘나’는 행운의 유키였고, 유키가 사랑한 눈의 유키였으며, 흰올빼미의 눈빛이고 치리 유키에의 생애이기도 했다. 문장이 이어지면서 이 모든 ‘나’는 새로운 ‘당신’이 되었다.(200~201면) 경계에 선 사람들의 불안을 감지하는 시선 갈수록 깊어지는 이주혜의 문장들 『나는 노래한다』에는 수많은 경계인이 등장한다. 이주혜 작가는 그들 내면의 불안을 누구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감지한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 흔들림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조차 두 언어 사이에서, 여러 정체성 사이에서, 자신조차 헤아리기 어려운 두 마음 사이에서 저마다 분투하고 있다. 때로는 괴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위악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주혜 작가는 살면서 예기치 않게 맞닥뜨리게 되는 시련의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으며,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잘 통과해낼 수 있다고, 예의 단단한 손길과 더욱 깊어진 문장으로 우리를 조용히 위무한다. 우리가 겪어야 하는 “제 몫의 파도가 또 한 차례 가차 없이 몰려”(179면)들더라도 우리는 그 파도를 넘을 수 있다고, 풍랑에 휩쓸리지 않게 곁을 지켜주겠다고, 기꺼이 우리 삶의 “목격자이자 증인이 되어”(196면)줄 거라고. 아가, 누구나 제 몫의 파도를 넘나들며 산단다. 그러니 파도에 쓸려가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길 빌어야지.(166면) 할리는 어린 시절 할머니였는지 엄마였는지, 누군가 어린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해주었던 것처럼 손을 뻗어 로사의 어깨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로사가 놀랐는지 어깨를 움찔했다가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 할리는 오늘의 시름은 내일로 밀쳐두고 일단 자라고, 내일의 파도는 내일 넘기로 하고 우선 자자고 속삭였다. 한참 후에 로사의 어깨가 부드럽게 내려앉더니 거칠고도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할리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남은 불면의 밤을 혼자 건너기 시작했다.(55~56면) 다람 소설선 다람출판사가 한국소설의 새로운 감각과 다채로운 결을 선보이는 소설 시리즈 ‘다람 소설선’을 런칭한다. 그 첫 작품으로 이주혜 소설가의 장편소설 『나는 노래한다』를 출간한다. ‘다람 소설선’은 한국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넓고 깊은 스펙트럼을 지향한다. 장르와 세대, 목소리의 경계를 넘어 지금 이 시대에서 가능한 새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익숙함과 낯섦이 교차하는 문학적 세계를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자 한다. 이주혜 『나는 노래한다』 이서수 (예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