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엄마의 저녁 인사와 나의 고뇌
마들렌 에피소드 콩브레 메제글리즈 쪽 산책 게르망트 쪽 산책 서로 통하는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 게르망트 마티네 내가 써야 할 책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 |
Marcel Proust,Marcel Valentin Louis Eugene Georges Proust
마르셀 프루스트의 다른 상품
송진석의 다른 상품
|
물론 내 깊은 곳에서 고동치는 것은, 그 맛에 매달려 나에게까지 오려고 시도하는 이미지, 곧 시각적 추억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먼 곳에서 너무 막연하게 발버둥 친다. 나는 휘저은 색깔들의 포착할 수 없는 소용돌이가 뒤섞이고 있는 중성적 반영을 겨우 지각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형태를 분별할 수 없고, 유일하게 가능한 통역자에게 하듯, 그것의 동시적 존재이자 뗄 수 없는 동반자인 맛의 증언을 내게 번역해 줄 것을, 그리고 어떤 특수한 정황, 어떤 과거의 시기가 문제 되는 것인지 내게 알려줄 것을 그것에게 요구할 수도 없다.
--- 「마들렌 에피소드」 중에서 이윽고 나는 마치 바라보는 것을 잠시 멈추고 났을 때 그것을 더 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작 앞에서인 양 산사나무 앞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눈앞에 오로지 그것만을 두기 위해 손으로 가림막을 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내 안에 일깨운 감정은 모호하고 막연하게 남은 채 벗어나려고, 그 꽃들에 와 결부되려고 부질없이 애쓸 뿐이었다. 산사나무 꽃들은 그 감정을 해명하도록 나를 돕지 않았고, 나는 다른 꽃들에게 그것을 충족시켜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었다. --- 「메제글리즈 쪽 산책」 중에서 나는 그 어떤 것이 그들 안에 있다고 느꼈으므로 내가 있던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바라보고 호흡하며 내 사념과 더불어 이미지나 냄새 너머로 가보려고 애썼다. 할아버지를 따라잡아 길을 계속 가야만 할 경우, 나는 눈을 감고 그것들을 되찾으려고 했다. 나는 또한 지붕의 선, 돌의 뉘앙스를 정확하게 떠올리는 데 몰두했는데, 그것들은 내가 알 수 없는 곡절로 속이 가득 차 있으며, 스스로 열림으로써 그것들이 덮고 있는 것을 내게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까닭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인상들이 언젠가 작가와 시인이 될 수 있으리라는 잃어버린 희망을 내게 돌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 인상들은 언제나 지적 가치가 결여되어 있으며 그 어떤 추상적 진리와도 관련되지 않는 특정 대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들은 내게 알 수 없는 기쁨을, 일종의 생산성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고, 그렇게 권태로부터, 그리고 위대한 문학 작품을 위한 철학적 주제를 찾으려고 할 때마다 느껴야만 했던 무력감으로부터 내가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그 형태, 향기 또는 색채의 인상이 내게 부과하는 의무감이 - 곧 그것들 뒤에 감춰진 것을 인식하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어찌나 힘들게 했던지, 나는 곧 그 같은 노력에서 빠져나와 그 고단함을 면하게 해줄 핑계들을 찾아야만 했다. --- 「게르망트 쪽 산책」 중에서 내가 방금 전에 느낀 기쁨은 실제로 마들렌을 먹으면서 느꼈고, 당시로서는 그 깊은 이유를 찾는 일을 뒤로 미루어야만 했던 바로 그 기쁨과 같은 것이었다. 두 기쁨 사이의 순전히 물질적인 차이는 상기된 이미지들에 있었다. 깊은 창공이 내 눈을 도취시키며 시원한 인상과 눈부신 빛이 내 곁에서 소용돌이쳤고, 나는 그것들을 잡으려는 욕망에서, 마들렌 맛을 음미하는 순간 그것이 떠올리는 것을 나까지 이르게 하려고 애쓰면서 그랬던 것처럼, 감히 더 이상 꼼짝하지 않은 채, 수많은 운전수의 무리가 웃음을 터뜨리는 것조차 무릅쓰고,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한쪽 발은 높은 포석을, 다른 쪽 발은 낮은 포석을 밟고 비틀거리면서 있었다. 그런데 같은 동작을 오로지 물질적으로만 되풀이해 본들 그것은 매번 무익한 것이기만 했다. 하지만 게르망트 마티네를 잊어버리고 그렇듯 발로 포석을 디디면서 느꼈던 것을 다시 되찾는 데 성공했을 때는 그 명료하지는 않지만 찬란한 광경이 또다시 나를 스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럴 힘이 있으면 지나가는 나를 붙잡아 봐. 내가 네게 제안하는 행복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란 말이야.” 나는 거의 즉시 그 광경을 알아보았다. --- 「게르망트 마티네」 중에서 그렇다. 추억이 망각 덕분에 자신과 현재 순간 사이에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하고 또 어떤 연결고리도 걸쳐놓을 수 없었다면, 그냥 자기 자리 자기 날짜에 머물러 있었다면, 움푹한 계곡 또는 산봉우리 정상에 고립된 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문득 새로운 공기를 호흡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 공기는 예전에 우리가 호흡했던 바로 그 공기이기 때문이다. 이 공기는 시인들이 낙원을 채우려고 헛되이 시도했던 더욱 순수한 공기이니, 이 갱신의 깊은 느낌은 그것을 이미 호흡한 다음에만 가능하다. 진정한 낙원은 잃어버린 낙원인 까닭이다. --- 「게르망트 마티네」 중에서 물론 우리 감각이 범하는 수많은 다른 오류들이 있다. 우리 눈에 이 세계의 실제 양상을 왜곡해서 보여주는, 이 이야기에 포함된 다양한 일화들이 내게 그것을 입증해 주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제공하려고 애쓸 보다 정확한 옮겨 쓰기에서 나는 소리들의 위치를 결코 바꾸지 않으며, 비록 지성이 그것들을 엉뚱한 자리에 위치시키겠지만, 그것들이 원인과 유리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방 한가운데에서 빗소리가 부드럽게 노래를 부르거나 보리수 달이는 물 끓는 소리가 안뜰에 홍수처럼 쏟아져 내리게 하는 것이, 화가들이 돛이나 산봉우리를 - 원근법의 규칙, 색채의 강도, 맨 처음 시선의 착시, 이런 것들이 우리 눈에 어떻게 나타나게 하느냐에 따라 - 그토록 자주 우리에게서 매우 가까이 또는 매우 멀리 보이도록 - 뒤이은 추론은 그것들을 이따금 엄청난 거리 너머로 이동시킬 것이다 - 그리는 것보다 결국 더 황당하달 것도 없다. 오류는 더욱 심각할지언정, 사람들이 그리하듯, 나는 계속해서 지나가는 여인의 얼굴에 이목구비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써야 할 책」 중에서 |
|
차 한 잔에 담긴 콩브레라는 추억의 원형
시간을 아우르는, 인상과 느낌에 관한 소설 “엄마와 단둘이 되자마자 터지고 만 오열을 나는 매우 잘 지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오열은 결코 그친 적이 없다. 오로지 내 둘레의 삶이 이제 보다 더 침묵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다시 들을 수 있다. 낮 동안 도시의 소음에 뒤덮여 멎어버린 줄로만 알았으나 저녁의 고요 속에서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수도원의 종처럼”_「엄마의 저녁 인사와 나의 고뇌」에서 어린 시절의 인상들은 어떻게 문득 떠올라 삶 전체를 펼쳐 보이는 걸까? 엄마의 저녁 인사를 받지 못할까봐 불안해하던 어린 마르셀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시간이 지나 마르셀이 콩브레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마들렌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마르셀은 엄마가 건넨 마들렌 한 조각이 무르고 있는 숟가락에 담긴 차를 마시는데, 그때 문득 추억이 나타난다. 이 맛은 일요일 아침 콩브레에서 레오니 아주머니 방에 아침 인사를 하러 가면 아주머니가 마시던 차에 담갔다가 꺼내어 주던 작은 마들렌 조각의 맛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어린 시절이 녹아 있는 콩브레 일대가 펼쳐진다. 레오니 아주머니가 준 보리수차에 담근 마들렌 조각의 맛을 알아보자마자 즉각 아주머니의 방이 있는 길에 면한 오래된 회색 집이, 그리고 집과 더불어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는 온갖 날씨의 도시의 모습, 점심 먹기 전에 자신을 보내곤 하던 광장, 장을 보러 가던 골목들, 날씨가 좋을 때 걷던 길들이 나타난다. 인상과 느낌이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그것은 어떤 작업을 필요로 하는가? 예술 작품을 만들면서, 곧 문학 작품을 쓰면서라고 마르셀은 이 책을 통해 말한다. 왜냐하면 오로지 예술만이 “우리에게 가장 귀하되 대개는 영영 미지의 상태로 남는 것, 곧 우리의 진정한 삶, 다시 말해 우리가 느낀 그대로의 실재,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그토록 달라서 어떤 우연이 진정한 추억을 가져다주면 우리가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될 그런 실재”를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삶의 정수에, 시간의 본질에 가닿는 문학 마르셀 프루스트의 세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두 일곱 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이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마르셀이 작품을 ‘대성당’에 비유한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 비유는 장대한 분량에 복합적 구성을 갖고 있는 소설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적절한 비유다. 그것은 또한 작품을 옹호해 주는 비유이기도 하다. 방대한 분량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가려 뽑은 이 선집에서 우리는 물질적 자극에 의해, 그로부터 촉발된 인상에 의해 무의지적 추억을 갖게 된 존재의 움직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시간 탐색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과거를 다시 소생시키려는 노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과거를 질료 삼아 진정한 삶, 본질적 시간을 창조하려는 작업이다. 시간의 바깥에서 “첨탑의 형태, 선들의 이동, 표면의 환한 빛을 확인하고 기억해 두면서 나는 내가 받은 인상을 완성할 수 없으리라는 것, 그 움직임 뒤에는, 그 빛 뒤에는 어떤 것이, 그것들이 담는 동시에 숨기는 듯 여겨지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_「게르망트 쪽 산책」에서 “이때 내 안에서 그 느낌을 맛보고 있는 존재는 그 느낌이 예전의 날과 지금 현재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 안에서, 다시 말해 그 느낌이 갖고 있는 초시간적인 것 안에서 그 느낌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존재는 현재와 과거의 일치 가운데 하나를 통해, 자기가 살아낼 수 있고 또 사물의 본질을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에 자리 잡을 수 있을 때에만, 다시 말해 시간의 바깥에 자리 잡을 수 있을 때에만 나타나는 존재였던 것이다”_「게르망트 마티네」에서 인상이 과거와 현재에 동시에 연결되며 바야흐로 시간으로부터 해방된다. 존재는 이제 시간에서 벗어나 초시간의 영역, 나아가 본질적 시간으로 돌입한다. 예로부터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영원을 추구해 왔다.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는 특별한 체험에서 출발하여 시간의 본질 또는 삶의 정수를 지성의 등가물, 곧 문학 작품으로 축조하는 일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 하염없는 페이지들을 통해 절실히 탐색하고 또 감동적으로 제시하는 위대한 영원의 형태로 여겨진다. 프랑스 문학의 정수를 가려 뽑은 마르셀 프루스트 선집과 알베르 카뮈 선집 동시 출간! 오늘 저녁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 어떤 어린 시절의 이미지라면, 내가 거기서 끌어낼 수 있는 사랑과 가난의 교훈을 어째서 받아들이지 않는단 말인가? 그 시간은 예와 아니오 사이의 틈 같은 것이므로, 나는 삶에 대한 희망이나 염오는 다른 시간들로 돌린다”_『태양과 바다와 인간: 알베르 카뮈 선집』에서 이 책의 주인공 마르셀처럼 되돌아오는 어린 시절의 이미지를 긍정하는 작가로, 알베르 카뮈가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선집』과 함께 출간되는 『태양과 바다와 인간: 알베르 카뮈 선집』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 세상을 감각하고 자신들만의 언어로 풀어내는 프랑스 작가들의 글을 가려 뽑은 이 두 권의 선집에서 삶과 예술에 대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