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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Maxwell Coetzee,존 쿳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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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대화'를 진행하는 수잔 모비어스입니다. 오늘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씨를 모시고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씨, 가장 최근에 발표한신 『불과 얼음』은 1930년대의 오스트레일리아를 배경으로, 가족을 비롯한 모든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가가 되려고 몸부림을 치는 청년의 이야기인데요. 이 소설을 집필하실 때, 특별히 염두에 둔 사람이 있었나요? 이 소설은 당신이 젊었을 때의 모습을 묘사한 건가요?"
"아뇨, 저는 1930년대에는 아직 어린애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글을 씁니다. 그게 우리의 주된 자원이니까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자원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불과 얼음』은 자서전이 아니고 소설일 뿐입니다.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p.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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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비소설(강연, 에세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포스트모던한 기법의 작품
이 책은 ‘여덟 가지 강연’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듯이 모두 여덟 가지 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물론 각 장마다 약간의 형식적 파괴는 있지만 각각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강연하는 장면이 실려 있다. 그리고 후기 형식으로 “레이디 찬도스, 엘리자베스가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보낸 편지”라는 제목의 글은 앞의 장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내용이다. 앞장에 나오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20세기 초반에 태어난 오스트레일리아 작가인 데 반해, 후기에 나오는 엘리자베스 C는 17세기 사람이다. 쿳시가 말하기를, 이 후기는 “오스트리아 작가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작품에 기초한, 편지 형식으로 된 일종의 허구화된 에세이”로서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지금까지의 그의 소설적 흐름으로 보건대, 독특한 글쓰기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소설과 비소설(강연, 에세이)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한 이 작품은 다분히 포스트모던한 기법이라 할 수 있다. 1928년에 태어나 아홉 권의 소설과 두 권의 시집, 새에 관련된 저서 한 권과 상당한 분량의 논픽션을 저술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네 번째 소설인 ?에클즈 스트리트의 집?(1969)으로 명성을 얻어, 1995년 미국에서 수여하는 ‘스토우’ 수상자로 선정된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수상 연설에서 생뚱맞게 ‘리얼리즘’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된다. 이것이 첫 번째 강연이다. 몇 년인지 알 수 없는 어느 12월, 엘리자베스는 보름간의 일정으로 크리스처치에서 출항하여 로스 대빙원으로 갔다가 다시 케이프타운으로 항해할 예정인 스톡홀름에 있는 스칸디아 선박회사의 유람선 SS 노던 라이트 호에서의 강연을 의뢰받는다. 그 유람선에서 그녀는 젊은 날 아주 잠시 열정을 불태웠던 나이지리아 작가인 에마뉴엘 에구두와 함께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의 강연은 ‘소설의 미래’, 에구두의 강연은 ‘아프리카에서의 소설’이다. 이것이 두 번째 강연이다. 스토우 상 수상 2년 후, 미국 애플턴 대학에서 매년 한 차례 열리는 ‘게이츠 강연’에 초청을 받은 그녀는 자신과 관련있는 소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장기인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는다. 첫날은 철학자들과 동물들, 둘째 날은 시인들과 동물들이라는 부제로 ‘동물들의 삶’이라는 강연이 바로 세 번째 강연과 네 번째 강연이다. 어머니 장례식 이후 12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언니 블랑쉬의 초청으로 엘리자베스는 아프리카로 날아간다. 블랑쉬는 고전학자로서 교육을 받고, 의료선교사로 재교육을 받아 줄룰란드에 있는 마리안힐 병원에 의료활동을 펼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게 되었다. 언니의 명예박사 연설인 ‘아프리카에서의 인문학’이 바로 다섯 번째 강연이다. 게이츠 강연이 있고 난 뒤 1년 후, 그녀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모이는 학회에서 ‘침묵, 공모성, 그리고 죄의식’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부탁받는다. 이것이 여섯 번째 강연인 ‘악의 문제’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강연은 앞의 강연들과는 형식을 달리한다. ‘에로스’라는 일곱 번째 강연은 미국인 친구가 보내준 책에서 에로스와 프시케에 관련된 시를 읽은 뒤에 신과 인간, 그리고 최소한의 것도 아니고 최종적인 것도 아닌 사랑에 대한 명상이다. 여덟 번째 강연 ‘문에서’는 시간도 장소도 애매모호한 어느 곳에서, 목적지를 향한 문을 통과하려면 믿음에 대한 진술서를 써야 한다는 재판관에 대항하면서 믿음과 작가 또는 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윤리적·미학적·철학적 차원의 문제들을 심오하게 논하고 있는 성공적인 관념소설 이 작품은 각각 독립적인 주제가 확연히 드러나 있는 강연에 맞물려, 결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강연자와 청취자, 즉 승자와 패자 사이에 팽팽한 힘겨루기가 펼쳐진다. 만약 이 작품이 그런 분위기로 시종일관 이어진다면 얼마나 숨이 막힐 것인가. 다행히 쿳시는 곳곳에 주인공의 심리를 비롯하여 그녀와 관계된 인물들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간결하면서도 응축하듯이 버무려 무거운 주제를 놓고 빚어지는 긴장감을 해소해주는 장치를 해놓았다. 따라서 이 작품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강연을 통해서든, 주인공의 심리를 통해서든 곳곳에 스며 있는 쿳시의 사유방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소설 양식에서는 좀처럼 다루기 어려운, 무겁고 골치 아픈 주제들을 카프카와 폴 웨스트를 끌어들여 그들과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작법은 자신의 입장마저도 객관화시키고 극화시켜 적대적인 것과 대치상태에 놓으려 하는 쿳시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쿳시는 문학과 철학, 종교와 성, 인간과 동물, 인문학에 대한 고찰 등 자칫 관념으로 흐를 법한 주제를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눈부신 발상을 가미하여 매력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말을 도출해낸다. 이렇듯 심오하면서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이야기를 엮어나갈 수 있는 것은 역시 관록있는 쿳시만이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쿳시의 소설은 일종의 포스트모던 반소설anti-novel이다. ‘여덟 개의 강의(교훈)’라는 부제는 얼마나 자기반영적이고 반소설적인가! 그렇다고 쿳시의 소설들이 자기유희적이며 자기탐닉적이란 말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쿳시가 너무나 심각한 작가이다. 자신한테까지 그렇게 모진 작가를 어찌 자기유희적이고 자기탐닉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중략) 이처럼 관념을 다루는 소설에서는 자칫, 그 관념이 예술적 완성도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심오한 관념이나 사변에 젖다 보니, 예술적 형상화를 소홀히 하는 탓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그러한 오류에 빠져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 소설은 다른 소설과는 판이한 형식을 택함으로써, 전통적인 소설양식에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윤리적?미학적?철학적 차원의 문제들을 점검하고 논의하면서도 소설의 형식에 충실한 성공적인 관념소설이다. ('옮긴이의 글' 중에서) |